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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한국 건축문화대상 고암 이응노 생가를 가다
2013 한국 건축문화대상 고암 이응노 생가를 가다
  • 유화미
  • 승인 2016.10.31 15: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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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 생가 탐방
 

일평생 3만 여점의 작품을 남기며 그림에 살다간 고암 이응노 선생의 생가는 2011년 재건축 되었으며 2013년 한국 건축문화대상을 받은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곳이다. 이응노 선생에게 예술적 모티브가 되어준 그의 생가를 감상해보자.

고암 이응노의 예술 혼이 살아 숨 쉬는 생가

홍성에 자리 잡은 고암 이응노 선생의 생가. 홍성군이 선생을 기념하는 사업으로 설계 경기를 열어 당선작을 뽑아 2011년에 재건축되었다. 본 전시관, 야외전시장, 다목적실, 복원된 생가, 연지공원, 북카페 등으로 이루어진 이 곳에선 고암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관람객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각종 체험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다.
이응노의 집을 설계한 건축가 000에 따르면 옛 방식으로 복원된 생가와 현대적인 건축물들이 한데 조화를 이루도록 흙 마감을 시도했는데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고 한다. 이런 정성이 깃들어서일까. 현대적인 건축물인 기념관과 전통 한옥인 초가집이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조화를 이룬다.
이응노의 집은 그러한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용봉산을 품은 고암의 생가에선 자연과 함께 뛰놀며 예술인으로서의 꿈을 키우던 그의 어린 시절을 엿볼 수 있다.
홍성군에서는 '이응노 마을로 떠나는 한여름 밤의 예술 마실' 행사를 마련하는 등 그의 예술 세계를 기억하고 보다 많은 이들과 나누려 노력하고 있다.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

1904년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에서 태어난 고암 이응노선생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지만 옛 문화와 전통을 중시하던 아버지의 눈에 그것이 고와 보일 리 없었다. ‘그림 같은 것은 상놈들이나 그리는 것’이라며 나무랐지만 아버지의 눈을 피해 선생은 그림에 대한 열정과 재능을 키워갔다.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그런 나를 도와주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나를 방해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말했지만, 나는 남몰래 가벼운 마음으로 줄곧 그리고 또 그렸다. 땅 위에, 담벼락에, 눈 위에, 검게 그을린 내 살갗에…… 손가락으로, 나뭇가지로 혹은 조약돌로…… 그러면서 나는 외로움을 잊었다.”
대대로 서당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당시의 세상은 신식 문화의 물결이 파도치던 변화의 시대였다. 고암은 이대로 시대와 동떨어진 채로 손 놓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려 경성으로 향한다.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품은 채로.

한국 현대사를 그린 예술가의 생애

새로운 것을 개척하기 위해 고향 집을 떠나왔지만 가난한 화가 지망생에게 경성은 그리 평탄한 곳은 아니었다.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장의사에 취직하여 상여에 장식 그림 그리는 일로 경성생황을 이어가다 해강 김규진 선생에게 그림을 배우게 된다. 그림을 배우며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의 제3부 ‘서 및 사군자부’에 출품한 <청죽>이라는 작품으로 예술계에 첫 발을 내딛는다. 그러나 이는 시작인 동시에 긴 침묵의 시간을 알리는 길이기도 했다. 청죽으로 입선한 이후 끊임없이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내지만 무려 여섯 해나 줄줄이 낙선하고 만 것. 그는 자신의 작품이 기존 작품들의 형식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이루고자 한다.
이에 1935년 일본으로 떠나 남화의 대가 마츠바야시 게이게츠라는 스승에게 그림을 배우며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이후 해방이 되는 1945년까지 10년간 일본과 조선을 오가며 여러 대회에 작품을 출품하고 개인전을 여는 등 활발한 예술 활동을 이어간다. 해방 이후 김영기, 장우성 등과 함께 ‘단구미술원’을 조직해 식민지 시대의 잔재와 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 새로운 한국회화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6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1958년 프랑스 평론가 자크 라센의 초청으로 파리로 건너가 1961년 그 곳에서 첫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이후 프랑스에 정착한 고암은 언제나 자신의 조국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예술 세계의 근본은 항상 고향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두 번 다시 조국 땅을 밟지 못했는데 바로 1967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동백림 사건'으로 간첩으로 몰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3년여의 옥생활을 하는 등 갖은 고초를 겪는다. 옥중에서도 고암은 작품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붓과 종이가 없었지만 그런 것은 예술가인 그에게 큰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어릴 때 가난하게 보냈기 때문에 주위에 있는 것은 뭐든지 재료가 되었답니다. 농사일을 하면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나뭇조각이 눈에 띄면 그걸 깎아 조각을 하고, 신문지를 풀에 개어 오브제를 만드는 식으로 말입니다. 데생도 연필이나 붓이 없으면 젓가락으로 대신했고, 간장을 잉크 대신 사용하기도 하고…, 그런 것은 어린 시절부터 했던 일이지요.”

고암 이응노만의 독특한 예술 세계

고암이 프랑스에 정착했을 때에는 전 세계가 추상 미술의 영향을 받고 있을 때였다. 선생도 이런 미술계의 변화를 받아들여 먹이나 물감 이외에 천이나, 종이 등의 여러 재료들을 캔버스에 붙여 만드는 콜라주 기법을 사용하여 실험적인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이에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여는 등 호평을 얻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에 보상이라도 하듯 1965년 제8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명예대상을 수여받아 전 세계에 이목이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온 예술가에게 쏠렸다.
동백림 사건에 휩쓸려 옥고를 치른 후에도 파리로 돌아와 예술 활동을 이어갔다. 서예 조형의 기본을 현대화한 문자 추상 작품들을 선보였으며 1980년대에는 광주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오로지 사람을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1989년 그가 사람을 그리는데 몰두한 지 10여년이 흐른 후에 서울 호암갤러리에서는 고암 이응노 선생의 대규모 회고전이 기획되었다. 간첩으로 몰린 후 단 한 번도 고국의 땅을 밟지 못했던 그였기에 이 회고전에 대한 기대는 누구보다 컸다. 그러나 선생은 고국에 대한 열망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1989년 심장마비로 파리에서 한 많던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그런 나를 도와주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나를 방해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말했지만, 나는 남몰래 가벼운 마음으로 줄곧 그리고 또 그렸다. 땅 위에, 담벼락에, 눈 위에, 검게 그을린 내 살갗에…… 손가락으로, 나뭇가지로 혹은 조약돌로…… 그러면서 나는 외로움을 잊었다.”

관람정보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
주소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이응노로 61-7

자료제공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 홍성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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