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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종이 예술가 김영희, 이 세상 아이들에게 보내는 헌사
닥종이 예술가 김영희, 이 세상 아이들에게 보내는 헌사
  • 백준상 기자
  • 승인 2016.11.29 23: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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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종이 인형으로 유명한 김영희 작가가 지난 8월 23일부터 9월 25일까지 서울 조선일보미술관에서 ‘김영희 닥종이 조형전’을 열었다. ‘행복한 아이들의 춤과 노래를’ 부제로 한 이번 전시회는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아이들의 모습과 컬러풀한 인형들로 관심을 모았다. 작가를 만나  인형작품들에 깃든 사연을 들어보았다.

취재 백준상 기자 사진 양우영 기자

작가가 닥종이 인형 작업을 본격적으로 한 지가 어언 40여년. 엄마와 아이들을 소재로 한 인형작업에 이제 질릴 법도 하지만 김영희 작가는 꿋꿋하게 엄마와 아이들에 천착해오고 있다. 한때 그의 삶의 원천이자 작업의 동력이었던 그의 아이들은 자라서 이제 모두 성인이 되었다. 그리고 어엿하게 어머니나 아버지가 된 자녀들은 그에게 여섯 손주를 안겨주었다. 손주 역시 그가 사랑하는 아이들이다.
이번 전시작품들에서는 손주들에 대한 사랑도 많이 반영됐다. 작가가 30년 넘게 독일 뮌휀 근교의 작업실에서 아이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한 작품 60여 점을 공수해왔다. 작품 속 천진무구한 어린이들의 표정, 그것은 어떤 어려움도 겪어보지 않았던 아이들의 것임에 분명하다. 자신의 아이들을 키워 어엿하게 독립시킨 어머니의 안도감은 손주와도 같은 아이들의 표정을 한없이 경쾌하고 발랄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어릴적 추억과 주변 아이들이 작품의 원천

“엄마 마음으로 보면 모든 아이가 다 귀한 존재에요. 아이들을 보면 표정이 밝아져요. 내 아이들만이 아니라 길거리의 아이들을 보고 작품을 생각한답니다. 세속에 때가 안 묻은 아이들에게서 예술의 절정 같은 것을 느끼게 돼요. ”
그는 이제 아이들의 엄마는 아니지만 아이들의 할머니가 되었다. 그리고 길거리의 아이들은 시리아 난민 어린이들을 말하는 것일 게다. 독일 뮌휀 그의 작업실 근처에는 시리아 난민 수용소가 들어섰다고 한다. 그는 그 곳 아이들의 천진한 눈망울에 이미 마음을 빼앗겼다.
몇 해 전 고희를 보냈다는 김영희 작가는 50대 중견작가처럼 활발하게 보였다. 짧고 단정한 헤어스타일에 깊고 검은 아이라인, 건강한 구리 빛 피부, 그리고 작가임을 도드라지게 하는 검은 옷차림이었다. 여느 할머니 같으면 집안에서 손주들 재롱을 보거나 병치레로 병원출입이 잦을 나이인데 줄곧 전시장을 지키고 있는 그가 갑자기 생경하게 느껴졌지만, 그의 말은 한술 더 떴다.
“제 나이면 작품 활동을 하기에 제일 좋은 나이지요. 추구하는 것도 많고…. 작가가 나이 드는 것은 시간 여유를 더 가지게 되고 좀 더 예술적으로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 나쁜 것은 아니라고 봐요. 작품 활동은 나이를 따지지 않는 유일한 직업이지요.”
그는 곧 대작을 만들어낼 것처럼 호기롭게 말했다. 그는 여느 예술가들처럼 전혀 어눌하지 않았고 어느 한 단어도 그냥 발설하는 법이 없었다. 어느 누구라도 그와 단 몇 분만 대화해 보면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자유로움과 여유로움이 물씬 묻어났다. 이제 생계의 고단함과 그리고 육아의 어려움을 훌훌 벗어던진 듯했다. 그가, 사별한 전 남편과 독일인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각각 아이를 낳아 모두 오남매를 길러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바다. 그의 필력을 뽐낸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예담출판사) 등 여러 베스트셀러를 통해 그는 그의 미술작업과 가정사에 대해 솔직하게 밝혔었다.
그는 지금까지 가장과 어머니 역할에 작가 역할까지 떠맡느라 숨 가쁘게 달려왔다. 그의 닥종이 인형 작업은 실상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한 일이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성이 폄하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가 여성으로서,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했던 것이 그의 작가적 성공을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교육시키면서 작품 활동을 하느라 남는 시간이 없었어요. 쇼핑 여행 등 변변한 사생활도 없었지요. 지금까지 하루 서너 시간 밖에 잠을 못 잤어요. 심지어는 아기 업고 전시회에 나가기도 했답니다. 여자라면 자기 아이를 못 키우면 안 된다는 의식이 박혀 있었어요. 작가 역시 가슴으로, 정(情)으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믿음이 있었지요. ”
그는 이혼의 아픔으로부터도 회복된 듯했다. 그는 두 번째 남편인 토마스와 자폐를 앓는 막내아들 프란츠(25) 교육문제로 갈등을 겪다가 지난 2012년 이혼했다. 그가 기억하기로는 토마스는 그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이자 존경하는 사람이었고. 아내를 위해 헌신한 착한 남자였다. 그는 이혼 후 우울증에 시달렸다. 의사는 산책을 많이 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고 조언했다.
“요즘은 즐겁습니다. 비록 의도하지 않았던 인생이지만 집안의 막내로서 이만큼 성장하고, 외국에 나가 작가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 기쁩니다. 고생 많이 했지만 주변의 도움도 있었고, 매일매일이 감사합니다. 행복이 얼마나 지속될지 몰라도 좀 더 누려보고 싶네요.”
그는 현재 인간으로서 받는 행복을 느껴보고 있는 중이다. 비록 충분할지는 몰라도.

다섯 남매 키우기의 보람과 애환

모든 부모들의 소원처럼 그도 아이들이 잘 성장해주길 바랬고, 아이들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첫 남편은 유진, 윤수, 장수 세 아이를 남기고 암으로 사망, 그는 서른둘에 졸지에 과부가 되었다. 이후 5년 더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지만 어느 날 14살 연하의 독일 남자 토마스가 홀연히 다가왔다.
태권도 때문에 한국어를 배웠던 토마스는 한국작가를 만나고 싶다 했고 그러던 중 김 작가를 소개받은 것이다. 당시 김 작가는 중학교 미술교사를 그만두고 닥종이 작품 활동을 통해 한국 화단에서 조그만 성공을 거둔 때였다. 70년대 후반 그는 글로벌 잡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도 기사로 소개되기도 했다. 1981년 사랑하는 남자 토마스를 따라 독일로 간 김 작가는 그와의 사이에 봄누리와 프란츠를 낳았다.
다섯 자녀는 독일에서 지내면서 때로는 왕따 당하고 차별 받은 적도 있었지만 이제 성인이 되어 각자 자신들의 삶을 누리고 있다.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운 그였지만 성인이 된 다음에는 강해져야 한다고 믿는 그는 대학졸업과 동시에 자녀들에게 돈 한 푼도 주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아이들이 삐치므로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희 어머니도 그런 식으로 제게 자립심을 키워주셨어요. 자녀에게 돈을 주는 건 모성이 아니라고 봅니다. 독일이 선진국이긴 하지만 결코 살기가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이들에게 누누이 말했지요. 한국에는 절대 눈 돌리지 말라고. 독일 돈을 뜯어먹어야 한다고요.”
때문인지 아이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독일에서 자리를 잡았다. 첫째인 딸 유진은 파산한 회사들의 법정관리를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가 됐다. 독일 유수의 법무법인에 있다가 변호사 사무실을 차렸고 수익도 꽤 내며 자리를 잡았다. 
둘째인 아들 윤수는 열네 살에 최연소 특별 장학생으로 음악대학을 입학했던 재원. 졸업 후 밤낮으로 일해 모은 돈으로 재원을 마련해 사설 음악학교를 차렸다. 신문에도 실릴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는 음악학교로 성장시켰다.
셋째인 아들 장수는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 받아 패션 디자인을 전공했으나 방송국에 취직해 프로그램 편성 일을 맡아 했다. 지금은 자연의학 자격시험에 합격해 장차 이 분야에서 승부를 걸어보고 싶어 한다.
넷째인 딸 봄누리는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쳐 피아노 실력이 출중한데다 얼굴도 미인이라 세계적인 매니저로부터 피아니스트로 키워주겠다는 제안까지 받았다. 그러나 어느 날 미혼모가 되어 아이를 낳겠다고 했으며 현재 어렵게 아이를 키우며 자신의 재능을 살려가고 있다.
다섯째 막내인 아들 프란츠는 천사 같은 아이로서 가장 솔직하고 거짓말을 못하는 아이로 자랐다. 잘 생긴 청년을 지난 어른이 되었지만 아직 자립하지 못했다. 후천적으로 자폐증을 앓았는데 점점 심해져 지금까지 치료받고 있다.
“엄마의 노력으로 아이의 자폐증이 낫는다는 생각은 오산이에요. 프란츠가 다니던 학교에는 자폐를 치료하는 병원까지 갖춰져 있었지만 프란츠의 상태는 그리 나아지질 않았어요. 프란츠를 더 돌봐준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하진 않겠지요. 돌이켜보면 프란츠를 키우며 엄마로서 더 성숙해질 수 있었어요.”
이번 전시작품 중에는 프란츠같이 장애를 겪는 아이들이 장애를 훌훌 털어버리길 바라는 소망을 담고 있는 작품도 있다. 슬픔은 작가가 마음에 품어 삭히고 작품은 점점 밝아지나 보다.  작가의 속이 얼마나 타들어갔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독일에서 유명 조각가로 성공한 이유

어린 시절 충북 제천에 살 때 직조공장을 운영하다 중풍을 맞은 아버지를 뒷바라지하며 버려진 문풍지로 인형을 만들기 시작했던 소녀가 현대 미술의 나라인 독일에서 유명 조각가로 우뚝 섰다. 그녀는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이 추구하던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독일 사람들은 동양에서 온 닥종이 작가의 작품에 열광했다. 변호사 치과의사 사업가 등 신흥부자들이 주로 그의 작품을 샀다. 빵을 팔아 어렵게 모은 돈으로 작품을 사는 제빵업자도 있었다. 김 작가는 독일 정부에 많은 세금도 냈고 독일 통일 한 해 전인 1989년 뮌헨 근교에 큰 주택도 구입했다. 작업실과 창고를 겸한 주택으로 개인 뮤지엄을 만들 수 있을 만큼 규모가 크다.
그는 독일에서 조각을 팔아 중산층 이상의 삶을 영위해왔다. 교수 평론가 갤러리 세 군데 인맥을 모두 갖춰야 성공할 수 있다는 독일 미술계에서 대단한 성취라 할 수 있다. 독일인들이 닥종이 인형작품을 앞다퉈 구입한 것은 왜일까? 작가가 동양에서 와서가 아니었다는 분석이다. 독일인들이 추구하는 무엇인가와 잘 맞아떨어졌다는 것이 맞는 말일지 모른다.
“단순히 동양적이라는 것만은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어요. 나만의 예술작품을 만들어야지요. 독일 사람들은 예술작품을 공산품 고르듯 깐깐하게 봐요. 독일인들은 수공예적인 것을 좋아하는 국민성이 있어요. 제 작품이 손이 많이 가고 작업량이 많잖아요. 각기 바라보는 시점에서 흠이 없어야 하니, 회화 10개 이상을 그리는 작업량이 들죠. 독일 사람들이 그런 점을 인정해준 것 같아요. 덕분에 저도 더욱 꼼꼼하게 작업하는 사람이 됐고요.” 
그런 김 작가에게도 어려움이 있었다. 아니 그가 이화여대 조소과를 다닐 때부터 그랬다. 당시는 국내에 추상화의 붐이 한창일 때였는데 구상인 닥종이 인형에 매달려 있던 그는 절망적이었으며 간신히 미대를 졸업했다.
“당시 서양에서 유입된 추상미술을 하려면 모방이 불가피했는데 저는 모방을 성격상 못하겠더라고요. 추상미술은 서양사람들의 철학에 바탕 한 것으로 종교도 다르고 음식도 다른 우리와는 안 맞는다고 치부했죠. 저는 제가 좋아하지 않는 것은 결코 하지 않는 성미죠. 독일에서는 핸드폰도 없이 살았어요.”
그는 미술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철학은 미술과 떨어져 있어야 하고 관람객이 스스로 철학을 찾아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전시회에는 그의 고정 팬들이 많다. 그의 작품은 이해하기 쉽고 작가와 나눌 얘기도 적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전시회에 찾아올 관람객들을 위해 그는 한시도 전시장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조국에 온 이상 그것이 의무라고 했다. 심지어 추석 연휴기간에 찾아올 관람객들을 위해 제천의 친정에 가는 것도 포기했을 정도다.
그가 가장 완벽한 예술로 평가하는 것은 석굴암의 불상이다. 아주 오래 전 석굴암 불상을 보고는 그동안 배운 것들을 모두 무화시킬 만큼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불상의 마찰 없는 곡선, 부처님이 남성인지 여성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원형적 형태에서 고요감과 심오함, 그리고 호수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그의 인형 작품들이 둥그런 형태를 띠는 이유가 됐다. 그리고 그런 둥그런 형태는 사람들에게 친근함을 자아낸다.
그의 미술계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재능을 보였던 자신의 아이들이 미술 하는 것을 적극 말렸다. 미술계에서 성공하는 것은 복권 당첨한 거나 마찬가지라는 이유에서다. 그 만큼 성공을 예측하거나 자신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처음에 제 작품이 생소해서 어렵게 화랑을 뚫을 수 있었어요. 당시 제게 도움을 주신 분이 있었지요.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화랑 관계자들과 좋은 인맥이 이어졌는데 우연이었다고 봐요. 그런 행운이 누구에게나 온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리고 1980년대 미술 컬렉션 붐이 다시 재연된다는 보장이 없죠. 예전에 저보다 실력이 좋은 미술인은 많았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전 운이 매우 좋은 사람이에요.”
그는 지나친 겸손함을 보여줬다. 그리고 한 가지 소망도 조심스레 내비쳤다. 그것은 그의 고향과 같은 제천에 그의 개인 뮤지엄을 열고 싶다는 것. 고국의 팬들에게도 그의 대형작품들을 보여주고 싶다는 바람이다.

그는 조선일보미술관에 이어 부산의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고 10월 하순 독일로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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