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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 작가’ 정경연 교수, 면장갑으로 드러낸 인간 삶의 다양한 모습
‘장갑 작가’ 정경연 교수, 면장갑으로 드러낸 인간 삶의 다양한 모습
  • 백준상 기자
  • 승인 2016.12.06 04: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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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보고 접하는 면장갑에 작품 인생 40여 년을 건 작가가 있다. 오랜 기간 여러 기법과 매재, 장르를 넘나들며 면장갑을 이용해 인간 삶의 다양한 모습을 호소력 짙게 표현해온 ‘장갑 작가’ 정경연 홍익대 교수를 만나 작품과 인생에 얽힌 얘기를 들었다.

취재 백준상 기자 사진 양우영 기자

‘장갑 작가’로 잘 알려진 정경연 교수(홍익대)의 개인전이 11월 29일까지 서울 삼청동 현대화랑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 40여 년간 장갑을 소재로 세상을 탐구하며 섬유 회화 조각 판화 비디오설치 등 다양한 매체와 장르를 넘나드는 작업을 해온 작가의 50여 작품을 선보였다.
정경연 교수는 지난 2008년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한데 이어 2014년 ‘올해의 최우수예술가상’ , 지난해에는 ‘디자인코리아2015’ 산업통상부장관상과 앙드레말로 국제친선협회가 주는 ‘AIAM 그랑프리’를 받은 미술계 중진작가이다. 디자인적 개념에서 주로 해석됐던 섬유미술을 조형미술의 영역으로 확장시킨 점을 인정받아 1988년 미술기자상, 1989년 제1회 석주미술상 등도 받았다.
1974년 홍익대 미술대학을 다니다 도미해 1978년 메사추세츠 컬리지 오브 아트에서 학사, 1979년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9년 귀국하여 1980년 26세의 나이로 홍익대교수로 임명되어 최연소교수로 화제가 되었으며, 지금까지 홍익대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홍익섬유학회 회장도 겸하고 있다.
이번 현대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는 비디오설치 작품도 있지만 평면작품 위주로 주로 출품됐다. 화려한 색채로 그린 신작들과, 기존에 염색된 장갑을 붙인 작업과 반대로 장갑을 그린 뒤 그 위에 염색한 실을 잘라 붙인 ‘어울림’ 시리즈, 그리고 이전보다 철학적 경향을 보여주는 ‘블랙홀’시리즈도 모두 감상할 수 있었다.
“‘어울림’시리즈는 사회적 불안과 어려움 속에서도 세대 간, 종교 간 화합할 수 있고, 사랑 이해 봉사가 널리 퍼지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어요. ‘블랙홀’ 시리즈는 주로 흑과 백을 사용하여 숨어 있는 안식과도 같은 공간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래의 세계에 뭔가 빨려드는 느낌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무제’시리즈는 제목이 없다기보다는 친구 이야기 등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득 담고 있는데, 각각 축소나 확장을 통해 관람객과 무언의 소통을 시도하고 있지요.”

어머니가 보내준 면장갑이 작품의 모티브

▲ 어울림2016-04, 162.2x130.3cm  사진=작가 제공

40여 년 이상 꾸준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지만 정경연 교수의 작품 소재는 여전히 면장갑이다. 주변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작가가 면장갑에 이제 질릴 만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면장갑을 소재로 한 그의 작품은 다양한 기법, 매체, 장르를 넘어서며 한층 발전, 진화하여 왔다. 장갑에 자신의 생각을 40여 년 동안 꾸준히 단순한 소재주의를 넘어서 정신까지 담아낸 일관된 작품세계를 선보이는 대단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작품 소재로 사용하는 면장갑은 일반 시중에 판매하는 면장갑과는 다르다. 사이즈와 모양을 지정해 특별 주문(일부는 손가락이 길게 늘어지거나 장갑이 비정상적으로 컸다)하여 제작한 면장갑으로 지금까지 모두 4군데에서 주문 공급받았지만 한 곳은 주인이 고령으로 타계하고 두 곳은 도산해 지금은 단 한 곳으로부터 면장갑을 공급받고 있다.
그의 작업 기법은 시리즈에 따라 다르지만 한 개의 면장갑을 4개 혹은 5개로 영역을 분할하여 각각 염색하거나 일일이 물감으로 채색을 한 후, 말리고 찌고 다림질하고 캔버스에 붙이고 고정시키는 작업을 반복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는 염색을 마친 면장갑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모든 올을 풀고 다시 캔버스에 붙이는 작업을 반복하기도 한다.
그 작업은 많은 노동을 요하는 힘든 일이다. 게다가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고 때로는 UV코팅, 바니시 작업 등을 위해 화공약품도 사용해야 하는 위험한(?) 작업이기도 하다. 오랜 작업으로 그는 성대결절수술을 두 번이나 받아야 했고 관절도 안 좋은 편이다. 이를 지속하는 것은 작업을 수행(修行), 미술가의 길을 구도자의 길로 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면장갑이어야 했던 것일까? 양말이나 고무장갑이 아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작품에서의 면장갑 사용은 미국 유학시절이던 1976년 어머니가 보내주신 면장갑이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74년 남편인 한택수 씨(고급 공무원 출신으로 현재는 경제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와 함께 미국 보스턴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장갑이 의미하는 것은 기능적으로는 손을 보호하듯, 그 이면에는 일을 마친 사람들의 아픔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품 속에 그 마음의 표정을 현대적인 조형미로 풀어내어 손과 장갑에 얽힌 휴머니티를 담고자 하였습니다. 손을 보호해 주는 장갑을 통해 인체에 대한 내성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고, 우리 중생살이의 모습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장갑은 손을 보호하는 기물이지만 손의 연장으로서 손과 밀착되어 신체적이며 손의 풍부한 표정을 대신한다. 손은 마음의 표정을 담고 있으며 , 손을 감싸고 있는 면장갑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땀과 삶의 애환이 녹아 있다. 게다가 손은 소통의 도구로서 나와 타자와의 관계를 표현하는데 매우 적절한 수단이 아닌가. 
면장갑을 끼면 대통령의 손이나 교황의 손, 그리고 노숙자의 손이 차이나지 않는다. 작가에게 면장갑은 모성을 표현하는 동시에 서민적이고 평등의식이 담긴 물건이기도 했다. 외할아버지가 한국노총 설립에 기여한 인물이었지만 그는 섬유의 씨실과 날실이 가장 기본적인 패턴을 이루고 있는 면장갑을 통해 비로소 서민과 노동자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면장갑은 집적되고 증식되고 변용되는 인격체의 형태를 띠고 다양한 변신으로써 현대 물질사회와 산업사회의 삶의 표정을 드러내고 있다. 면장갑은 곧 손이며 그 손은 인간 삶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평면과 입체, 흑백과 컬러,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대중 구원 염원 화합 평화 소통 희망 관조 등 다양한 메시지를 표출했다.
“제 작품의 ‘무제’는 제목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무한한 제목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장갑시리즈 중 한 작품을 보고 만남이라는 기쁨을 생각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은 헤어진 연인과의 작별을 떠올리기도 하는 등 대중들이 자신이 느끼는 대로 직접 제목을 붙이면서 작품을 즐기기 바랐습니다. 명제에 사로잡히지 않고 대중들이 느끼는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직접적이면서도 추상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면장갑은 일종의 ‘수집 오브제’로 볼 수 있는데 일상사와 작품의 간극을 없애려 했던 앤디 워홀과 올덴버그 등의 작업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비쳐진다는 분석이다. 미국 동부에서 유학했던 그가 당시 뉴욕에서 펼쳐진 첨단 현대미술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로서는 큰 행운인 셈이다.
다른 현대미술 작품과 달리 그의 작업 매재가 섬유였다는 점은 신선했다. 면장갑은 작가에게는 캔버스이자 소재로서 조형미와 예술미를 표현해내는 근간이었다. 섬유예술이란 울타리를 벗어나 섬유예술의 현대조형으로서의 가능성을 넓힌 사건이기도 했다.
1981년 귀국 후 열린 정 교수의 개인전은 미술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섬유라는 매재로 순수 조형성을 추구하면서 전통과 관습에서 벗어난 미적 표현은 화단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충격이었던 것이다. 재료의 다양한 실험과 추상성이 강조된 그의 작품은 ‘부드러운 조각’으로서 장르 파괴이자 현대미술의 새로운 양식으로 주목되었다.

면장갑 작품의 진화, 삶에서 초월로

정 교수는 근래 들어서 같은 면장갑을 소재로 생의 근원이나 실존의 고뇌 등 보다 심오한 세계를 표현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대표적인 것이 ‘블랙홀’ 시리즈로 사색과 명상, 관조가 강조되며 정신세계를 지향하는 모습을 확연히 보여준다.
불교신자로서 불교여성개발원 원장을 역임했던 정 교수는 자신의 작품에 불교의 영향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한국과 동양 문화의 기반 불교를 오히려 자신만의 정체성을 뚜렷이 하는 계기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반야심경’의 ‘色卽是空 空卽是色’(색즉시공 공즉시색, ‘물질적 현상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며, 대개 실체가 없다는 것은 물질적 현상인 것이다’로 해석)의 개념이 함축된 작품을 위해 애쓴다고 했다.
“내가 추구하는 점, 선, 면은 인간의 삶이나 더 나아가 우주만물의 원리를 하나의 점으로 보고 시작하여 그것이 모여서 선이 되고, 선들이 모여서 면이나 형체를 이루어, 결국에는 또 다시 또 하나의 점으로 되돌아가는 삼라만상의 이치와 같이 저에게 있어 특히 점은 하나의 시작으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정경연 작가노트’ 중 발췌)
작가의 조형 단위이기도 한, 점 선 면은 한편으로 인생살이의 원리와 조응되고 있다. 모든 인생살이가 점에서 시작, 그 점들이 모여 선을 이루고, 그 선들이 모여 면을, 면들이 모여 어떤 형체를 이룬다는 그의 생각은 이제 인간의 희로애락 표현을 넘어 생사의 법칙, 우주 생성의 법칙까지 알고자 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이제 면장갑은 다른 것을 가리키는 수단에서 스스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나아갔으며, 물질성을 초월하여 정신성의 영역에 몸체를 디밀었다. 이같이 인생과 우주의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에 천착하는 작가는 그가 말했듯 어려운 수행, 구도자의 길에 들어선 것이나 진배없음을 보여준다.
“그동안 어떤 특정한 장르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그저 순수 시각적 조형요소로써 다양한 작업에 임해왔습니다. 어디에서 영향 받아 겉으로 드러낸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한 나만의 정체성이 구현된 작품을 이끌어내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겠습니다. 점에서 시작되어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삶을 순간순간 진실 되게 살고 표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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