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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 김윤식 생가를 가다
영랑 김윤식 생가를 가다
  • 유화미
  • 승인 2016.12.16 15: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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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인 생가 탐방 29
 

흐드러지게 핀 모란꽃을 보며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리던 시인 영랑 김윤식. 어두운 사회 분위기를 작품에 담아내던 당대 문인들과는 달리 순수 서정시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갔던 그의 생가에는 매년 5월이면 모란꽃이 가득 피어나 기다리던 봄이 왔음을 알린다.

글 유화미 기자│사진 강진군청 제공


모란꽃이 만개하는 영랑 생가

전라남도 강진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그곳 사람들의 시인 영랑 김윤식에 대한 사랑을 흠뻑 느낄 수 있다. 장흥에서 강진으로 들어오는 영랑 사거리에는 김윤식의 동상이 방문객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으며, 영랑 생가를 찾아가는 길 곳곳에도 ‘영랑슈퍼’ 등 그의 이름을 따와 가게 이름을 지은 간판들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강진 사람들의 영랑 김윤식에 대한 애정을 느끼며 생가를 찾아가면 소담스러운 초가집을 만날 수 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가을을 한껏 드리운 영랑 생가는 초가집으로 복원된 본채와 사랑채 두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랑 김윤식이 1903년에 태어나 1948년까지 45년이란 긴 시간 동안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곳이다. 1948년 서울로 이주하고 난 후 여러 번 소유주가 바뀌기도 하고, 70년대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시멘트 기와를 얹으면서 한때는 김윤식이 살았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형태가 많이 바뀌기도 했다. 그러나 1985년 강진군청이 그 집을 다시 사들여 복원 작업을 실시하면서 영랑 김윤식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듯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된 초가집이며, 본채에서 몇 발걸음만 옮기면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랑채가 나온다. 집 뒤편에는 장독대를 두어 마치 아직 사람이 이곳에 사는 듯 실감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으며, 집 뒤로 가득한 동백나무와 대나무는 김윤식이 그랬듯 감성에 젖게 한다. 매년 5월이 되면 집 주변과 마당에 모란꽃이 가득 피어나 찬란한 봄이 왔음을 알린다. 영랑 생가는 1986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되었으며, 2007년에는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252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영랑 생가 바로 옆에 위치한 시문학파기념관에서는 1930년대를 대표하는 영랑 김윤식, 용아 박용철, 정지용, 위당 정인보, 연포 이하윤, 수주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허보 등의 문인들의 문학 세계를 감상할 수 있다. 

문학적 동지를 만나다

영랑 김윤식은 1903년에 1월 16일, 전라남도 강진의 지주 집안에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윤식이나, 작품을 발표하면서 아호인 영랑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강진보통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17년 서울의 휘문의숙, 현재의 휘문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김윤식은 그의 문학적 재능을 발견해 주고 함께 키워 간 문학적 동지가 많았다. 특히 이 휘문의숙에 입학하면서 그런 동지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선배로는 홍사용, 안석주, 박종화 등이 있으며 후배로는 정지용, 이태준 등이 있었다. 이들과 교류하며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들로부터 문학적 안목을 키우는 데 직·간접적인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김윤식이 3학년이 되던 해에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김윤식은 구두 속에 선언문을 숨긴 채 고향인 강진으로 내려가 강진 장날에 만세운동을 일으키려다 발각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0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한다. 이 무렵 평생 우정을 나누게 되는 문학적 동지 박용철을 만나게 된다. 박용철은 김윤식에게 문학적 재능이 있다는 것을 일찍이 깨닫고 그에게 시를 써 볼 것을 권유한다. 실제로 박용철은 김윤식의 시를 모두 외우고 있을 정도로 그의 시를 아끼고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자신도 시인이면서 박용철은 자신의 시집은 발간하지 않고 김윤식의 시를 엮어 <영랑시집>을 펴내기도 했다.
영랑 김윤식을 순수한 서정시로만 접해 본 사람이라면 그의 생애를 알고 난 후 조금 낯설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의 생애는 순수 서정시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였다. 광복 후 대한청년회 단장을 맡아 사회 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1948년에는 제헌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또한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내기도 하는 등 사회참여에 적극적인 의욕을 갖고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처 피난길에 오르지 못하고 서울에 은거하고 있다가 9·28 수복 때 길에서 포탄 파편에 맞아 숨을 거두게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순수 서정시의 절정을 이루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로 시작되는 그의 시를 한 번쯤 접해 보았을 것이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눈앞에 자연이 그려지는 듯, 자연 속에 와 있는 느낌을 느낀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만큼 영랑 김윤식은 순수 서정시의 절정을 보이고 있다. 관념과 이데올로기로 가득했던 당대 문학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노선을 택해 또 다른 형태로 한국시의 역사를 써 내려갔다.
그러나 영랑 김윤식은 일제강점기에 생애 대부분을 보냈다. 자연을 노래하고 있지만, 그의 시가 마냥 행복하고 밝은 것은 아니다. 그의 시에는 막연한 슬픔이나 한을 담은 비애 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밝음보다는 주로 어둠을 이야기하고 있다. ‘설움’, ‘슬픔’ 등의 용어가 수없이 반복된다. 그러나 주저앉아 슬픈 눈물만을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밝아 올 찬란한 봄을 기다리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일제 식민지라는 어두운 세계에서 간접적으로나마 그 억압성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대의 다른 문인들과는 달리 순수 서정시를 택한 것이 부당함을 알려야 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영랑 김윤식 또한 자신에 대한 그런 평가를 잘 알고 있었고, 후기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무단한 애를 쓴 것으로 보인다.
광복 이후에 발표한 작품을 보면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바다로 가자>, <발짓>, <오월 한> 등의 시에서는 순수문학 분위기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사회참여의 의욕을 보여주고 있다. 영랑 김윤식이 남기고 간 작품들은 아직도 우리 가슴에 남아 기억되고 있다.

*관람 정보
영랑 생가
주소 전남 강진군 강진읍 영랑생가길 15
문의번호 061-430-3185 

강진 시문학파기념관
주소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영랑생가길 14  
문의번호 061-430-3186~7
관람시간 09:00 ~ 18:00
입장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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