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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전략적 거점, 난공불락의 남한산성
중요한 전략적 거점, 난공불락의 남한산성
  • 유화미
  • 승인 2016.12.27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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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게문화유산
 

남한산성하면 흔히 인조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던 ‘삼전도의 굴욕’이 떠오르기 쉽다. 그러나 인조가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스스로 성문을 열고 삼전도로 가 항복하였던 것이지 남한산성은 한 번도 외세에 침략에 의하여 정복당한 적이 없는 성이다.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나라와 백성을 보호해온 남한산성을 들여다보았다.

진행 유화미 기자│사진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천혜의 요새, 남한산성의 탄생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47일간의 항전을 담은 김훈 작가의 <남한산성>이 영화 제작을 확정짓고 김윤석, 이병헌, 박해일, 고수, 박희순 등 굵직굵직한 배우들이 출연을 결정지으며  또 한 번 주목받고 있다. 소설과 영화, 뮤지컬로 재탄생되며 끊임없이 우리들을 과거의 세계로 이끌고 있는 남한산성에는 어떤 힘이 있는 것일까.
<조선왕조실록>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자료를 보면 남한산성이 백제의 고성임을 밝히고 있지만 <중정남한지>의 저자인 홍경모는 ‘백제의 고도는 남한산에 있으며 남한산성은 온조가 쌓은 것이라고 하는데 백제사는 기록이 소략하여 문헌에 근거할 것이 없어 온조왕의 옛성임을 어떻게 알겠는가?’라고 적어 의문을 두고 있다.
따라서 남한산성은 통일신라 시대에 문무왕이 토성했다고 보는 견해에 무게가 쏠리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국사기>에 673년(문무왕 13년)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성의 둘레가 4,360보였다는 기록을 들 수 있다. 이 주장성이 바로 남한산성이다. 문무왕이 주장성을 축조한 이유는 당나라의 한반도에 대한 야욕 때문이었다.
신라와 당나라가 나당 연합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자 당나라는 처음의 약속과는 달리 신라까지 위협하며 한반도 지배 야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고, 이에 신라는 당나라와의 전쟁을 수행하며 한강유역을 방어하기 위해 주장성을 축조하게 되었다. 주장성은 신라가 쌓은 성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성 안에서 무기고 등 중요한 건물 터가 여럿 확인되면서 그 규모와 크기를 가늠케 했다.

온조의 힘을 빌어 병자호란을 이겨내고자 한 인조

남한산성이 외세의 침략을 막아낼 중요한 거점으로 끊임없이 논의되어 왔다. 조선시대의 역대 임금들은 여러 번 남한산성을 수축하려 했는데,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을 가게 되자 남한산성의 수축의 필요성이 더욱 대두되어 인조 2년부터 4년까지 약 2년에 걸쳐 대대적인 수축이 이루어졌다.
친명배금의 정책을 이어가던 인조의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태종이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10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온 것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남한산성 축조 후 10년 뒤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47일간의 항전을 이어가게 된다.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조의 간절한 염원이 백제의 시조 온조에게까지 가 닿았던 것일까. 전쟁의 고통 속에 있던 인조의 꿈에 온조가 나타나 청나라의 기습을 알려주었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다. 온조가 남한산성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게 되는 때가 바로 이 때문이다. 병자호란 직후인 1939년 직산에 위치해있던 온조 사당을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옮기도록 명한 정조는 1795년 이 사당을 숭렬전이라 칭하고 온조에 대한 제문을 직접 작성하기도 하였다.
남한산성은 한국의 산성 설계와 건설에 대한 역사를 살펴볼 수 있고 요새화 된 도시를 보여주는 중요한 가치를 인정받아 1963년 국가사적 제 57호로 지정되었으며 1971년에는 남한산성 도립공원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201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며 그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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