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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귀숙 대관령박물관장의 특별한 나눔 인생
홍귀숙 대관령박물관장의 특별한 나눔 인생
  • 송혜란
  • 승인 2017.01.11 10: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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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350억원 박물관을 강릉시에 ‘기증’
 

매서운 강추위가 몰아칠 것 같았던 초겨울의 강릉은 이상하리만큼 온화했다. 특히 대관령박물관은 바람도 잠시 쉬었다 가는 곳으로 유명한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박물관은 우렁찬 시냇물 소리로 우리 내 발길을 사로잡았다. 일생을 고미술품 수집과 연구에 힘쓴 홍귀숙 관장. 나눔을 통해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홍관장은 꽤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앞으로 남은 인생도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훈련하듯 살고 싶다는 홍관장을 이재만 변호사가 만나 특별한 나눔 인생에 관해 들었다.

취재 송혜란 기자 사진 양우영 기자 
 
P1 산중에 작고 아름다운 박물관

대관령박물관

수많은 옛 전설과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대관령박물관은 산중에 작고 아름답게 자리해 있었다. 홍귀숙 관장이 세운 박물관에는 선사, 역사, 민속유물 10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실제 흐르는 물을 이용해 움직이는 물레방아부터 각종 석조미술품까지 변함없이 조용한 어조로 우리 옛 문화를 말해준다. 이 많은 유물에는 각각 어떤 사연이 숨겨 있을까?

이재만_1993년에 설립된 대관령박물관이 천혜의 자연과 어울리며 여전히 그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네요. 처음 이곳에 박물관을 만들게 된 계기에 대해 궁금해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홍귀숙_원래는 조그마한 세컨드 하우스를 짓고 싶어서 적당한 곳을 물색하고 다니다 이곳을 발견했어요. 곳곳에 소나무가 자리해 있고, 시냇물이 흐르는, 딱 제가 어릴 적 꿈꿨던 곳이었지요. 바로 땅을 사서 30평짜리 건물을 지으려고 봤더니 제가 그간 모은 수집품이 너무 많은 겁니다. 이것을 다 보관하려면 건물이 더 커야겠다 싶었어요. 그러다 박물관의 모양까지 갖추게 됐습니다. 엄청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제 인생에 점 하나를 남겼다는 데 큰 보람을 느낍니다.

이재만_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이 약 1000점에 이른다고요. 이 많은 유물을 언제부터, 어떻게 수집하셨는지요?
홍귀숙_한번은 청계천에 갔더니 처마 밑에 토기가 비를 맞고 있는데 너무 가여운 거예요. 우리 선조의 것이, 이 귀한 것이 왜 이렇게 버려져 비를…. 그때부터 토기를 모으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하나의 토기에 어울리는 다른 유물, 고미술품 등을 계속 사 모으다 보니 큰 컬렉션이 완성됐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저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금씩 차츰차츰 수집했던 것 같아요.

이재만_주로 어떤 종류의 수집품이었는지요?
홍귀숙_왜 우리 조상의 것이 비를 맞을까? 그게 최초 출발이었던 것만큼 토기부터 도자기, 민화, 민속품들을 주로 모았어요. 옛 사대부들의 물건은 밖으로 나올 수 없었기에 서민들이 쓰던 민속품이 대다수를 차지했지요. 저 역시 서민 문화에 관심이 지대했기 때문에 민속품에 조금씩 눈을 뜨면서 훗날에는 아예 민속학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이재만_이렇게 귀한 민속품들을 수집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을 것 같습니다.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는지요?
홍귀숙_제가 수집광이 아니었던지라 당시 가짜도 많이 샀어요. 터무니없는 가격을 지불하기도 했지요. 그러한 점이 좀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민속품을 자주 사다 보니 안목이 생기더군요. 특히 가마 술 같은 것은 거의 보물급인데요. 저도 처음부터 좋은 것을 샀던 것은 아니에요.

이재만_어렵게 수집한 만큼 가장 보람 있다고 생각되는 민속품이 있다면요?
홍귀숙_조선 시대 조대비가 외출할 때 가마에 둘렀던 가마 술이라는 게 있어요. 가마 술의 노리개가 뿔뿔이 흩어져 낱개로 팔려나가는 바람에 노리개를 완벽히 갖춘 가마 술은 보기 드문데요. 대관령박물관에 노리개 51개가 모두 붙어 있는 가마 술이 전시돼 있습니다. 강남 현대아파트에 살다가 부도가 난 한 여자가 급매물로 팔기 위해 제게 가져왔었어요. 보자기에 싸서 줬는데 꼭 집에 가서 풀어보라는 겁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의심 없이 그대로 집에 와서 풀어봤는데 너무나 좋은 가마 술이었어요. 그게 가장 큰 보람이에요.

이재만_박물관 안을 둘러보니 석불과 미륵불도 있던데요. 전시된 유물 중 가장 아끼는 것은 무엇인지요?
홍귀숙_이 말이 옳은지 틀리는지 모르겠으나, 저에게는 남이 하찮게 보는 것도 소중합니다. 그래서 다 애정이 가요. 호가 1억원인 유물보다 서민들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담긴 토기가 더 존경스럽습니다.

이재만_박물관 내에 있는 유물 외 건물 자체도 이색적입니다. 직각 모양보다는 사선 모양으로 지어진 건축미가 유독 눈에 띄는데요. 대관령박물관 건물이 건축 대상에서 우수상을 받기도 했지요?
홍귀숙_건물을 지을 때 고심을 많이 했어요. 늘 스쳐 가는 영감이 정확했던지라 제 발길 닿는 곳마다 노트를 두어 기록했던 것을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우선 땅을 깎아 백두대간 능선이 건물에 의해 가려지지 않게 했어요. 저는 불교도 아니고 크리스찬이지만, 제가 어떻게 백두대간을 지배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컸지요. 건물 설계는 건축가가 했지만, 디자인은 제가 직접 했어요. 건물을 보면 정사각형이 기울어있는데, 땅을 많이 깎은 대신 건물이 솟구쳐 올라간다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P2 자유로운 예술가의 삶

홍귀숙 관장은 음악가이자 서양화가, 시나리오 작가다. 그럼에도 평생 명함 한 장 가진 적 없다는 그녀는 쓸데없는 것에 얽매이는 일을 특히 경계했다.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인생을 즐겨라! 그녀의 인생관이다. 80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새로운 악기를 배우는 일에 열정을 쏟고 있다는 그녀에게서 자유로운 예술가의 혼이 물씬 느껴졌다.

이재만_대관령박물관장이 되기 전 젊은 시절은 어떻게 보내셨는지 궁금합니다. 대학에서는 음악을 전공하셨다고요?
홍귀숙_네 음악도 하고, 그림도 배웠어요. 서양화를 배웠는데, 지금은 고인이 되신 000 선생님 제자로서 10년간 사사를 받았습니다. 1972년에는 미국으로 가서 00 미술대학에 등록했어요. 그때는 미국에서 6개월 비자밖에 주지 않았는데요. 6개월에 한 번씩 미국과 한국을 오가야 했지요. 그곳에 사는 언니와 형부가 성실하게 세금을 낸 덕에 대학에서 자격증을 발급해 줬어요. 물론 저는 그런데 얽매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개인전과 그룹전도 많이 했지만, 항상 프로페셔널해지는 것을 경계했어요. 자유롭게 살고 싶은데, 무언가 억눌리기 시작하면 큰일이니까요. 음악이든 그림이든, 민속품이든 그저 즐기기만 했습니다.

이재만_해외여행도 많이 다니면서 한번은 집시들의 삶이 궁금해 직접 노숙을 체험해 보기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홍귀숙_제 인생의 목표는 감사하게 살다가, 감사하게 떠나는 거였어요. 저는 명함도 없습니다. 평범함 속에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싶었거든요. 자연을 너무나 사랑하기도 했고요. 한번 외국을 나가면 6개월을 내리 있었는데, 집시들은 왜 노숙을 할까 궁금증에 실제 길바닥에서 잠도 자봤어요. 길 위에 누워 하늘을 우러러보는데, 칸막이 없는 이 땅이 다 내 것이고 저기 보이는 하늘, 별이 다 제 것만 같더라고요. 가진 돈은 없지만, 마음만큼은 부자였지요. 아, 집시의 삶은 이래서 행복하구나 싶었습니다.

이재만_관장님의 인생관이 참 멋지십니다. 요즘은 드럼도 배우신다고요?
홍귀숙_저는 원래 클래식 광이었어요. 어느 순간부터 4분의 2박자가 좋아지더니 최근에는 랩이 그렇게 재밌더라고요. 언젠가 드럼도 배우고 싶어서 한 3년간 개인 레슨을 받았어요. 다들 이 연세에 새로운 도전을 한다며 놀라곤 하는데요. 제 나이 100세가 넘어도 도전은 계속될 겁니다. 도전에는 연령제한이 없으니까요. 지금도 하고 싶은 게 무궁무진해요.

이재만_화가로 활동하시며 그룹전도 몇 번 하셨고, 피아노, 드럼까지…. 또, 시나리오도 쓰신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
홍귀숙_아직 발표는 안 했고, 가지고만 있어요. 강릉에 뚝 떨어지고 보니 제가 그동안 몰랐던 화전민의 삶이 깃들어 있더라고요. 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다가 이것은 완전히 작품인 듯했습니다. 오래 전에 썼는데, 할머니의 이야기에 다른 것을 보태거나 꾸미지 않고 슬픈 것, 기쁜 것 다 그대로 썼어요. 화전민이 눈이 오면 굴렀다고 해서 대군령, 대관령이라는 지역명이 생겼더군요. 뭐 그런 이야기들을 좀 썼습니다. 살아생전 발표할 생각은 없어요. 제가 죽고 나면 공개되겠지요.

P3 홍귀숙 관장의 남다른 기부 문화

일생을 다 바쳐 일군 대관령박물관을 강릉시에 기증한 홍귀숙 관장. 대관령박물관은 건물과 땅, 유물들까지 다 합쳐 시가 350억원으로 평가되는데…. 이 어마어마한 재산을 자손에게 물려주지 않고 시에 기증한 그녀의 뜻은 꽤 남다르다. 앞으로 남은 인생도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훈련하듯 살고 싶다는 그녀는 죽어서도 ‘아, 그 여자. 진짜 아름답게 갔어’라고 기억되길 소원했다.

이재만_대관령박물관을 10년 전 강릉시에 기증하셨지요? 당시 신문기사를 보니 건물과 땅, 유물들까지 다 합쳐 시가가 350억원이었던 것으로 압니다. 어마어마한 재산을 자손에게 물려주지 않고, 시에 기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홍귀숙_강릉시에서 가격을 논한 것은 아니고요. 10년 전에 누군가가 와서는 어떤 사람이 살 것인지 묻지 않는 조건으로 150억원을 불렀어요. 싫다고 했더니 일주일 후에 다시 와서는 350억원을 주겠대요. “그럼 나 빨리 죽어요” 더 생각할 틈 없이 바로 거절했습니다. 저는 동전 10원을 떨어뜨려도 죄송해하는 사람이에요. 그런 제가 350억원을 갖게 되면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왜 강릉시에 기증했느냐…. 원래는 국립박물관에 기증하려고 했는데 국회만 통과하는데 1년이 걸린대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는 없고, 또 제가 강릉에 터를 잡았으니 이곳에 주는 게 맞겠다 싶었어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조카만 있는데, 걔한테 물려주면 자유롭게 팔거나 박물관을 아예 없앨 수도 있잖아요. 공무원 사이에서는 내 것도 네 것도 아니니까 영원히 보존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강릉시에 기증한 거예요. 개인에게 주면 제가 득을 보더라도 절대 안 될 일이었지요.

이재만_박물관 옆에 있는 사택까지 기증하셨다고요? 보통 박물관을 기증하면 기증한 분에 대해 간판을 크게 걸곤 하던데요.
홍귀숙_제가 한사코 반대했어요. 구태여 전쟁터에 나가서 승리한 승자도 아니고, 단지 제가 좋아서 했을 뿐이니까요. 제가 박물관을 세우며 하나하나 꾸밀 때 행복했으면 그걸로 충분해요. 사택이야, 제가 죽고 나면 폐가가 될 텐데 그럴 바엔 박물관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관리실로 쓰는 게 좋겠다 싶었지요. 고민할 것 없이 사택까지 다 기부했습니다.

이재만_일생을 다 바쳐 일군 박물관을 기증하고 나니 허전하진 않으세요?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홍귀숙_제 나이가 며칠 있으면 82세에요.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때이지요. 법정스님이 무소유를 말씀하셨는데, 이게 결코 쉬운 게 아니더라고요. 저는 죽고 나서도 ‘아, 그 여자. 진짜 아름답게 갔어’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게 간절한 소원이에요. 마무리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마음속으로 계속 훈련하고 있어요.

이재만_그 훈련을 어떻게 하고 계시나요?
홍귀숙_우선은 나눔이지요. 제가 가진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눠줄 수 있는 마음을 키우고 싶어요. 요즘은 너무 정이 없는 것 같아요. 정이 있으면 금으로 된 잔이라도 누구든 줄 수 있습니다. 정이 없으니 남의 것만 가지고 오지요. 저는 마지막 순간까지 제 정을 쏟아낸 후 가고 싶어요.

이재만_일반인이 가까이 가기엔 참으로 훌륭한 인격을 지니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없으신지요?
홍귀숙_제가 재벌도 아니고,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이렇게 산 것은 아니에요. 가정주부든 누구든 자신이 지닌 것을 더 베풀었으면 해요. 조금은 손해 보며 사는 게 더 행복합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면 불행할 수밖에 없어요. 부족해야 사는 의미도 있지요. 그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도 하잖아요. 기본은 가지되, 나머지는 다들 나누며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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