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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원로 목사에게 듣는 ‘새해, 새 다짐’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원로 목사에게 듣는 ‘새해, 새 다짐’
  • 송혜란
  • 승인 2017.01.24 07: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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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특별 초대석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역사가 이루어지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면 기적이 이루어집니다.” 김장환 극동방송 이사장이 남긴 명언이다. 수원중앙침례교회 원로목사이기도 한 그는 가난한 소작농의 가정에서 태어나 6·25 전쟁 중 미군 하우스보이로 생활했다. 그곳에서 만난 한 미군과의 소중한 인연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 김 이사장. 미국에서 또 한 번 한 친구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을 영접한 후 기적 같은 인생을 살았다. 1973년 여의도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를 통역한 그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도 인생사의 큰 변화를 맛보았는데…. 김장환 원로목사에게 삶의 진리와 사랑에 대해 들었다.

취재 송혜란 기자 | 사진 양우영 기자


P1 새 희망과 새 다짐으로 지금의 파고를 헤쳐 나가길

6.25 전쟁을 겪은 김장환 이사장은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보이로 생활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한 미군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한국 사람도 드물고 말도 잘 통하지 않은 곳에서 심한 향수병을 앓다 비로소 하나님을 만난 후 참한 미국인 아내도 얻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오랫동안 꿈꿨던 정치를 뒤로하고 목사가 된 지 어언 60년. 영화 같은 그의 인생 스토리는 뭇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재만_극동방송 이사장이자 수원중앙침례교회 원로목사로서 연말연시에 바쁘실 듯합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김장환_2016년은 극동방송이 창사 60주년을 맞은 해였습니다. 12월 19일 63빌딩에서 60주년 축하 리셉션이 있었어요. 그동안 극동방송을 위해 오랫동안 헌신해 주셨던 방송 가족과 각계 인사 1,000여 명을 초대해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올해는 제주극동방송이 FM 허가를 받아 개국하게 됩니다. 제주극동방송은 극동방송의 모체인 ‘아세아방송’으로, AM 주파수로 북한에 복음을 전했는데요. 이제 FM 방송을 허가받았으니 제주도민들도 깨끗한 음질로 방송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이재만_지난해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여러 분야에서 참으로 어려운 고비를 지나왔습니다. 사회 원로로서 소회가 어떠하신지요?

김장환_정치, 경제, 사회, 문화까지 어느 것 하나 힘들지 않은 분야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게 하신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국민들이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 가운데 넘치기를 기도하고, 지도자들 역시 겸손하게 자질을 높여야 할 것입니다.

이재만_올해는 대한민국과 국민들이 다시 일어서는 희망의 해, 열정의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덕담 한 말씀 해 주시지요.

김장환_작년 한 해는 전 세계적으로도 많은 일이 있었지만, 특히나 하반기에 터진 스캔들로 우리나라가 많이 혼란스럽고 많은 국민이 나라를 걱정했습니다. 우리나라를 둘러싼 안보 상황이나 경제 환경이 좋지만은 않지만, 새해가 밝은 만큼 새 희망과 새 다짐으로 그 파고를 헤쳐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민족은 저력이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모두 올 한 해 마음에 소원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풍성하게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이재만_목사님은 6·25 전쟁 중에 하우스보이로 일하시다가 어느 미국 군인의 도움으로 1950년대에 미국 유학까지 갈 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김장환_저는 1934년 경기도 화성군에서 가난한 소작농 가정 5남매 가운데 막내로 자랐습니다. 어려운 형편이라 늘 끼니가 걱정이었지요. 초등학교 4학년 때 광복되면서 살던 동네가 수원비행장에 편입돼 저희 가족은 수원의 ‘못골’로 이사하게 됐어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4후퇴 때 퇴각한 미군도 수원교도소에 잠시 머물게 됐습니다. 친구들과 담장 밖에서 구경하고 있는데, 한 미군이 저보고 안으로 들어와 난롯불을 피워 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재빨리 논두렁에 박아 놓은 말뚝을 뽑아 와 난롯불을 피우고 시키지도 않은 청소까지 해 놓으니 앞으로 계속 오라더군요. 그때부터 하우스보이가 됐어요. 하우스보이는 특별한 월급이 없어요. 대신 미군들이 주는 보급품을 장에 팔아 월급으로 마련했지요. 미군들이 야구 유니폼을 주기도 하고, 카우보이모자를 선물해 주기도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다른 막사에서 인사 업무를 담당하는 칼 파워스 상사가 미국에 가서 공부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따라가겠다고 했으나 미국에 데려가겠다고 약속하고는 말없이 귀국했던 미군이 여럿 있었기 때문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죠. 우리 국군이 북쪽으로 진격하게 되면서 경산에 있던 부대가 경기도 안성으로 이동하게 됐고, 1951년 5월 칼 파워스 상사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그린빌에 있는 밥 존스 고등학교 입학 허가서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전방으로 간 뒤 연락이 잘 되지 않았지만, 칼 파워스 상사는 저를 잊지 않고 있었던 거예요. 그렇게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 겁니다.

이재만_그때도 참 부지런하셨던 것 같습니다. 성실과 부지런함이 좌우명이신가요?

김장환_어릴 적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보이로 지내면서 귀중한 교훈을 얻었어요. 당시 우리나라는 가난한 데다 전쟁까지 덮쳐 사회 정의나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미군 부대에서는 물건을 아무 곳에나 놔두어도 남의 것을 훔치는 사람이 없었어요. 거기서 정직을 배웠습니다. 또 미군들은 전쟁 중에도 늘 명랑했어요. 여유가 있었지요. 그 광경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밝고 긍정적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로마서 12장 8절에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지금도 성실하게, 부지런하게, 즐거움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재만_미국으로 유학 가서 향수병에 걸리는 등 힘들어하다가 하나님을 영접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후에 인생 목표도 변했다고요.

김장환_제가 공부한 곳은 미국의 유명한 기독교계 사립 고등학교였어요.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 학생은 찾아볼 수 없었지요. 말도 안 통하고 고향에 있는 어머니 생각에 처음에는 적응하느라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학생이 전도하러 왔습니다. 그 학생이 저에게 제시한 성경 구절은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이었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 학생이 그러더군요. “예수님을 믿으면, 향수병에서 나을 수 있다”고요.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로 했습니다. 정말 거짓말처럼 고향 생각이 사라지더군요. 저는 처음 유학하면서 정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저와 제 가족이 배를 곯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요.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난 후 제 꿈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목사가 되기로 했습니다. 지금도 제가 목사가 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

이재만_평생 결혼도 안 하고 공부시켜 준 미국 군인 칼 파워스 상사도 목사님이 되고 나서 직접 전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한 사람의 사랑과 힘이 세지요?

김장환_칼 파워스 상사는 스물세 살이었던 1950년 여름에 주한 미군으로 한국에 왔어요. 폭격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부모와 생이별한 어린이들을 많이 목격했고, 단 한 명의 아이라도 이 전쟁에서 구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제대 명령이 떨어진 뒤에도 저를 미국에 데려가기 위해 여섯 차례나 근무를 연장하며 백방으로 뛰어다닌 그이지요. 당시 부산에 있었던 대한민국 정부를 찾아가 문교부 장관과 외무부 장관에게 탄원하고 진정서도 제출해 가까스로 비자를 받았다고 합니다. 미국으로 가는 뱃삯 408달러도 구해 줬어요. 이후 제가 미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칼 파워스 상사에게 복음을 전하고 침례를 집례했습니다. 제 퇴직금을 자원으로 2010년에 설립한 PK장학재단도 파워스의 P와 제 성 K를 합해서 만들었고, 국가와 사회, 나아가 세계에 공헌할 수 있는 인재 양성을 위해 학자금, 장학금 지원 사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오랜 기간의 목회 활동 중에 가장 보람된 일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칼 파워스 상사의 이름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P2 사랑의 힘, 낮은 곳에서 겸손하게 살기

인간은 문화와 지리, 인종, 사회를 초월해 큰 영향력을 미친다. 요한 1서 4장 11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김장환 이사장이 아내, 자녀, 더 나아가 수많은 이웃을 사랑하는 법에 대해 들어 보았다.

이재만_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우렁차게 웅변도 해 전국대회에서 수상도 하셨다고요?

김장환_미국 고등학교에 입학해 고향 생각으로 고생하다 웅변대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영어 발음이 되나요. 구슬을 물고 피나게 연습했지요. 전쟁 중인 나라의 가난한 하우스보이가 한 미군의 도움으로 미국에 건너와 눈물로 공부하면서 경험한 민주주의를 웅변했을 때, 장내를 가득 메웠던 사람들은 감동에 사로잡혀 기립 박수를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학내에서, 그 다음에는 시, 주 대회에서 1등을, 더 나아가 주 대표로 전국 50주에서 온 아이들과 대결해 제가 최종 우승을 했어요. 당시 대통령에게 대형 텔레비전을 상품으로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미국 신문에도 보도가 됐는데, 그야말로 학교에서 일약 스타가 되었지요. 
 
이재만_공부는 물론 운동도 잘해서 여학생들에게 참 인기가 많으셨을 듯합니다. 사모님과는 어떻게 결혼하게 되신 건지요?

김장환_제가 전국 웅변대회에서 일등도 했겠다, 또 축구팀 부장까지 하니까 여학생들이 굉장히 좋아했어요. 제 아내 트루디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저 또한 그녀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품행이 단정하고 명랑해서 재단 총장 아들이 데이트를 신청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럼에도 트루디는 영어는 서툴지만 귀엽고 싹싹하다며 제 고백을 받아 줬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미국 친구들과 달리, 저희는 내리 4년을 연애했습니다. 그러다 트루디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갔는데, 동양인 사위를 반대하실 게 뻔해 각오를 단단히 했지요. 장모될 분은 역시 국제결혼이라 마땅치 않게 생각하더라고요. 그러나 잔디를 깎고 계셨던 아버님께서는 제가 얼른 기계를 건네받아 말끔하게 잔디를 정리해 놓으니 저더러 장래가 유망하다며 흔쾌히 결혼을 승낙하셨습니다. 대학원을 마치고 1959년 12월 아내와 함께 귀국해 고향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지요. 아내는 미국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나 명문 대학을 졸업했는데요. 1960년대 초반 전쟁을 겪은 가난한 한국 농촌의 삶이 고달팠을 법도 한데 항상 웃는 얼굴로 순종하며 살았어요. 세 자녀도 사랑과 정성으로 키웠고, 항상 낮은 곳에서 겸손해합니다. 저를 욕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저희 아내를 욕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이재만_목사님은 2남 1녀 자녀도 훌륭하게 키우신 것으로 유명합니다. 자녀 양육에 대한 목사님만의 철학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장환_한번은 공중파 TV 아침 프로그램에 저희 아들 둘과 함께 삼부자가 출연한 적이 있어요. 진행자 첫 질문이 “세 분 중에 누가 가장 설교를 잘합니까?”였는데 아들 요셉이가 대답해요. “제가 제일 잘합니다.” 그랬더니 바로 이어 작은 아들 요한이가 “형은 아버지한테 매를 덜 맞아서 이래요”라고 대답해서 폭소가 터졌어요. 저는 아이들을 훈계하는 데 있어 매우 단호합니다. 요즘 부모들 가운데 매를 아끼는 분이 많은데 성경에도 분명하게 나와 있어요.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평소 사랑을 많이 베풀되, 혼을 낼 때는 엄격해야 합니다.

이재만_1934년생이시면 우리 나이로 84세이신데 무척 건강하십니다. 건강 유지의 비법은 무엇인지요?

김장환_특별한 방법은 없습니다. 대추와 홍삼을 푹 다려 냉장고에 넣어 두고 매일 아침 공복 상태에서 한 컵씩 먹는 정도입니다. 많이 걷고 계단을 자주 오르내리는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이랄까요.

이재만_극동방송은 방송으로 복음도 전하지만 특히 어려운 이웃과 소외된 분들에게 사랑을 나누는 일도 열심히 한다고 들었습니다.

김장환_극동방송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사역을 하고 있어요. 예수님의 길이 그러했으니까요. 매년 연말에는 전국 극동방송에서 주변 이웃을 위해 따스한 도움의 손길을 전하고 있습니다. 작년 12월에도 방송사 운영위원들과 함께 구룡마을에 연탄 2만 장을 전달했고요. 매년 쌀, 연탄, 부식 등 이웃돕기 물품을 보내고 있어요. 2013년에는 시리아 난민들에게 숙소용 컨테이너 400채를 지어 주기도 했지요. 지금도 태극기를 붙인 컨테이너에서 많은 시리아 난민들이 대한민국과 극동방송에 감사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나눔에는 연령도, 국적도 중요하지 않습니다.이재만_요즘 대한민국의 이혼율이 정말 높습니다. 가정이 깨지는 모습이 많이 안타까우실 텐데요.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요?

김장환_가정을 지키려고 노력하다 어쩔 수 없이 갈라서는 부부를 보면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서로에게는 합당한 이유가 있을 테지만, 이혼은 당사자인 부부를 비롯해 자녀에게도 큰 상처를 남기니까요.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의 이혼율 증가는 사회와 교회가 함께 대처해야 할 중요한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만남과 헤어짐이 가볍게 여겨지고 있지 않나 싶어요. TV 드라마가 이러한 트렌드를 조장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이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이 성경 말씀이 시대를 반영하지 못한 고루한 이야기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습니다. 불같은 사랑만을 원하는 세대는 전인적인 깊은 사랑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내년이면 아내랑 결혼한 지 60주년이 됩니다. 60년이라는 세월 동안 우리 부부를 둘러싼 상황과 환경은 많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에 대한 언약을 지키기 위해 서로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 그 노력으로 우리의 사랑도 더욱 넓어지고 깊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도 저녁마다 아내의 발에 로션을 바르고 마사지를 해 주고 있습니다.


P3 성실한 복음 전도사

극동방송이 60년을 맞은 해를 지나 올해는 ‘또 복음 60년’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첫해라며 80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설레고 흥분된다는 김장환 이사장. 복음만이 남북통일과 사회 통합, 양극화 등 사회를 치유하고 국민들에게 소망을 주는 해답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후대에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성실한 복음 전도자’가 되기를 소원한다는 그는 오늘도 복된 소식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만_극동방송이 개국한 지 어언 60년이 지났습니다. 오랫동안 방송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지요?

김장환_제가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역사가 일어나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면 기적이 일어난다’인데요. 제게 방송은 만남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장입니다. 방송이 역사와 기적이 일어나는 장소가 되는 것이지요. 앞서 시리아 난민 캠프에 제공된 컨테이너 이야기도 했습니다만, 최근에도 방송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어요. 지난해 9월 극동방송이 창사 60주년을 맞아 연무대군인교회 새 예배당 건축을 위한 모금 생방송을 진행해 17억 원을 전달했습니다. 잠깐 진행된 모금 방송이었는데,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도 모인 헌금을 보며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임하셨구나 생각했습니다.

이재만_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보면 상대를 비판하지 말고 솔직하게 칭찬해 주며 상대방의 가슴속에 성취에 대한 생각을 불어넣어 주라는 원리가 나옵니다. 목사님도 탁월하게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교분을 나누시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들을 어떠한 철학으로 대하시는지요?

김장환_사람마다 만남의 의미가 다양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다양성은 그 사람의 직업에 따라 달라진다고 봅니다. 저는 목사다 보니 다양한 직업을 가진 교인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삶에서 만나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 기도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그래서 제게 만남은 영혼을 돌볼 기회이자 위로와 힘을 줄 수 있는 시간입니다. 결국 목사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든 아니든 만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안내하는 안내자가 되어야 하니까요.

이재만_오랫동안 목회 활동을 하시며 전도하신 분 중 가장 인상적인 분이 있다면요?

김장환_저는 다른 목사님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전도하라는 사명을 받은 것 같아요. 그중 박정희 전 대통령도 전도했는데, 열매를 못 보고 결국 총을 맞고 돌아가셨지요.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 내외도 수원중앙침례교회에 왔었어요. 지금은 반기문 UN 사무총장을 전도하기 위해 해마다 12월 둘째 주 토요일에 방문해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인상적인 분들을 다 열거하려면 한도 끝도 없지요. 1973년도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여의도에 와서 전도했을 때 제가 통역을 맡았는데요. 목사님이 설교를 다 마치고 하나님 믿기로 한 사람들 모두 일어서라고 했더니 무려 4만 명이 대답했습니다. 한국에 처음으로 대형 교회가 시작된 계기가 됐어요. 그게 참 보람찼습니다. 교도소, 학교, 군대에서 제 전도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까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재만_지난해 60주년 행사를 잘 마치고 새로운 한 해를 맞았는데, 어떤 비전을 갖고 계시는지요?

김장환_지난해 극동방송 창사 60주년의 표어가 ‘복음 60년, 또 복음 60년’이었습니다. 올해는 ‘또 복음 60년’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첫해인 거지요. 여전히 설레고 흥분됩니다. 지난 60년의 세월 동안 극동방송을 통해 많은 일을 해 오신 하나님께서 또 어떤 역사를 만들어 가실지 기대됩니다. 특히 우리 민족에게 한반도의 통일이 선물처럼 주어질 것이라 믿습니다. 극동방송이 북한 땅에서도 복음을 전할 그 날을 기대합니다. 아울러, 작년에 제주 FM 설립 허가도 받았습니다. 국내에는 아직도 극동방송을 청취할 수 없는 곳이 많습니다. 한국 교회의 공기(公器)로서 앞으로의 60년도 우리나라 곳곳에 복된 소식이 넘쳐나도록 쉬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만이 남북통일과 사회 통합, 양극화 등 사회를 치유하고 국민들에게 소망을 주는 해답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재만_후대에 사람들이 목사님을 어떤 분으로 기억하기를 바라시나요?  

김장환_20대에 목사가 되고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목사가 된 것을 결코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대한민국과 한국 교회의 성장과 발전기에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해 주신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성실한 복음 전도자’로 기억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고, 그렇게 되기 위해 오늘도 복된 소식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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