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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생가를 가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생가를 가다
  • 유화미
  • 승인 2017.02.27 15: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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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기품을 담은 호은종택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로 시작되는 조지훈 선생의 시 승무는 광고에 사용되기도 하고 여러 패러디를 낳는 등 오랜 시간이 지난 현재까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시의 저자 조지훈 선생이 태어난 곳은 대대로 훌륭한 인재를 배출해 온 역사 깊은 곳이다. 호은종택이라 불리며 많은 이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는 그 곳에 가보았다.

글 유화미 기자│사진 영양군청 제공

삼불차(三不借)의 가훈을 간직한 조지훈의 생가 ‘호은종택’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 입구에는 조지훈 선생의 시 ‘빛을 찾아가는 길’이 적혀 있는 시비가 방문객을 반긴다. <빛을 찾아가는 길의 나의 노래는 슬픈 구름 걷어가는 바람이 되리>라는 그의 시를 길동무 삼아 조금은 낯선 길을 따라가다 보면 문인의 기품이 느껴지는 기와집이 위치해있다.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시집 <청록파>를 펴내며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국문학자인 조지훈 선생이 태어난 이 곳은 유서 깊은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호은 조전이 터를 잡았으며 그의 둘째 아들 조정형이 현재의 집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호은 조전은 한양 조씨로 서울을 근거지로 삼아 살다가 1519년 조광조가 연루된 기묘사화가 발생하자 멸문의 화를 피하기 위해 주실마을로 피신해 오게 되었다고 한다.
영남지방 양반가 주택의 전형적인 모습인 ‘ㅁ’자 형태를 지녔으며 몸체와 관리사로 나뉘어져 있다. 곳간채와 사랑채, 안채로 이루어진 몸체는 앞면 7칸, 측면 7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꾸며져 있다. 사랑채의 서쪽에는 조지훈 선생이 탄생한 태실이 있는데 이 태실에서 태어난 이가 조지훈 선생뿐만이 아니다. 한말의 의병장이었던 조승기 선생과 6.25전쟁 때 자결한 조지훈 선생의 조부, 조인석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대문 옆에는 ‘호은종택’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호은종택의 사람들. 재물과 사람 그리고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는 삼불차(三不借)의 가훈을 지키며 살고자 했던 의지가 느껴진다. 이런 가문의 기운을 이어받은 이 호은종택은 6.25전쟁 때 불에 타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지만 중건되어 1988년 9월 23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 78호로 지정되었다.

죽음 또한 시로 승화시킨 시인 조지훈의 생애

높은 하늘과 올곧은 나무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곳, 경상북도 영양군 주실마을에 위치한 호은종택에 1920년 12월 3일 한 아이가 우렁찬 울음소리고 자신의 탄생을 알렸다.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조지훈 선생은 어려서 할아버지께 한학을 배웠다. 후에 3년간 영양보통학교에서 학문을 닦아 현재의 동국대학교의 전실인 혜화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혜화전문학교의 문과에 재학하며 이곳에서 불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1941년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오대산에 자리잡은 월정사 불교전문 강원으로 강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이곳에 있을 당시에 <금강경오가해>,<당시>등의 서적을 즐겨 읽으며 견문을 넓혀 갔다.
1942년엔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편찬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후에 이 사건으로 인해 검거되어 신문을 받기도 하였다. 후에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집>을 펴내면서 ‘청록파’로 문단에 이름을 떨쳤다. 광복 이후 1947년부터는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다. 교수로 재직하는 한편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문총구국대 기획위원장으로서 중부 전선에서 종군 작가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시작보다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소장으로 <한국문화사대계>사업에 집중하며 한국의 민족문화에 대한 연구에 열정을 쏟았다.
1968년은 조지훈 선생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해이다.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로 시작하는 시, <병에게>는 오랜 시간 병마와 싸우며 죽음을 준비해온 모습을 담담하게 담아낸 시이다. ‘잘 가게 이 친구/생각나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라고 마무리되는 이 시를 끝으로 조지훈 선생은 토혈로 짧다면 짧은 생애를 마무리 한다. 선생의 나이 48세의 일이었다. 

자연과 시대를 노래한 조지훈의 작품 세계

자연 주의적 시를 노래한 청록파 시인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그 중에서도 조지훈 선생이 노래한 자연은 민족 정서나 불교 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불교 세계에 대한 관심을 아름다운 문장과 섬세한 미의식으로 풀어낸 <승무>는 조지훈 선생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특히 이 시를 읽고 우리말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이들이 많다.
‘나빌레라’, ‘서러워라’, ‘별빛이라’ 등의 고전적인 어투의 사용은 마치 눈앞에 승무가 펼쳐지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또한 이런 시어들의 선택은 그윽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풍기며 시의 리듬감과 외형률의 조화를 이루게 했다. 그러나 조지훈 선생이 자연만을 노래한 것은 아니다. 어지러운 시국의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시 <동물원 오후>를 보면 식민지 치하를 살아가는 시인으로서의 고뇌와 고통이 잘 담겨 있다.
‘사방에서  창살 틈으로/ 이방의 짐승들을 들여다본다/ “여기 나라 없는 시인이 있다”고/ 속삭이는 소리…… ’ 문화말살정책이라는 고통 속에서 억압 받는 시인을 ‘철책 안에 갇힌’이라며 절망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광복 후에 찾아온 격심한 사상적 분열과 곧이어 닥쳐온 6.25전쟁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위치한 시인의 분노를 표현한 작품으로는 <역사 앞에서>가 있다. ‘오기 전 기다리고 온 뒤에도 기다릴/ 영원한 나의 보람이여/ 묘막한 우주에 고요히 울려 가는 설움이 되라’
자연을 노래하는 데 그치지 않고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찬란한 생을 살다간 시인 조지훈 선생. 어지러운 시대에서도 선비의 지조를 잃지 않고 꿋꿋이 민족문화를 지키는데 업적을 남기고 떠난 문학계의 큰 별이었다.

*관람정보
조지훈 생가
주소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실길 27
문의번호 054-680-6062

조지훈 문학관
주소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실길 55
문의전화 054-682-7763
관람시간 하절기(09:00~18:00) 동절기(09:00~17:00)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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