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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공터에서>로 돌아온 김훈 작가,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에 대하여
소설 <공터에서>로 돌아온 김훈 작가,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에 대하여
  • 송혜란 기자
  • 승인 2017.03.29 07: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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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무섭고, 달아날 수 없는 곳이었다.” 올해 칠순을 맞은 김훈 작가에게 글쓰기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노화 현상으로 인해 글을 쓰며 많은 한계에 부닥쳤다는 김 작가. 한동안 단편소설과 에세이 작업에만 몰두해온 그다. <공터에서>는 2012년 <칼의 노래> 이후 5년 만에 나온 그의 자전적 장편 소설.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현대사를 우리네 아버지와 형제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의 깊은 바닥에 들러붙은 기억과 인상의 파편들을 한데 엮었다. 시대 전체를 통달하기보단 디테일을 스냅화 하는 새로운 글쓰기 전략도 내놓았다.

[Queen 송혜란 기자] 사진 [Queen 양우영 기자]

지난 2월 6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는 김훈 작가의 장편 소설 <공터에서> 출판기념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기자 출신 작가가 기자들 앞에 선다는 게 꽤 쑥스러운 일인 듯 그는 “참 민망하고 몸 둘 곳 없다는 생각이 든다”며 “이 자리에 오기가 너무 힘들어서 어제는 집 밖을 돌아다니다가 빙판에 넘어져 이마와 무릎이 다 깨져 겨우 나왔다”고 첫 운을 뗐다.

<공터에서>는 우리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굵직한 사건들을 마씨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 마동수와 그의 삶을 바라보며 성장한 아들들의 삶을 통해 드러낸 소설이다. 신산스러운 삶을 바라보는 서늘한 시선이 바닥 깊이 깔려 있다. 주간경제 잡지사에 취직한 둘째 아들 마차세가 그의 페르소나임을 짐작게 한다.

“저는 1948년에 태어나 올해 70살이 됐습니다. 제 돌아가신 아버지는 1910년 우리나라가 망해 없어지던 해 태어났어요. 제가 태어난 해는 이 나라를 다시 만들어서 정부수립을 하던 때였지요. ‘1910’과 ‘1948’이라는 숫자가 저희 부자의 운명적인 좌표처럼 찍혀버린 겁니다. 결코 도망갈 수 없는, 피해서 달아날 수 없는 한 시대의 문명이 전개됐던 것이고, 저나 저희 아버지 모두 그 시대에 참혹한 피해자였습니다.”

김 작가의 작품에는 피해자만 등장한다. 영웅이나 저항하는 인간을 찾아볼 수 없다. 역사의 하중이 너무 무거워서 미치광이가 되어 세계의 바깥을 떠도는 이들뿐이다. 여기서 희망은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희망은 조금밖에 말하지 못했어요. 사소한 것 속에 들어 있는 희망을 조심스럽게 말하다가 미수에 그친 것 같아요. 그것 또한 너무나 사소하고, 무기력하게 보이겠지만 저로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는 스스로 협소한 시야와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시대 전체의 구조를 보고 통합하는 시야가 없습니다. 저는 쓰고 싶은 것, 써야 마땅한 것을 쓰는 것이 아니고, 쓸 수 있는 것을 겨우겨우 쓸 수밖에 없어요. 이런 글로써 제 생애를 마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진정한 글쟁이의 괴로운 고백

사진  [Queen 양우영 기자]

“어떠한 목표나 당위가 있더라도 자신의 언어를 몰고 가서 올바른 표현에 도달할 수 있는 장인적 기법이 확보되지 않는 한 글을 쓸 수 없다.” 이를 괴로운 고백이라고 말하는 김훈 작가. 대개 문학의 거장 조정래 선생이나 황석영 작가는 한 시대의 구조, 억압, 역사적인 틀 안에서 전체를 내다보며 인물을 배치해 글을 쓰는 사람인데…. 그럼에도 그가 그들과 이름을 나란히 하는 데는 분명 다른 힘이 있기 때문일 터.

“전체를 묘사할 수 없는 제가 고심참담해서 도입한 것은 어떠한 디테일한 부분, 세부적인 것에 갑자기 달려들어 날카롭게 한 커트 찍어버리는 스냅적인 기법이었어요. 디테일을 통해 큰 것을 드러냄으로써 이 고통스러운 글쓰기를 돌파하자고 생각했지요.”

여기에 그는 미술의 크로키 전략을 함께 응용했다. 먼저 빠른 속도로 펜을 움직여 스피드하게 골격만 그려 나갔다.

“제가 이 어려운 난관을 돌파하려면 이 방법이 유일하겠더라고요. 스냅 사진과 크로키 데생 법으로 문장을 전개해 갔습니다. 제 전략은 부분적으로 성공했고, 또 많은 부분에서 실패했어요. 이번 소설의 분량이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도 마지막에 상당한 부분을 걷어냈기 때문이에요.”

부분적인 성공이라면 그의 탁월한 문장력을 말하는 것일까? 전체보다 디테일에 집중하는 그는 문체를 매우 신중하게 고르는 작가로 유명하다. 특히 조사에 대한 고민 없이 글을 쓰는 요즘 젊은 작가에게 해줄 수 있는 그의 조언도 무궁무진할 듯했다.

“한국어는 조사를 읽어야 해요. 예를 들어 ‘나는 너를 사랑한다’에서 ‘는’과 ‘를’을 모르면 문장의 뜻을 이해할 수 없지요. ‘는’부터 ‘은’, ‘을’, ‘를’, ‘이’, ‘가’까지 6개의 조사는 아주 모호한데 그 속에 우리가 모르는 힘이 있어요. ‘비가 내린다’와 ‘비는 내린다’는 문법적으로 규명할 수 없지만, 그 의미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조사 하나 하나 따져가며 글을 쓰려면 진이 다 빠져요. 그러한 노력 없이 문체를 만들어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유구한 전통은

엄청난 필력을 가졌음에도 인터뷰 내내 자신의 한계가 무엇인지 스스로 상처 도려내듯 말하는 김훈 작가. 그도 그러한 것이 이번 작품이 세상의 빛을 보자마자 허무주의, 소아 성기 묘사 등 관음적 시선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제 작품에는 어떠한 이념이나 사상이 거의 없는 사람만 등장해요. 저는 그런 것보다 어떻게 생활의 바탕 위에서 이념과 사상이 건설, 전개돼야 할까를 고민했어요. 명석한 전망이나 희망을 제시하지는 못했어요. 지금까지 쓴 모든 작품에서도 똑같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저의 아주 분명한 한계에요. 모든 문장 하나하나마다 저의 한계는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한계에 부딪혀서 갈팡질팡하며 살고 있다는 그를 가만히 보아하니 어쩌면 그것이 그가 계속 글을 쓰는 이유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저는 다큐멘터리나 르포, 보고서, 실록 등 팩트에 바탕을 두고 쓰는 글을 좋아해요. 이번 작품을 쓰면서도 70년대 신문 사회면 기사를 두루두루 살펴봤는데, 우리 사회의 유구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갑질이더군요. 한 50만 명이 넘는 피난민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줄을 서서 그 추운 겨울날 피난을 가는데, 이 나라 고관대작들이 군용차와 관용차를 징발해 응접세트와 피아노를 싣고 그 사이를 질주해 버리는…. 아, 내가 이러한 나라에 태어나서 글을 쓰고 있구나. 참 슬펐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전쟁 때 신문이 보여준 괴리와 야만성이 지금도 계승되고 있다는 데 개탄을 금치 못했다. 세월호 사건부터 광화문 촛불집회까지 매일 분노의 함성이 일어나고 있는 그 전통은 유구한 것이로구나…. 이에 그는 앞으로도 이러한 문제에 대해 자신 나름대로 매우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운 글쓰기를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저 사람은 본래 저런 사람이구나’ 하고 알아줬으면 해요.”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구체적으로 어떠한 작품을 더 쓰게 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자료를 많이 읽었어요. 이야기를 어떻게 변형시켜볼까 고민 중입니다. 세월호 참사 다음 날 자살한 교감 선생님이 자꾸 머릿속에 맴도는데요. 너무나 끔찍해요. 이 분에 대해 뭐라고 글을 써야 하나 또 한 번 제 한계를 넘어서야 하는데 아마도 종교의 영역으로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1970년대 기자가 밝히는 소회

최근 건강 악화로 단편 소설과 에세이 작업에만 몰두해온 김훈 작가. 한때는 글을 더 써서 뭐하나 싶을 정도로 슬럼프를 겪은 그이지만, 올해부터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작품 활동에 열중할 것이라고 알렸다. 그런 그에게 1970년대 기자로서 현장에서 밀접하게 지켜본 박정희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쓸 계획은 없는지 물었다.

“항상 그 시절을 소설로 옮겨야지 생각은 하는데 도통 엄두가 나지 않아요.”

1970년대 사회가, 한국 언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그는 다 알고 있다. 이는 어느 언론사 기자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현 사회가 그 문제에 대해 총체적으로 반성하거나 되묻을 기회는 없었다. 세월만 흘렀는데 이제는 말할 때가 됐다고 그는 되뇌었다.

“사실 자신은 없습니다. 내가 무슨 소설을 쓰기보다 일단 그 시대 사람들이 다 모여 왜 그때 그랬는지 좀 이야기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아마 그 시대 언론들이 역사가 민주적인 법칙에 따라 전개되고 진화할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사회 전체의 공포 분위기에 짓밟혀 있었지요. 제 개인적인 소회입니다. 더 늙기 전에 후세에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막 칠순을 넘긴 그가 향후 펼쳐놓을 작품은 또 어떠한 모습일까? 절대 아버지처럼 되지는 말아야겠다는 일념으로 1920년부터 1980년까지 이어지는 시대 안의 자전적 소설을 펴냈듯, 앞으로도 남루한 사람들의 비참하고 비애로운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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