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6 20:10 (화)
 실시간뉴스
‘껍데기는 가라’ 저항 시인 신동엽의 생가를 가다
‘껍데기는 가라’ 저항 시인 신동엽의 생가를 가다
  • 유화미
  • 승인 2017.03.31 11: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대한민국 문단에 기념비적인 저항시인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를 남기며 60년대 문단을 이끌어 나간 시인 신동엽. 대한민국 역사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은 시인은 비관적인 시대 상황에서도 미래에 대한 단호한 의지를 꺾지 않았다. 어지러운 시국에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그의 시에서 찾아보았다.

파란 기와가 우뚝 솟은 신동엽 생가

‘껍데기는 가라’를 울부짖었던 시인 신동엽의 생가는 걸으면 걷는 대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길동무가 되어 주는 부여의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를 잡고 있다. 신동엽 생가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던 그 마음과 같이 푸르른 기와가 우뚝 솟은 지붕과 그 지붕을 따라 둘러진 소담한 한옥집이 바로 그곳이다.

시인은 이곳에서 문학의 꿈을 키우던 어린 소년 시절과 사랑하는 부인과의 신혼 생활을 보냈다. 시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이 그대로 이곳에 남아 있다. 서가엔 시인이 보았을 법한 책들이 꽂혀 있고, 벽면엔 시인의 살아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이 걸려 있어 시인의 숨결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신동엽 시인의 부인은 짚풀문화학자이자 민속학자 그리고 시인인 인병선 씨인데, 후에 이 생가에 남편 신동엽 시인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마음이 담긴 ‘신동엽 생가’라는 시를 목판에 기록해 시인이 생전에 기거하던 방문 위에 걸어 두었다. 이 목판 위에 새겨진 시는 고 신영복 선생의 글씨로 새겨져 그 의미가 더욱 남다르다.

신동엽 시인의 생가는 부부와 부모님들이 살던 방 두 칸과 조그마한 부엌으로 이루어진 소박한 곳이다. 집 앞마당은 봄이 되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개나리와 몇 가지 꽃나무가 방문객들의 마음을 간질인다. 시인이 40세의 젊은 나이에 문학의 혼을 불태우다 세상을 떠난 후에도 시인의 아버지가 오랫동안 생가를 지켰다.

부친께 직접 듣는 시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일화는 방문객들에겐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왔지만, 1990년 부친이 작고하면서 그런 감동은 다시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신동엽 시인의 생가엔 그의 예술혼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생가와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엔 2013년 개관한 ‘신동엽 문학관’이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선 시인의 육필 원고와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1985년에 유족과 문인들이 뜻을 모아 이 생가를 복원했으며, 2003년 시인의 아들이 생가의 영구 보존을 바라며 생가를 부여군에 기부했다.

 

4·19혁명의 시인

1930년 8월 18일 부여에 위치한 조그마한 마을인 동남리에서 태어난 신동엽 시인은 농사를 짓는 부모님 아래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신동엽 시인의 문학에 대한 재능을 처음 알아본 것은 그의 부친인 ‘신연순’이었다.

그 시대 대부분의 농민들이 그러했듯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책과 붓을 마련해 6살 때부터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후에 부친은 시인의 학비를 대기 위해 밭을 내놓기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시인으로서의 신동엽은 이런 아버지의 사랑 끝에 탄생했다. 

1943년 부여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이 시절 함께 전주사범학교를 다닌 소설가 고 하근찬 씨는 이때의 신동엽 시인을 이렇게 기억한다.

“그는 늘 옆구리에 세계문학전집 같은 문학 서적을 끼고 다녔다.”

1948년, 이승만 정권의 토지개혁 미실시와 친일 미청산에 항의하는 동맹휴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에 자취방을 얻은 시인은 지인의 도움으로 돈암동 네거리에 작은 헌책방을 열게 된다. 이곳에서 부인 인병선 씨를 만나 1957년 결혼한 뒤 고향으로 낙향했다.

1958년 폐결핵을 앓게 되면서 시인은 독서와 습작에 더욱 몰두하게 된다. 문명과 위선에 찌든 현실에 대한 비판과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를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석림이라는 필명으로 응모해 입선되었다. 후에 본격적으로 시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건강을 회복한 신동엽 시인은 서울로 올라가 있던 가족과 합류해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960년 4월 19일 그날의 시인을 부인 인병선 씨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날 아침에 나간 사람이 하루 종일 들어오지 않았어요. 저녁에 들어왔는데 온몸과 구두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걸로 봐선 하루 종일 돌아다닌 것 같았습니다. 얼굴은 상기돼 있었고 눈은 청명하게 빛나고 있었지요.”

4·19혁명 그 역사의 순간 한복판에서 신동엽 시인은 민주주의의 대한 열망을 온몸으로 느꼈다. 후에 <학생 혁명 시집>을 펴내며 혁명에 그 힘을 보탠다. 이 무렵부터 격동의 세월 속에서 현실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시를 쓰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훗날 신동엽 시인을 4·19혁명의 시인으로 평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진 신동엽문학관 제공

민중의 염원을 대변하던 작품 세계

신동엽 시인은 작품을 통해 억압받고 구속당하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극복해 새로운 자유를 쟁취하고자 하는 민중의 염원을 대변하고는 했다. 특히 전통적인 서정성과 역사의식의 결합을 시를 통해 구현해 내곤 했는데, 역사의 격변기 속에서 우리 민족이 유지해 온 전통적인 삶의 양식이 붕괴되고 있는 과정을 드러내고 있다.

<진달래 산천>, <내 고향은 아니었네> 등의 시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을 비판만 하고 있지는 않는다. 그러한 현실의 허구성을 폭로하면서 이러한 현실을 극복해 내기 위해선 민중적 이념이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껍데기는 가라> 등의 시를 보면 시인의 현실 참여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느낄 수 있다. 특히 1969년 시인의 현실관이 절정을 이룬 <금강>을 발표하며 격동의 현실 한복판에 자리하게 된다. 장편 서사시인 <금강>은 미완의 혁명이었던 4·19혁명과 역시 미완의 혁명이었던 동학농민전쟁을 동질화시키며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금강’에 투영해 놓은 작품이다. 

여러 작품을 발표하며 시인 김수영과 함께 60년대 한국 문단을 이끌어 나간 대표적인 참여 시인으로 평가받는 신동엽 시인. 그는 문학적 동지인 김수영 시인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진 지 약 일 년 만에 간암으로 숨을 거둔다. 그의 나이 만 서른아홉 살이었다. 한국 문단은 커다란 별을 잃고 한동안 깊은 슬픔에 빠져야만 했다.

*관람정보
신동엽 생가/문학관
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501-21 / 충남 부여군 부여읍 신동엽길 12
휴관일 : 매주 월요일
관람료 : 무료
문의 : 041-830-6827

[Queen 유화미 기자] 사진 신동엽문학관 제공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