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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4월 13일은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한 날
역사 속 4월 13일은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한 날
  • 유화미
  • 승인 2017.04.14 13: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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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4월의 역사를 돌이켜 보자. 과거의 수많은 오늘들을 보내며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 모습을 갖춰 왔다. 어쩌면 우리가 무심코 흘려보내는 지금 이 순간이 미래엔 역사의 한 날로 기록될지도 모를 일이다. 과연 과거의 오늘엔 어떤 역사가 기록되어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 년 전 오늘은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 된 날이다.

한민족의 희망을 엿보다

1919년 4월은 대한민국의 국권을 피탈당한 아픈 역사의 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한줄기 희망의 빛은 꺼지지 않고 불타오르고 있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전 민족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3·1운동으로 독립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다. 그러나 3·1운동으로 보여 준 우리 민족의 염원이 곧바로 독립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하지만 우리 힘으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게 했으며, 좀 더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위해 중앙기관 설립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그리하여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하였으며, 4월 13일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하였다.

3·1운동으로 민족의 힘을 크게 느낀 독립운동가들은 왕이 통치하는 ‘대한제국’이 아닌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이라는 큰 꿈을 꾸게 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와 정신을 기리기 위해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일을 법정기념일로 제정했다.

자주독립으로의 험난한 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국내가 아닌 중국의 상해에 세운 이유는 여러 가지로 볼 수 있다. 당시 국내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라는 시련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상해는 일제의 영향력이 덜 미칠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공사관이 위치해 있어 외교 활동을 전개해 나가기에도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리하여 중국의 상해에서 임시의원장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신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모습을 갖춰 나갔다.

자유민주주의와 공화정을 기본 이념으로 삼고 민족 독립운동의 선봉장에 서서 그 역할과 임무를 묵묵히 수행해 나갔다. 국내에는 비밀 연락망인 ‘연통제’를 두어 연결을 좀 더 굳건히 했고,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애국 공채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공채 발행으로 국내와 중국에 있는 동포들 외에도 미국 등에 거주하고 있는 해외 동포들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외에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민족 대표로 파견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등 대한민국의 독립 의지를 굳건히 하는 활동들을 전개했다.

1941년에는 연합군에 가담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였지만 일본의 항복으로 군사 작전을 수행하지 못한 채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게 된다.
 

[Queen 유화미 기자] 사진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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