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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동 이발사
용두동 이발사
  • 김도형
  • 승인 2017.04.18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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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전쟁이 막바지로 가고 있을 때 열 살이었던 경북 영주 출신의 소년은 무작정 집을 나섰다.

전쟁에 나간 형이 전사하고 홀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정해진 행로도 없이 집을 나선 것이다. 굶주린 몸으로 걷고 또 걷다 지쳐 버드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있는데 저 만치서 먼지를 날리며 달려오는 차가 있어 저 차를 잡아타지 못하면 길에서 죽을 것 같아 차가 가까이 오자 막무가내로 차 앞을 막아섰다.

그 차는 미군 장교가 탑승한 짚이었고 장교가 운전병과 몇 마디 나눈 후 소년을 태웠다. 구경만 했지 타본 적이 없는 차를 타고 험한 비포장 고갯길을 넘어가며 몇 시간을 멀미에 시달리던 소년이 내린 곳이 삼척이었다.

허기진 소년은 당장 눈에 보이는 식당부터 찾아 들었다. 음식 값이 있을 리 없었던 소년은 손님인양 자리에 앉아 우동을 시켜 먹었다. 허겁지겁 그릇을 비우고 난 소년이 주인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 하자 주인은 소년에게 갈 곳이 없으면 식당에서 허드렛일이나 도와주며 지내라고 했다.

그 식당에서 2년가량을 성실히 일하던 중 전쟁은 끝났고 소년은 우연한 기회로 임시 수도 부산의 철도호텔 이발구에 조수로 취직해 갔다가 경력을 쌓은 후에 광복동 옛 미화당 백화점 밑에 자리한 공화이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의 공화 이발관은 그 일대에서 규모가 크고 이름난 이발관으로서 임시 정부 관리들이나 부산 시청 공직자들이 단골로 찾던 곳이고 십 년 가까이 조수 생활을 해야만 겨우 가위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규율이 엄했던 곳이다.

열세 살에 공화이발관에 들어간 소년은 고된 하루 일을 마치면 이발관 의자를 붙여 쪽 잠을 잤고 명절을 앞둔 때는 며칠씩의 밤샘이 예사라 코피가 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일이 서툴러 간혹 실수라도 하게 되면 매를 맞을 때도 있었는데 그런 날은 이발관 문을 닫은 후에 홀로 영도다리를 오가며 울기도 많이 울었다.

아무리 바쁘고 고되더라도 배움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용두산공원 밑에 있었던 야간 동아 중고등학교에서 주경야독 했다. 부산에서 그렇게 이발 기술을 익히고 고등학교까지 마친 소년은 서울로 올라와 한평생 이발을 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위의 글은 내가 얼마 전 서울 용두동의 어느 골목을 지나다 ‘남자 커트 3000원’ 이라고 씌어져 있는 푯말을 보고 요즘 삼천 원짜리 이발도 있나 하는 호기심이 일었고, 마침 머리도 길었고 해서 들어가 이발을 하던 중에 무심코 물어본 “사장님은 언제부터 이발을 하셨어요?” 라는 질문에 그 사장님이 이십 여 분 동안 들려준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그 사장님뿐 아니라 한국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저마다 뼈저린 사연들이 없을 리 없다. 역시 혹독한 전쟁의 터널을 빠져 나온 뒤 분단 소설로 이름을 날린 어느 작가는 아내가 과식에 따른 건강을 염려해 평소의 밥그릇보다 작은 공기에 담은 밥을 밥상에 올렸을 때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전쟁 통에 배고픔이 얼마나 한이 되었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며 적어도 밥 굶어 죽을 걱정이 거의 없는 이 시대에 내가 지금 안고 있는 고민들이 참 시시껄렁하고, 전쟁을 피한 시절에 태어난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용두동의 그 이발관은 2012년도에 동대문구청으로부터 물가안정 모법업소(착한가게)로 선정되었고, 복지카드를 소지한 노인은 무료로 이발해 주는 사유 등으로 그동안 받은 감사장을 표구한 액자가 이발소 벽에 가득했다.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 현대 이발관 유삼용 사장님의 건강과 행복을 빈다.

[Queen  김도형 기자] 사진 [Queen 김도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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