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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작가의 속살을 드러내다, 서양화가 오치균
‘뉴욕’, 작가의 속살을 드러내다, 서양화가 오치균
  • 백준상 기자
  • 승인 2017.05.04 16: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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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n 2016년 4월호] 서양화가 오치균 화백이 ‘뉴욕’의 풍경을 그린 그림들로 자신의 속살을 가감 없이 공개했다. 금호갤러리는 지난 4월 10일, 한 달여 전에 시작한 오치균 개인전 ‘Oh Chi Gyun, New York 1987~2016’을 성황리에 종료했다. 성료 며칠 전 오 화백을 만나 전시회와 그의 미술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 A Figure, 1986


손꼽히는 스타작가인 오치균 화백의 뉴욕시리즈 개인전에 대한 언론과 미술 애호가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오 화백의 30년간의 뉴욕 그림 100여 점을 한데 모은 전시였고, 시기별로 달라진 작풍은 화제가 되었다. 전시회는 ‘감나무’ 작가로 널리 알려진 오 화백의 새로운 면모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작가의 자전적 풍경을 담은 뉴욕 시리즈 그림들은 생활형편에 따라 그림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라는 상식적인 감상평을 남기게 하는데서 나아가 오 화백의 인간적 면모, 생활상까지 엿보게 했다. 때론 작가의 전기적(傳記的) 스토리를 아는 것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세 차례의 뉴욕 거주를 통해 낳은 작품들

“세 차례 뉴욕에 머물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그린 그림들을 어렵게 모아 전시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당시 뉴욕에서의 삶과 인생이 반영된 그림들인데 생활의 변화에 따라 작풍이 달라졌음을 느끼실 겁니다. 제 삶이 뉴욕이라는 대리물을 통해 반영된 자화상이라 할 수 있지요.”

오치균 화백은 예순이라는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게 만드는 검은 차이나풍 자켓과 팬츠를 착용하고 나타났다. 그는 다부진 체격과 문신이 드러나는 팔뚝으로 건강함을 드러냈고,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장면에서 그의 대인기피증이나 사회성 부족을 찾기란 어려웠다. 그는 미술관에 예고 없이 나타나지 않은 해설사를 대신해 한 무리의 아줌마 부대를 대상으로 그의 작품들에 대해 설명하고 막 나온 터이기도 했다.

오 화백은 어두운 톤의 뉴욕 초기 그림들을 가리키며 당시 “왜 그렇게 칙칙한 그림들을 그렸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고 얘기를 꺼냈다.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한 그는 군대를 마치고 미술학원을 차려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지만 돌연 미국 브루클린 대학원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두 차례나 뉴욕에 더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유학 시기에 해당하는 1987년부터 1990년까지가 ‘뉴욕 1기’, 개인전 준비를 위해 1992년 다시 떠나 뉴욕에 잠시 정착하여 1995년 산타페로 이주하기 전까지가 ‘뉴욕 2기’, 그리고 2014년 가을 다시 뉴욕을 찾았을 때 받은 인상들을 담은 ‘뉴욕 3기’이다.

뉴욕 1기의 대표작은 ‘Homeless’와 ‘Figure’, ‘Subway’ 시리즈다. 어두운 거리의 부랑자와 좁은 방 안에 기묘하게 일그러진 자세를 취한 인물, 대도시를 관통하는 어두운 지하철 선로의 모습들은 물감의 두터운 질감과 어우러져 작가가 타국에서 이방인으로서 보낸 고단했던 삶의 정서와 음울한 분위기를 짙게 풍긴다.

“원래부터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어요. 군대 제대 후 차린 미술학원이 잘 돼 돈을 꽤 벌었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며 한국의 재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사기를 당해 빈털터리가 되어, 미국에서 먹고 살려고 옷가게와 세탁소 점원 등으로 닥치는 대로 일했어요. 아내도 야채가게에서 일해야 했고요. 그런 좌절감과 어두운 전망이 사물과 풍경을 보는 시선에 영향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뉴욕에서의 지옥 같던 유학시절에 그렸던 어둡고 음울한 그림들은 1991년 서울 금호갤러리에서 연 귀국 초대전에서 그에게 보상을 안겨주었다. 국내 화단의 반응은 좋았고 작품 판매도 많이 되었다. 당시 귀국 초대전에서의 성공은 이번 초대전을 25년 만에 다시 금호갤러리에서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적 궁핍에서 어느 정도 헤어 나온 오 화백은 1992년 개인전 준비로 들린 뉴욕에서의 체류가 길어지며 다시 거주하게 됐다. 그의 뉴욕 2기는 ‘Empire State’, ‘설경’ 시리즈 등으로 대표되는데, 경제적으로나 생활적인 면에서 안정됨에 따라 도시의 건물 외형이 주는 기하학적 조형미로 관심이 전환되는 과정과 일상의 소소한 대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안정된 심리상태를 느낄 수 있다. 1993년 그는 뉴욕에서 딸을 출산한다. 하지만 ‘월드 트레이드 센터’ 그림처럼 아직 어두운 색조에서 완전히 헤어 나오지는 못했다.

2014년 돌연 뉴욕의 가을이 생각나지 않는다며 뉴욕으로 떠나며 그는 마지막 뉴욕 3기의 문을 열었다.  ‘Central Park’ ‘West Broadway’ ‘1st Ave.’ 등으로 대변되는 뉴욕 3기의 그림들은 이전보다 한층 밝고 경쾌해진 색감과 마티에르로 뉴욕의 공원과 거리 풍경을 일렁이듯 생동감 있게 전달하며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와 맥락을 함께 한다.

그는 그동안 그렇게 나무들이 많았는지 몰랐다며 가로수인 단풍나무들을 줄기차게 그려냈으며, 뉴욕은 더 이상 어두운 거대 자본주의 사회가 아닌 밝고 생기 넘치는 장소로 제시되었다.

▲ Central park, 2015

인체 정물 풍경 등 다양한 범주로 확장해 제시된 뉴욕 시리즈는 사회의 부조리나 정치적 이슈를 담은 거대한 이야기의 장이라기보다는 작가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개인적 이야기의 장이다. 내면에 침잠했던 어두운 초기 인체 모습부터 밝고 생동감 있는 공원의 풍경까지, 작가가 그려낸 다양한 뉴욕의 모습을 통해 한 인간이자 작가인 오치균 화백의 삶을 읽을 수 있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까맣게 그렸는지는 모르겠어요. ‘감’시리즈 이후 ‘사북’시리즈를 그릴 때도 어렵긴 어려웠지만요. ‘감’ 시리즈에서 파란 하늘이 와 닿았는데 ‘사북’ 시리즈에서는 다시 어두워졌어요. 칙칙함에서 밝음으로 변화한 뉴욕 시리즈를 바라보면서 그림이 인생의 굴곡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오 화백에게 자신의 뉴욕 시리즈 작품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에 대해 물었다. 그는 뉴욕 2기 때 그린 아내와 딸의 초상화를 지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가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잘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렘브란트 풍의 부인의 초상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84년에 결혼한 부인 이명순 여사는 역시 그림 전공으로 브루클린대학원을 함께 다니며 그와 동고동락했다. 화면 속 어린 소녀였던 외동딸은 이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서양화를 전공하여 현재 메릴랜드 인스티튜트 컬리지 오브 아트(MICA)에 재학 중이다.

▲ Houston Street, 1995

핑거 페인팅으로 독특한 작품세계 구축

오치균 화백은 다른 서양화가들처럼 붓이나 나이프로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손가락을 사용하는 핑거 페인팅으로 물감을 두텁게 쌓아올려 재질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마티에르 기법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었다. 그림 속 사물의 윤곽은 모호하여 각각의 색 덩어리들에 의해 형태가 드러날 뿐이고 화면은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며 강한 서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오 화백의 마티에르 기법은 종종 프랑스 인상파와 비교된다. 뉴욕의 미술평론가 푀브 호반은 그의 작품들에 대해 “반 고흐의 임파스토 기법이 지닌 열정으로 그려진 보나르의 명상적인 작품”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인상파라고 하기에는 이미지가 무겁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양정무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는 그를 안젤름 키퍼 같은 독일 신표현주의 작가와 비교하기도 했지만 두 작가 작품의 차이에 주목했다. 옛날 방식의 페인팅이지만 오치균 화백은 어디까지나 그만의 존재감을 지닌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맨손에 로션만 바르고 직접 찍어 바른 두터운 물감으로 축조된 결과물이다. 촉감을 중시하여 라텍스 장갑을 끼지 않으며 수성의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유화의 독성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아크릴 물감에 모델링 페이스트를 섞어 유화가 주는 두터운 질감을 얻고 있다. 이런 방법은 깊은 숙고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어느 날 우연히 시도한 것이 맘에 들어 정착된 것이다. 그는 그가 표현하고 싶은 것이 붓이나 나이프보다 손이 더 편하고 수월하다고 했다.

오 화백은 동서양의 대가들을 모두 좋아한다 했지만 특히 좋아하는 미술가로 반 고흐를 비롯해 루시앙 프로이트, 마크 로스코, 잭슨 폴록, 자코메티, 미켈란젤로를 꼽았다. 어둡고 음울한 ‘사북’시리즈가 민중미술과 연관성을 갖느냐는 질문에는 즉각 부인했다. 그는 미술사조인 리얼리즘 자체에는 이미 민중을 내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화가로서 정치적, 사회적 문제 같은 서사에 경도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트렌드에도 무심한 편이다. 그는 오직 자신이 보고 느낀 것만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선입견에 빠질까봐 대학 이후 책도 읽지 않았다는 그다. 미리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손을 이용해 그림을 만지고 다듬는 과정을 통해 작품을 완성해낸다. 그는 그렇게 그리기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세계와 소통했다.

 

오 화백에게 부자여서 그림을 그리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가 물었다. 그는 국내 현존작가 중 2~3위의 낙찰률을 자랑하는 초특급 작가다.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1998년작 ‘사북의 겨울’이 6억 원 넘게 팔리기도 했다. 서울 강남에 빌딩 몇 채를 지니고 가로수길에 작업실을 둔 그는 이제 그림을 팔지 않아도 살 수 있을 만큼 부자다.

“경험상 돈은 너무 적어도, 많아도 문제지만 한국에서는 돈에 대한 이중적 잣대를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갈구하면서도 돈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시각이 존재하니까요. 세계 미술사에서 고흐처럼 불행한 화가도 있지만 모네처럼 부자인 화가도 적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서구의 유명 미술가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부이고, 최근 중국 장 작가들에 비해서도 한국 화가들의 부의 수준은 아직 낮다고 할 수 있지요.”

원래 돈이 풍족했던 오 화백은 뉴욕 유학시절의 어려움이 언론에 강조된 면이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그림으로 부를 이뤘지만 건강을 잃기도 했다. 지난 2008년 공황장애가 왔고 부정맥으로 심장을 3년간 치료받았다. 2014년경에는 하반신 마비를 겪기도 했으며 조울증 증세를 앓고 있기도 하다.

다행히 지금은 잘 버텨내고 있는 중이다. 원래 병약하게 태어나서 감기와 배탈을 달고 살았다고 하는데 40대에 하루 세 갑씩 피우던 담배를 끊고 운동을 통해 78㎏의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다.

오치균 화백은 2007년 이후 미술 호황기에 도움을 주고받았던 현대갤러리와는 연을 끊은 모양새다. 지금은 미술관에서의 전시를 선호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제 예전과는 다른 전시를 하고 싶습니다. 상업화랑에서의 단편적인 전시보다는 미술관 전시를 하고 싶어요. 판매와는 관계없는 순수한 전시도 좋습니다. 미술관의 잘 짜여진 기획과 디스플레이에 마음이 더 가네요. 작품들이 새롭게 조명된 이번 금호갤러리 뉴욕시리즈 전시도 그런 차원에서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그는 수년 전부터 모교인 서울대 미대 후배들에게 ‘오치균 장학금’을 주고 있다. 몇몇 미술관에 작품 여러 점을 기증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없어서 못 파는 인기작인 ‘감’ 시리즈는 미술관 기증을 퇴짜 맞았다고 한 전문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뉴욕시리즈 도록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는 뇌과학작인 정재승 교수(KAIST)로부터 양면성을 지적받았다. 겉모습은 마초적인데 그림은 섬세하고 여성적이며, 몸은 터프한데 보호색일 뿐이고 그림들이 내밀한 정신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점에 동의했다. 정재승 교수는 도록 말미에 이렇게 썼다.

“그가 손가락으로 짓이긴 물감들 속에서 표현하려 했던 것은 재능과 열등감이 뒤범벅이 된 현실로부터 벗어나, 그가 온전히 몰입하고 숭고한 쾌락을 느끼는 시간들을 정갈하게 축조하려 했던 것이며, 그것은 고스란히 오치균 작가 영혼의 민낯을 보여준다...”


[Queen 백준상 기자] 사진 [Queen 양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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