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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 서상돈 고택을 가다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 서상돈 고택을 가다
  • 유화미 기자
  • 승인 2017.07.27 14: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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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 생가
▲ 사진 이상화기념사업회 제공

 일제에 진 빚을 갚아야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아 올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 전 국민이 참여한 이 운동은 한 거상의 입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조선 말기의 기업인이자 관료였으며 독립운동가였던 서상돈 선생이 바로 그 거상이다.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인 서상돈 고택으로 함께 떠나 보자.

서상돈 선생의 숭고한 뜻이 담긴
‘서상돈 고택’

“지금 국채 1,300만 원이 있으니 이것은 우리 대한의 존망이 달린 일이라 할 것입니다. 이를 갚으면 나라는 보존되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은 필연적 추세일 것입니다. 지금 국고로는 갚기가 어려운 형편인즉 장차 삼천리강토는 우리나라의 소유도, 우리 국민의 소유도 되지 못할 것이라 ….(중략)” -<국채 1,300만 원 보상취지 中>

대구에 가면 꼭 들러보아야 할 ‘대구 근대 골목’은 시간이 멈춘 듯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민족시인 이상화 고택에서 조금만 발걸음을 옮기면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인 서상돈 고택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고택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서상돈 선생의 얼굴이 모자이크 기법의 벽화로 새겨져 있어 설레는 마음을 한껏 돋운다.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고 도착한 곳에는 수많은 보부상을 거느렸던 대상인의 집이라기엔 소담스러운 모습의 목조 건물이 눈앞에 나타난다. 선생이 지금이라도 어서 들어오라며 반색하는 듯한 자연스러운 모습의 고택이 방문객을 반기고 있다. 대구시는 나라의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놓았던 서상돈 선생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이상화 고택 옆에 있던 선생의 생가를 복원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국채보상운동 기념관을 세우기도 했다.

보부상이었던 청년, 대상인이 되다

1850년 10월 17일, 독실한 천주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서상돈 선생은 경북 김천군이 고향이지만 천주교 박해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빈번하게 이사를 다녀야만 했다. 그러다 대구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선생이 9세가 되던 해였다. 부친이 사망하자 외조부가 있던 대구로 이사를 오게 된다. 어려웠던 집안 사정으로 인해 선생은 어린 나이서부터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기 위해 일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 상점의 심부름꾼으로 고용된 것이 대구를 대표하는 경제인의 시작점이었다. 18세에는 이미 자신만의 독립적인 보부상을 운영해 소금, 건어물 등을 판매하기도 했다. 성실함을 무기 삼아 점점 사업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활동 영역도 점차 넓어져서 대구뿐만 아니라 부산에서 안동까지의 800리 정도의 낙동강을 자신의 무대로 만들어 나갔다. 취급 물품도 소금과 건어물에서 쌀과 베, 기름, 창호지 등으로 다양해졌다. 이렇게 차근차근 자신의 능력을 펼쳐 가던 선생은 35세에 수많은 보부상을 거느린 대상인의 위치에 올라서게 된다.  
경제활동뿐만 아니라 서상돈 선생은 교육 활동에도 관심이 많았다. 근대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달은 선생은 대구 등지에 학당을 설립할 때 재정적인 지원과 학교 운영에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여성의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1905년에 설립된 달서여학교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달서여학교는 1909년에 정식 사립학교로 인가를 받았으며, 부인야학회를 운영하는 등 대구를 대표하는 여학교로 발전해 나갔다.

▲ 사진 이상화기념사업회 제공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

1904년 조선은 일본이 조선을 속국으로 삼기 위해 고문을 파견해 다스리던 고문정치가 진행되고 있었다.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또한 파탄에 빠트려 예속시키기 위해 조선의 정부로 하여금 일본의 차관을 도입해 많은 빚을 지게 했다. 이로 인해 1907년 조선 정부가 짊어진 외채는 1,300만 원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서상돈 선생은 일본에게 진 빚 때문에 국권을 상실했다고 보고 나라의 빚을 갚아 주권을 수호하자는 취지의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자고 주장한다. 김광제와 박해령을 비롯한 16명이 모여 국채보상 취지서를 작성해 발표하고 국채보상 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었다. 이렇게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곧바로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전국적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언론의 역할이 컸다. <황성신문>은 ‘단연보국채’라는 논설을 통해 국채보상운동을 국민의 의무 사항이라고 규정짓기도 했다.
국채보상운동은 양반이나 부유층뿐만 아니라 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여성까지 국민의 모든 계층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이중에서도 여성은 특히 더 큰 참여율을 보였다. 반찬값을 절약하거나 은장도나 비녀 등의 패물을 아끼지 않고 내놓았다. 기생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진주애국부인회를 결성해 국가의 주권을 수호하는 데 한몫을 보태기도 했다. 국채보상운동의 열기는 해외에까지 전파되어 유학생들도 모금 운동에 동참했다.
범국민적인 국채보상운동의 열기에 긴장한 일본은 이 운동을 적극적으로 나서 탄압하기에 이르렀다. 국채보상기성회의 간부였던 양기탁을 누명을 씌워 구속시키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해 방해했으며, 이로 인해 국채보상운동은 안타깝게 더 이상의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좌절되었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과 기념공원까지

국채보상운동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서상돈 고택 말고도 몇 곳이 더 있다. 이왕 나선길이라면 함께 둘러볼 것을 추천한다. 서상돈 고택과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에 국채보상운동 기념관과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이 위치해있다. 국채보상운동 기념관은 국채보상운동의 자료를 한곳에 모아놓은 곳으로 시작과 확산, 그리고 끝까지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어 좋은 교육의 장이 되어 준다. 기념관을 나서면 녹음이 푸르게 우거져 있는데, 대구 시민의 쉼터가 되어 주는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이다. 이곳에는 넓은 잔디광장과 천여 그루의 수목이 심어져 있어 잠시 쉬어가기 안성맞춤이다. 공원 내에는 국채보상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국채보상운동 여성기념비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기념비에는 ‘우리가 함께 여자 몸으로~’로 시작되는 남일동 폐물폐지부인회의 <경고 아 부인동포라>라는 격문과 함께 전국 28개 여성 국채보상운동 단체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비녀와 반지 등의 패물을 나라를 위해 기꺼이 헌납했던 여성들의 애국심을 기리고자 쌍가락지 형상으로 제작된 것이 특징이다.
 

[Queen 유화미 기자]

*관람 정보
-서상돈 고택
주소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6-1
관람 시간 10:00~17:30
휴무 매주 월요일, 공휴일, 명절 연휴

-국채보상운동 기념관
주소 대구광역시 중구 국채보상로 670
관람 시간 9:00~18:00
입장료 무료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명절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
주소 대구시 중구 동인동 2가 42번지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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