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19 19:10 (화)
 실시간뉴스
아카키코 전미자 사장의 성공 비결, 동양의 맛으로 유럽인의 입맛을 사로잡다
아카키코 전미자 사장의 성공 비결, 동양의 맛으로 유럽인의 입맛을 사로잡다
  • 김은정 기자
  • 승인 2017.08.04 07: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카키코 앞에 선 전미자 사장.

빈의 작은 채소 가게에서 시작해 오스트리아 최대 외식업체 아카키코를 세운 한국인 전미자 사장. 20대 꽃다운 나이에 빈에 건너와 오스트리아 여성 경제인 10인 안에 들기까지 그녀가 걸어온 남다른 성공의 길을 들어 보았다.

취재 김은정 기자 | 사진 장진이

오스트리아 최대 외식업체 아카키코

빈의 가장 번화한 거리인 슈테판성당 근처의 아카키코 매장. 초록색과 빨간색이 조화된 깔끔하고 예쁜 인테리어의 매장에 전미자 사장이 들어서는 순간 스타일리쉬한 그녀의 모습이 눈에 확 띄었다. 사업하랴 강연하랴 사회 공헌 활동하랴 늘 바쁜 그녀의 스케줄 속에 어렵사리 뚫고 들어갔지만 멀리 한국에서 온 기자를 푸근한 언니처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연매출 300억, 17개의 매장, 직원 수 300여 명. 오스트리아 최대 외식업체로 우뚝 선 아카키코. 먼저 그 시작은 어떻게 비롯됐는지 궁금했다.
“1994년도에 처음 한 상가 건물에서 조그맣게 시작했어요. 처음에 스시로 아이템을 잡았는데 사실 오스트리아인들은 생선회를 안 먹거든요. 그래서 모험이기도 했지만 가게 오픈 첫날부터 손님이 막 밀려드는 거예요. 가게 오픈 전부터 맛보기로 스시와 장국 등 음식을 무료로 제공한 것이 효과가 있었나 봐요.”

내륙에 자리 잡고 있는 나라여서 오스트리아인들에겐 생선회로 만든 스시는 낯설었다. 하지만 결과는 대박. 지금은 가장 싱싱한 생선회를 먹으려면 아카키코로 가야 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오스트리아인들에게 사랑받는 외식 업체가 되었다.

아카키코는 처음엔 스시를 비롯해 한국의 덮밥, 불고기, 해물라면, 우동 등 일본과 한국의 퓨전 음식을 주 메뉴로 한다. 2000년부터는 오스트리아에선 생소한 배달 서비스를 시작해 더욱 영역을 확대해 가고 있다.

“처음에 배달 서비스를 하기 전 미리 예행연습을 6개월간 했어요. 장국이 식지 않으려면 최소 몇 분 안에 도착해야 하는지 스시의 신선도를 유지하려면 어떻게 담아 배달하는 게 좋을지 수많은 연구와 시행착오 끝에 배달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이제는 배달 서비스가 안정되었고, 오스트리아인들에게도 음식을 배달해 주는 것이 하나의 문화로 자립 잡게 되었다.

그녀만의 성공 비결

아카키코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원인을 꼽으라면 전 사장은 단연코 직원들을 가장 소중한 고객으로 섬겨왔기 때문이란다.
“우리 직원들도 거의 아시아인들인데 그들도 나처럼 외국에 와 타향살이를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다독여 주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어요. 그랬더니 직원들도 마음을 열고 직장에서의 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고 열심히 하더라고요.”
전 사장이 직원들에게 특히 강조한 것은 손님에게 나가는 음식은 내 가족이 먹는다 생각하고 정성을 다하라고 한 것. 자신의 직장에 만족한 직원들은 당연히 그 말을 실천했고 그것은 고객 만족으로 이어졌다.

그런 직원들에게 전 사장은 더욱 감사한 마음이 들었고, 그것은 직원들에 대한 복지 혜택으로 이어졌다.
“한 배를 탄 가족이기에 직원들에게 뭐라도 하나 더 챙겨 줄 것이 없나 늘 생각합니다. 그래서 직원들의 각종 복지에 나가는 비용은 아끼지 않고 쓰지요. 그리고 직원들에게 비전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에는 처음엔 청소부로 들어와 지금은 일류 요리사가 된 직원들도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모든 직원들을 동등하게 대한다고 한다. 물론 경력에 따라 일의 성격에 따라 임금의 차이는 있지만 직원들을 모두 소중한 인격체로 보고 동등하게 대하는 것이 그녀의 철칙이란다. 
 

▲ 비엔나의 아카키코 매장 전경(좌)과 내부(중), 메뉴들(우).


아카키코의 또 하나 성공 원인은 최상의 재료를 쓴다는 것이다.
“장사를 해 보니까요 재료를 아낀다고 돈 버는 거 절대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최상의 재료를 쓰니까 손님들이 먼저 알아주고 더 찾아주더라고요. 우린 쌀도 가장 비싼 쌀을 쓰고 그 밖에 채소와 고기도 가장 신선한 것으로 씁니다. 재료가 좋아야 맛도 나는 법이거든요.”
외식업을 하다 보면 이윤을 남기기 위해 재료 비용부터 절감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 사장은 그것은 틀린 생각이라고 한다. 

아카키코에 이어 전 사장은 비엔나에 2015년 ‘요리’라는 한식당을 열었다. 아카키코가 아시안 퓨전 요리라면 ‘요리’는 정통 한식당이다.
오스트리아의 많은 한국 교민들이 제대로 만든 정통 한식을 먹고 싶다며 전 사장이 그 역할을 해 주기를 끊임없이 요구해 결국 2년 전 정통 한식당을 열게 된 것이다. ‘요리’에서는 불고기, 너비아니, 갈비, 된장찌개, 궁중 떡볶이, 잡채  등 한식의 맛을 그대로 재현해 손님들에게 내놓고 있다.  퓨전이 아닌데도 유럽인들도 좋아해 식사 시간에는 예약 없인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만석이다. 정치인, 경제인, 연예인 등 오스트리아를 찾는 한국의 유명 인사들에게도 ‘요리’는 필수 코스가 되었다.   

아카키코에 이어 ‘요리’까지 성공을 이어 간 비결 중 하나는 안주하지 않고 늘 변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란다.
“우리는 3개월마다 한 번씩 회의를 거쳐 신 메뉴를 내놓아요. 빈은 특히 외국 관광객들이 많은데, 그들의 다양한 입맛을 만족시키려면 늘 연구를 해야 하죠. 심지어 매장의 인테리어와 디자인, 로고와 유니폼 등도 고정적이지 않고 3, 4년마다 변화를 주고 있답니다.”

이렇듯 성공적으로 사업을 펼쳐 왔지만 그녀라고 늘 승승장구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2008년 유럽 경제 위기 상황에 매출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히로시마 원전 사고 때는 생선에 대한 인식이 나빠진데다 스시이다 보니 일본 음식이라는 이미지가 강해 손님들이 확 줄어 고전했다고. 하지만 그럴수록 실망하지 않고 더욱 집중하자는 마음으로 직원들과 단결해 어려움을 이겨 냈다고 한다.

성실함과 친화력으로 인정받은 동양에서 온 여인
 

▲ 전미자 사장.


전북 부안에서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전미자 사장은 처음엔 간호사 자격증 하나 달랑 들고 온 20대의 아가씨였다. 약혼자가 유학생이어서 빈에 오게 됐고 3, 4년쯤 후엔 돌아가리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오스트리아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처음엔 간호사로 일하며 병원에서 노인들을 성심성의껏 간호했고, 그후 빈의 나슈마르크트 시장에서 작은 채소 가게를 운영했다.

그때  당시만 해도 동양인을 잘 볼 수 없던 때였는데 시장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장사도 열정적으로 잘 해 시장 사람들로부터 동양에서 온 여자가 참 열심히 한다고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넷째 아이를 낳고 4개월밖에 안됐을 때 몸조리도 채 못한 상태에서 지금의 아카키코를 시작하게 됐다.
“아이 젖먹여 가며 장사 준비하랴 정말 그때는 힘들었어요. 하지만 더 미룰 수 없었던 것이 딱 목이 좋은 상가 건물에 점포가 났는데 그 자리를 놓치면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미룰 수가 없어 젖몸살을 앓아가면서도 식당을 열었었죠.”

먼 타지에서 간호사 자격증 하나 들고 온 20대의 아가씨는 이제 오스트리아 여성 경제인 10인 안에 들만큼 성공한 사업가이자 여성 리더로 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조카들도 그녀를 따라  오스트리아로 건너와 정착해 오스트리아 최대 한인 가문을 이루게 되었다.

기자가 인터뷰를 한 다음날 저녁 그녀는 오스트리아에서 소위 잘 나가는 여성 리더들 앞에서 강연을 하기로 되어 있어 찾아가 보았다. 오스트리아 기업, 사회단체 등에서 리더 격인 여성들 앞에서 전미자 사장은 자신의 인생과 성공 스토리에 대해 강연했다. 강연을 듣는 여성 리더들의 눈빛은 진지했고 강연이 끝나자 파란 눈의 유럽 여성들이 모두 기립해 한국인 여성 CEO를 향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는 모습은 실로 감동적이었다.

전미자 사장이 존경받는 이유는 그가 단지 성공한 사업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에 정착한 한인들을 위한 각종 문화와 사회사업에도 후원을 하는 등 큰 공헌을 하고 있다.
초대 비엔나 한인문화회관 관장을 수년간 맡아 왔으며, 한인 여성들로 이루어진 합창단의 단장을 맡는 등 사회 문화 활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2007년 하인츠 핏셔 오스트리아 대통령의 한국 순방과 2015년 로마 교황청 방문단에도 동행하는 등 그녀의 존재감을 확고히 인정받으며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어머니에게서 배운 따뜻한 정이 그녀의 자양분

그녀가 이런 성공을 이룬 데에는 어릴 적 넉넉한 인심으로 사람들을 대하며 덕을 쌓았던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
“지금도 어머니를 떠올리면 국밥의 국물 냄새와 양파 냄새가 나는 듯해요. 가난한 시절에 배고픈 사람들이 많던 그때에 어머니는 국밥집을 하시며 어려운 사람들에게 정말 인정을 많이 베푸셨어요. 사과를 하나 줘도 정성껏 닦아서 주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겐 아끼지 않고 베푸셨죠.” 
전 사장이 직원들이나 고객들에게 결코 인색하지 않고 넉넉한 인정을 베풀고 또 사회 공헌 활동에도 아낌없는 후원을 하며 살아온 것은 어릴 적부터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배워 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녀 또한 네 명의 자녀들을 양육하며 항상 강조한 것이 첫째가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지 마라’였단다. 그리고 항상 정직하게 살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어린 자녀들을 키우며 사업도 일구어 가며 늘 바쁜 그녀였지만 항상 자녀들의 교육에는 원리원칙을 가지고 키웠고, 그 결과 지금은 자녀들이 장성해 어머니의 사업을 도와주는 든든한 역할을 하고 있다.   

“저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아이들 앞에선 내색을 하지 않았어요. 엄마의 슬픈 모습은 아이들에게도 그늘이 될 수 있으니까요. 특히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는 항상 웃으며 아이들을 학교로 보냈어요.”

그녀라고 왜 인생에 힘든 시기가 없었을까?  낯선 땅에서 사업을 개척해 나가며 그녀는 남편과의 이혼을 겪는 등 우여곡절도 있었다. 하지만 특유의 긍정적인 마인드로 항상 밝고 즐겁게 살아온 결과 그녀는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해 주는 사업가가 되었다. 
“모든 일에 거짓 없이 성실하게 했더니 이 나라에서도 그것이 통한 것 같아요.”
오스트리아는 물론 유럽에서도 성공한 사업가로 꼽히는 전미자 사장. 그녀는 진정한 글로벌 퀸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