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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진실 규명의 숨은 조력자, 윤장현 광주광역시장
5·18 진실 규명의 숨은 조력자, 윤장현 광주광역시장
  • 백준상 기자
  • 승인 2017.09.27 17: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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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헬기 기총소사와 전투기의 공대지 폭탄 장착이 사실로 드러남에 따라 5·18 진실규명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드높다. 광주 역사 바로 세우기와 광주정신의 세계화를 추진하고 있는 광주광역시 윤장현 시장을 만나 5·18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들었다.
취재 백준상 기자 | 사진 매거진플러스

“공군 전투기들이 공대지 폭탄을 장착하고 광주 출격을 대기했다는 것은 당시 신군부가 광주를 적국의 적지로 보았다는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에 국민이라면 모두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새 정부가 국방부를 중심으로 5·18 진실규명에 적극 나서고 있는 가운데 윤장현 광주광역시장이 정계에서 5·18 진실규명을 제대로 해줄 것을 촉구했다. 그는 좀 더 명확한 진상규명을 위해서는 조사권과 기소권이 포함된 ‘5·18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하여 독립적이고 광범위한 조사가 진행될 수 있길 바랐다.

5·18 진실규명은 시대적 사명
지금의 범국가적 5·18 진실규명 국면은 윤 시장의 광주의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강한 의지와 더불어 관련사실 제공이 있어서 가능했다.
윤 시장은 지난해 12월 문화복합공간으로 리모델링 중이던 전일빌딩을 직접 방문해 총기 탄흔을 확인하고 바로 국과수에 감식을 의뢰했다. 그리고 전문가를 중심으로 5·18진실규명지원단을 새로 꾸려 증거 수집과 분석을 추진했다.

지원단은 3개월 동안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군 관련 문서와 검찰 수사기록, 군 출신인사, 목격자 탐문 등을 통해 조사한 결과 전일빌딩에 대한 헬기 사격이 신군부의 사전기획에 의해 자행됐음을 밝혀냈다. 윤 시장은 대선 기간 각 당 후보들을 전일빌딩 현장으로 안내해 발포명령자 등 진실규명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요구했고 결국에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로 반영시켰다.

윤 시장은 “5·18 관련 진실은 광주시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시대가 역사에서 끌어내 불러온 것으로 우리들을 깨어있게 한다”면서 “새 정부의 진실규명 의지가 강력하고 관련사실이 확보되어 있는 만큼 그 결과가 기대되고, 진실규명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윤장현 시장은 지난 여름 흥행몰이를 했던 영화 ‘택시운전사’에 등장하는 브리사 택시 옆에서 사진을 찍을 정도로 5·18 진실규명에 지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광주광역시청 로비에는 시민들의 뜨거운 성원으로, 어렵게 구해온 브리사 택시가 연장 전시되고 있었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존인물인 김사복이라는 이름은 1997년 발간된 ‘5·18 특파원 리포트’(풀빛신서)라는 책에서 독일기자 힌츠페터가 처음으로 언급했다. 참고로 김사복 씨는 영화에서와는 달리 실제로는 호텔의 외국인 투숙객을 위한 택시 일을 했다고 한다.

1997년 인권운동을 펼쳤던 윤 시장 등은 80년 5월 윤상원 열사의 마지막 기자회견에 있었던 내외신 기자들을 수소문해 17년 만에 다시 광주로 결집시켰고, 저널리스트가 아닌 개인으로서 5·18에 대한 체험록을 써달라고 부탁해서 탄생한 책이 바로 5·18 특파원 리포트다.

윤시장은 이밖에도 인권운동을 하며 쌓아 온 경험과 친분을 활용해서 팀 셔록 기자의 체로키 파일 분석, 1995년 전두환을 구속 수사했던 최환 변호사 진술, 유엔본부 5월 민주화운동 국제심포지엄, 5·18 당시 광주를 취재했던 앤더슨 AP통신 기자 진술 등을 통해 국가 차원의 5·18 진실규명이 절실함을 알려왔다.

아시아 인권운동가 서유진 선생과 함께 여전히 왜곡과 폄훼, 소외와 차별로 고통 받는 광주를 어떻게 살려볼까 고민하다가 5·18의 전국화, 세계화를 시작, 5·18은 37년 전 광주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6월 혁명, 촛불시민혁명의 역동적인 에너지로 승화되었다. 광주는 6백여 개 마을공동체가 활성화된 가운데, 시민총회를 통해 광주정책을 제안하고 토론하고 결정해 가는 직접 참여 민주주의의 전국모델을 만들어 가고 있으며, 네팔 캄보디아 등에 세운 광주진료소를 통해 그들과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연대와 나눔의 공동체로 거듭나며 5·18을 세계화하고 있다.

광주정신을 광주형 일자리로 이어가
5·18 광주정신은 광주시의 핵심정책 중 하나인 광주형 일자리를 통해서도 구체화 되고 있다. 미래 먹거리를 위한 광주형 일자리는 고용절벽, 청년실업에서 대한민국을 구해낼 대안으로 새 정부 국정과제에 광주형 일자리 모델 확산이 반영되었을 정도이다.

광주형 일자리는 사회 구성원의 참여와 합의를 통해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자는 ‘일자리 민주화’ 정책이다. 이는 단지 일자리 개수를 늘리는데 그치지 않고 시대적 과제인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해소함으로써 경제적 민주화를 이루고자 하는 광주정신의 실현인 것이다.

핵심은 노사민정이 양보와 타협을 통해 연봉 4천만 원 정도의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서 해외로 나가는 기업들을 돌아오게 하는 산업 생태계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광주시는 최저임금의 130%를 보장하는 생활임금제 시행에 이어 지난 6월 노사와 시민단체 등 22개 기관·단체가 광주형 일자리 모델의 핵심 과제 실현을 위한 기초협약을 맺었다. 기초협약에는 적정 임금 및 근로시간 실현, 노사책임경영 구현, 원·하청 관계개선 등을 담았다.

광주시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신념으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정책을 시행, 지난 2015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본청과 출자출연 기관의 간접고용 노동자 772명을 직접고용으로 전환했다. 이어 올 연말까지 직접 고용자 대부분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할 예정이다. 광주가 시작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새 정부의 공공기관과 기업으로 계속 확산되고 있다.

“대내외적으로 한국경제의 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생산방식의 혁신 없이는 한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광주형 일자리를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노사문제를 제대로 푼 독일의 슈투트가르트는 번성한 반면 이에 실패한 미국의 디트로이트는 몰락하지 않았습니까. 도시의 지속 가능을 위해 사회통합형 일자리에 대한 합의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입니다.”

광주형 일자리의 바탕에는 헌혈과 주먹밥으로 모든 시민이 하나 되었던 80년 5월 광주정신이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연대 그리고 나눔과 공동체라는 광주정신으로 광주형 일자리의 미래는 밝아 보인다.

“광주형 일자리는 도시 쇠락의 절박함을 담고 있다”고 토로한 윤 시장은 “광주에서 비롯된 공동체의식이 정치적 민주화를 불러왔듯 경제적 민주화도 불러올 거라는 확신이 있다”고 말했다.

윤 시장은 4차 산업 혁명 시대를 맞아 친환경자동차, 에너지, 문화콘텐츠융합 등 3대 밸리를 광주의 미래를 열어갈 핵심사업으로 야심차게 준비해 가고 있다.

우선 친환경 자동차산업 육성을 위해 2021년까지 3,030억 원을 투입해 123만평 규모의 빛그린국가산단을 자동차 전용산단으로 조성해 가고 있다. 또한 새 정부 국정과제로 채택된 미래형 전장부품산업 생산기반과 자율주행 커넥티드 자동차 부품산업 육성 기반 조성을 통해 자동차산업밸리의 완성도를 높일 계획이다.

특히 완성차와 부품기업을 집적화하고 노사파트너십 형성과 적정임금을 통해 기업하기 좋은 여건 조성과 사회통합형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광주형 일자리 모델’을 적용하는 등 노사상생형 산업생태계를 조성키로 했다.

30여년 간 시민사회운동에 투신
윤장현 시장은 안과의사를 하며 30여 년간 인권, 환경, 노사, 통일 등 시민사회운동에 전념해왔다. 3년 전 민선 6기 시장직에 당선돼 민생현장을 찾아 소통하고 대화하면서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공감정책들을 펼쳐오고 있다.

공직자의 길로 들어서기 전에는 의사로, 시민사회운동가로도 유명했다. 부친은 화순군수, 나주시장, 광주부시장 등을 역임한 윤지혁 씨. 고등학교 때의 꿈은 날카로운 지성으로 시대정신을 밝히는 신문 칼럼니스트였지만, 재수를 하며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체 게바라 같은 의사가 되기로 했다고 한다.

대학시절에는 검정색 물을 들인 야상 하나로 1년을 버티는 괴짜 의대생으로, 군부 독재 폭압정치에 맞서 학생운동을 시작하고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되기도 했다. 대학생 때부터의 사회적 관심은 학생운동에 이어 재야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으며, 1987년 6월 항쟁이 끝나고 직선제 개헌을 이룬 뒤에는 재야운동에서 시민사회운동으로 옮겨갔다. 1989년 7월 영광원전에서 근무하는 경비원 부인이 무뇌아를 두 번이나 사산했다는 충격적인 보도를 읽고 시민사회운동에 천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20대 후반까지 연애다운 연애를 한 적이 없이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몇 차례 선을 본 끝에 지금의 부인인 손화정 여사를 만났다고 한다. 손 여사는 강진의 주조장 딸인데 신혼시절 ‘감옥에서 나온 후배들이 집에 떼거지로 와있어서 힘들다’며 투정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래서 아내에게 무뚝뚝하게 “너희 집에 가서 좀 더 살고 와라”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미안하게 느껴져 아내에게 신앙을 선물하기로 하고 어렸을 적부터의 신앙인 기독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윤 시장은 그 후 전남사회연구회를 만들고, 환경운동단체 등 광주의 다양한 시민단체들과 연대해 시민들의 삶의 문제에 집중했다. 광주국제교류센터, 아시아인권위원회, 광주·전남 남북교류협력협의회, 아름다운 가게, 한국 YMCA 전국연맹 이사장 등 시민운동의 범위를 인권, 남북문제, 청소년 등으로 확장했다. 안과의사 일을 하며 시간을 쪼개어 시민활동을 했지만 그는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인생의 전환점인 시장직 출마는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본적지를 호남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하는 어른들의 고민을 듣게 되면서 결심하게 되었다고 했다. “정치적 소외와 경제적 낙후 때문에 일자리가 없어 고향을 떠나는 가슴 아픈 일을 없애고, 젊은이들의 재능이 열매를 맺을 수 있고 꿈꾸는 미래가 실현될 수 있는 광주를 만들어 보고자 시장으로 나서게 되었다”는 출사표를 밝힌 바 있다.

 

[Queen 백준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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