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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 여성 산악인 남난희 씨가 된장녀(?) 된 사연
전설적 여성 산악인 남난희 씨가 된장녀(?) 된 사연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8.02.13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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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제 삶은 산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과정이었나 봅니다”

지리산이 흰옷을 입었다.겨울이면 지리산은 제 속살이 드러난다.화장기조차 없는 순수한 자연.화개를 넘어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서는 중턱쯤에 남난희 씨가 살고 있다. 산골에서 살아가는 여느 아낙처럼 일상의 삶속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면 그녀의 화려했던 이력이 도무지 연상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산악인들에게는 전설이었다. 그녀의 이력에는 항상 최초라는 말이 붙었다. 혹한에 눈보라를 헤치고 백두대간을 76일 동안 단독 종주했고, 여성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 봉(7,454m)에 우뚝 서기도 했다. 무서울 것이 없었다. 1991년 겨울에는 ‘금녀의 벽’이라고 불리는 설악산 토왕산 폭포 빙벽 등반에도 성공했다. 그녀의 눈은 항상 정상에 머물러 있었다. 그야말로 산에 미쳐서 살았던 세월. 산에 미쳐서 살았던 젊은 시절의 나날 “우리 집은 시골 동네 산 중턱에 있었어요. 산을 통해야만 집으로 오고 갈 수 있었습니다. 처음 산을 접한 것은 동네 뒷산이었죠. 그 시절 내게 산을 오르는 것은 등산이 아니라 놀이였습니다. 숨바꼭질을 하거나 나무를 하러 가는 등 생활이 곧 산이었죠.
”오히려 등산이라는 이름을 접한 것은 도시에 와서였다. 회사 동료들과 야유회 비슷하게 산을 오르며 산과 그녀 사이에 무언가 특별한 인연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온통 훔쳐간 첫 번째 산은 도봉산이었다. 산을 가까이하면서, 늘 등산을 하면서도 산이 그립고, 그리움이 깊을수록 갈증도 심해져갔다. 마치 짝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해갈할 수 없는 산에 대한 사랑 때문에 본격적으로 암벽 등반을 배우고 한국등산학교에 입교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정신 없이 산에 빠질수록 마음은 항상 극도의 허무감이 몰려오는 것이었다. 허무감의 끝은 죽음이었다. 철저히 혼자이고 싶어서 ‘죽음의 대리선택'으로 백두대간을 단독 등반했다. 그렇게 산을 오르다 산에게 버림을 받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산으로 가는 과정이 너무나 힘들었다.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하고 때로 돈이 그녀를 속이기도 했다. 상처가 너무 커서 그녀는 서울이라는 도시를 떠났다. 지리산 자락 청학동에 기거하며 제2의 인생을 살았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며 더 이루겠다는 욕심이 조금씩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2000년에는 강원도 정선으로 삶터를 옮겼다. 특별한 인연이나 연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마음이 시켜서 들어간 곳이었다. 정선자연학교를 운영하며 오랜만에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농사를 지으며 장터를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수려한 경치에 취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아직도 정선에서의 일들이 오롯하게 떠올라요. 강가에 피어나는 올동박이, 정겨운 오일장 풍경이며 물동이 장구에 맞춰 찢어질 듯 고음으로 부르는 아라리, 막국수와 콧등치기 국수, 감자 옹심이, 막 나와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와 메밀묵의 향기가 아직도 은은하게 남아 있어요.”태풍 루사로 인해 비록 삼 년을 못 넘겼지만 인생에서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풍비박산이라는 말이 가장 정확할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예전 한창 산을 오르던 시절 찍어두었던 사진도 아이의 어릴 적 사진도 그리고 지인들이 선물해준 것도 순식간에 물속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빈손이 된 채 그녀는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스님이 되어버린 전 남편과의 인연

산꼭대기에 작은 집 한 채. 천주교 수사가 직접 지었다는 앙증맞고 야무진 집이 그녀의 거처가 되었다. 지붕, 문짝, 창문, 툇마루 하나하나가 그냥 예술이었다. 그 수사는 집을 그렇게 예술로 만들어놓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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