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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힘이 불러온 기적’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희아
‘사랑의 힘이 불러온 기적’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희아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8.07.10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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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힘이 불러온 기적’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희아 & 어머니 우갑선 씨 母女 화보 인터뷰
 
그녀는 무척 밝았다. 이희아라는 이름 대신 늘 ‘희아’로만 불리다 보니 사람들은 종종 잊곤 한다.
그녀가 벌써 스물넷의 꽃다운 처녀라는 것을. 1999년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후 10년 가까운 세월이 훌쩍 지났다. 그 시간 동안 모녀는 수많은 곳에서 감동의 연주회를 열면서 음악의 우물을 깊이 파왔다. 그리고 모녀의 이야기는 곧 스크린으로 옮겨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으로 다가올 준비를 하고 있다.
 
취재_ 김은희 기자 사진_ 박건상 기자
 

“장애인이라고 사랑을 받기만 하지는 않겠어요.

사랑을 나눠주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요”

#음악은 나의 운명
희아는 한국은 물론 미국, 영국, 일본,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전 세계를 누비며 공연을 하는 스타다. 특히 일본과 인도네시아에서는 그녀의 삶을 다룬 책이 출간되어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희아는 수 이해력이 제로에 가까웠고, 네 손가락 중 관절이 있는 손가락은 하나밖에 없었다. 어머니 우갑선 씨는 희아가 손가락의 힘을 기르면서 지능을 계발해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다가 피아노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희아를 가르치려 하는 교사는 아무도 없었다. 희아를 받아주겠다고 하는 학원을 찾기까지 6개월이 걸렸고, 스스로 악보를 보지 못하는 희아를 위해 어머니는 피아노를 독학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희아도 여섯 살 때 처음 피아노를 배우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전자 키보드로 배웠는데 ‘아휴, 신기한 소리가 나는 악기다’ 하고 좋아했죠. 전자 키보드에서는 여러 가지 소리가 나니까 그 재미에 이끌려 건반을 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한 손씩 할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두 손을 함께 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이해가 안 돼서 고생했는데, 그때 엄마가 모질게 하셨죠.”
어머니는 혹독했다. 장애아를 둔 부모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에서 “과잉보호는 학대보다 나쁘다”라는 말을 듣고 크게 동감했던 희아 어머니는 양손으로 피아노를 치지 못하는 딸에게 가혹하리 만큼 피아노 훈련을 시켰다. 어릴 때부터 늘 음악을 듣고, 전래동화를 들으며 자란 희아는 청음능력이 뛰어난 편. 그래서인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조금씩 피아노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한때는 피아노가 지긋지긋할 만큼 싫은 적도 있었다. 끊임없는 연습에 한계가 왔던 적도 있다. 하지만 희아는 이제 더 이상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피아노가 있었기에 지금의 이 모든 것이 이뤄졌음을 알기 때문이다. 피아노는 늘 연인 같고 친구 같다.
“희아하고 대판 싸운 적도 많죠. 희아가 고집불통, 황소고집이거든요. 함께 연주했던 일본의 유부남 음악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지나쳤을 때도 싸웠고, 피아노 연습 때문에도 싸우고, 공연 일정 때문에도 다투고.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희아가 워낙 맑은 어린아이의 순수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당시 제 눈에는 어리석어 보였던 일인데 나중에는 제가 반성해야 할 경우도 있더라고요.”
희아 어머니 우갑선 씨. 네 손가락을 가진 희아가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기적의 피아니스트가 되기까지 때로는 혹독하게 때로는 다정하게 옆에서 딸을 가르쳤다. 우갑선 씨에게 희아는 그녀가 선택한 ‘운명’이다.
우갑선 씨는 자신의 에세이집 ‘신이 준 손가락’(미래인)에서 담담하게 희아를 낳기까지의 과정을 털어놓았다. 원호병원(현재 보훈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그녀는 하반신 불구의 상이군인 남편을 만났다. 결혼 후에도 간호사 일로 정신없이 바빴던 우씨는 임신인 줄 모르고 감기약과 멀미약을 계속 복용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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