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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 심상정 대표와 솔직 담백한 토크
진보신당 심상정 대표와 솔직 담백한 토크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8.11.12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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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 심상정 대표와 솔직 담백한 토크

행운처럼 찾아온 남편,
애틋함이 사무치는 아들 그리고 나의 신념

진보신당 심상정 공동대표. 언론에서 비친 그이의 모습은 강하고 차가우며 딱딱했다. 그러나 직접 만난 그이는 푸근한 어머니 같기도 하고 털털한 이웃 아주머니 같기도 했다. 그이가 자신의 신념과 가족사에 대해 스스럼없이 입을 열었다. 하이힐을 신은 얼치기 운동권 학생시절부터 진보의 핵심 인물이 되기까지 풀 스토리.


취재_ 이시종 기자 사진_ 양우영 기자

“철의 여인보다는 당당한 아름다움으로
기억되는 사람이고 싶다

진보신당 심상정 공동대표. 사람들은 그이의 이름 앞에 ‘철의 여인’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그이를 차갑고 투철한 이념 지향형의 인물로만 본다. ‘얼마나 강한 이념의 소유자였으면 그 험한 노동운동을 25년이나 할 수 있었을까’ 하는 거다. 취재진의 생각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이는 왠지 유머감각이 없을 것 같고, 왠지 엄격할 것 같고, 왠지 진지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런 선입견이 깨지는 데는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이는 유머감각도 있었고 지나치게 엄격하지도 않았으며 가벼운 농담도 스스럼없이 하는 옆집 아주머니 같은 사람이었다. 그이는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자신의 신념, 그리고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 담백하게 풀어냈다.

얼치기 운동권에서 진보의 핵심으로
그이는 국회의원이 된 후, 기자들에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얼마나 이념이 투철하면 25년 동안 험한 노동운동을 계속해올 수 있었느냐”라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내가 특별히 이념이 강해서가 아니다”라는 말부터 꺼냈다고 한다.
“좋아하는 남학생 따라 운동을 시작하게 됐어요(웃음). 제가 재수를 했거든요. 대학에 처음 들어가서 아주 소박한 꿈이 있었어요. 바로 연애를 실컷 해봐야겠다는 것이었죠. 그 당시에는 제가 멋도 좀 부렸어요. 긴 생머리에 7센티미터 이하짜리 구두는 신지도 않았으니까요. 언니가 미대를 다녀서 멋쟁이였는데, 그런 언니의 영향 때문에 저도 멋 꾀나 부렸었죠. 대학생은 그렇게 하는 건 줄 알았어요. 운동엔 관심도 없었는데, 맘에 드는 남학생들, 사귀어보고 싶은 남학생들이 죄다 운동권이더라고요(웃음).”
그이는 마음에 드는 남학생에게 잘 보이려고 하이힐을 신고 시위대에 참가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학교에서는 시위 대열을 촬영해 ‘사진 채증’을 한 뒤 연말에 관련 학생을 지도했는데 시위 장면에 그이의 모습이 찍혀 학생처장에게 불려간 적이 있었다. 학생처장이 그이와 사진을 번갈아 보더니, “자네, 혹시 운동권 애인 뒀나”라고 묻는 것이었다. 그이는 “그 사건이 무기정학 감이었는데, 미인계 덕분인지 근신 정도로 끝났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불순한(?)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그이는 점점 학생운동에 빠지게 됐고, 옷차림도 점점 ‘운동권 표준형’으로 바뀌게 됐다고. 그이가 노동운동에 일생을 걸겠다고 생각한 것은 대학 때 했던 공활을 통해서다.
“학교 다닐 때 전태일 평전을 상당히 감명 깊게 봤어요. 지금은 농활이 있지만 그때는 공활이 있었거든요. 당시에는 공장 노동자들이 TV 드라마 같은 데서도 ‘공돌이’, ‘공순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사회적으로 하대받는 위치에 있었어요. 그래서 직접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구로공단 피복 공장에 취직을 했죠. 가보니 1970년대 전태일이 겪었던 모습 그대로더라고요. 여덟 시간은커녕 열두 시간 작업을 밥 먹듯 했고, 졸음이 오면 ‘타이밍’라고 하는 각성제까지 먹어가며 작업에 임했어요. 그곳에서 저임금에 시달리면서도 너무나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봤어요. 우리 사회의 절대 다수가 노동자인데 자기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받고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대접받는 것이 진정한 민주사회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일생을 걸기로 마음먹은 거죠.”
사실 많은 사람들이 위만 보고 산다. 나보다 나은 사람이 관심의 대상이지,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는 관심이 쏠리지 않는 게 세상이치인 것처럼. 그이가 당시 노동자들의 생활에 관해 풀어낸 이야기는 겨울밤보다도 차가웠다. 남들 다 제 갈 길 가는 세상에서 2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이를 한곳을 바라보게 했던 원동력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가장 든든한 후원자인 남편, 애틋함이 사무치는 내 아이
그이는 얼마 전 출간한 저서 ‘당당한 아름다움’이란 책에 이제까지의 삶을 정리해 담았다. 이 책에서 그이는 자신이 그동안 노동운동이라는 외길을 통해 정치활동을 하고 있는 원동력은 “빚을 갚는다는 심정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1985년 6월, 노동운동사에 큰 사건이 일어났어요. 바로 ‘구로동맹파업’이죠. 지금은 총파업, 연대파업이 일반적이지만 당시에는 노동법을 공부만 해도 빨갱이로 몰렸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구로동맹파업은 기업을 뛰어넘어 연대투쟁을 벌인 획기적인 사건이었어요. 그러나 일주일 만에 막을 내렸죠. 이 사건으로 공장은 무기한 휴업에 들어갔고, 44명 구속, 1만3천 명 강제 사직, 부상자가 1백30명에 달할 정도로 커다란 상처를 남겼어요. 청운의 꿈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처절하게 현장에서 내쫓겨 고단한 삶을 이어간 이들에게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노동운동의 외길을 재촉했고, 정치활동에 임하고 있어요.”
그이는 이 사건을 계기로 약 10년간 수배자가 됐다. 그이에게는 ‘1계급 특진, 5백만원 현상금’이 걸리기도 했다. 이후 고통스러운 수배생활은 계속됐고, 그이는 1993년 뱃속의 아이와 함께 법정에 불려 나가 재판을 마무리하고서야 수배에서 완전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고된 수배생활 속에서도 남편을 만난 것은 일종의 ‘행운’이었다고 한다.
“남편은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소개로 처음 만났어요. 서울대 동양사학과 출신인데, 학내 시위로 무기정학을 당한 뒤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어요. 김 지사가 ‘훌륭한 남자가 하나 있으니 만나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남편한테는 제 얘기를 많이 했나 봐요. 그렇게 안면 정도만 익히고 지냈는데, 어느 날 우연히 대학로에서 건널목을 건너다가 양쪽에서 만났어요. 그리고 다음 약속도 잡게 되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졌죠.”
“수배시절 데이트는 어떻게 했냐”는 질문에 그이는 “남편은 재미없고 무덤덤한 사람”이라며 “나는 걷는 걸 싫어하는데, 남편은 걷는 걸 좋아해 마냥 걷기만 했다”며 웃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이는 자신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로 남편을 꼽았다.
“같이 노동운동을 해온 처지였음에도 남편은 이 활동에서만큼은 자신보다 제가 더 적임자라고 격려해줬어요. 당시만 해도 노동운동이 생계를 보장해주지 못했고, 가계를 유지하려면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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