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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추미애 의원과 두 번에 걸친 만남
민주당 추미애 의원과 두 번에 걸친 만남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01.26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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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 대담

‘추다르크’란 강인함 속에 깃든 부드러움
민주당 추미애 의원과 두 번에 걸친 만남

민주당 추미애 의원. 언론에 비친 그이는 ‘추다르크’라는 별명처럼 언제나 강한 모습이다. 그러나 실제로 만나본 그이는 강인함 속에 부드러움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이런 강한 이미지는 험한 정치판에서 자신의 소명을 지켜주는 갑옷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치인 추미애 의원이 아닌
인간 추미애와 솔직 담백한 토크.
취재_ 이시종 기자  사진_ 조준원 기자


"연꽃은 구정물과 같은 연못에서 피어나잖아요.
정치도 삶도 연꽃 같았으면 좋겠어요"


시간을 잠시 2004년으로 돌려놓아보자. 지난 2004년,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건 이후 당시 야당이었던 구 민주당은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았다. 민주당의 잔다르크라 불리던 추미애 의원이 눈물의 삼보일배로 총선에서 지지를 호소했지만 민심은 냉담했다. 그이도 민주당과 함께 무대 뒤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4년, 18대 총선에서 그이는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탄핵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은 정치적으로 여전히 큰 짐이 됐지만, 그이의 존재감은 점점 커져갔다. 최근에는 ‘한국의 내일을 말하다’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화려한 부활의 징조였다. 이에 취재진은 그이를 만나기 위해 여의도로 향했다. 그이는 며칠간 눈코 뜰 새 없는 일정으로 약간 피곤한 모습이었지만, 자신의 정치적인 신념은 물론 소소한 일상까지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4년 동안의 ‘장외생활’, 자신을 돌아본 계기가 됐다
17대 총선에서 낙마한 그이는 4년 동안 ‘장외’ 신세였다. 미국에서 2년을 보냈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여의도가 아닌 대학과 로펌에 적을 뒀다. 그러나 안테나는 여전히 정치계를 향하고 있었다.
“총선에 떨어지고 난 뒤 모교의 총장님이 위로해주면서 하시던 말씀이 ‘무대 위에 올라가 있을 때는 안 보입니다. 무대에서 멀리 있을 때 더 잘 보이기도 합니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나라를 잠시 떠나 미국에 가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경제문제도 그렇고 안보문제도 그렇고 우리와 미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잖아요. 미국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과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그이는 아이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을 분석하고 외교안보, 경제 등 전 분야에서 우리나라의 국익과 미국의 국익이 상응할 수 있는 것을 찾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번에 출간한 책은 이런 생각을 정리한 결과물이다. 그이는 미국을 건너갈 당시에는 복잡한 심경이었지만, 돌이켜보니 재미있고 보람된 일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탄핵 후폭풍’에 대한 상처도 많이 아문 듯했다. 
“당시에 솔직히 오랫동안 괴롭고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상실감도 오래가더라고요. 섭섭함도 있었던 게 사실이고요. 당에서 잘못된 판단을 한 것에 대해 사죄의 뜻으로 삼보일배를 했죠. 퍼포먼스 같다는 거부반응이 있을 것도 예상했지만, 호불호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어요. 결과를 계산할 여지도 없었고요. 미국행은 그걸 털어내기 위한 선택이었어요. 탁 털어버리고 몰두하고 보람 있는 걸 찾고 싶었죠.”
지금이야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사실 고생도 많이 했다. 뒤늦게 영어 공부를 다시 해야 했고, 소득이 없는 상황에서 서울에서 보내주는 생활비로 자신과 아이들이 공부를 해야 했기에, 1달러라도 아껴야 될 처지였다고. 그래도 이 시기는 그이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준 계기가 됐다.
 TV에서 보는 그이의 이미지는 당찬 여장부 같다. 지난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고향인 대구에 홀로 내려가서 민주당 선거운동을 하면서 ‘추다르크’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그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정치 쪽에서 일을 하다 보니까 이런 이미지로 많이들 보시는 것 같아요. 설득을 하려면 확신 있게 주장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야 하잖아요. 이런 모습들이 안방에서 편안히 TV를 보는 분들에게는 강하게 느껴졌을 것 같네요. 뉴스에서 정치소식은 그런 것들만 보여주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뉴스가 안 되지 않나요(웃음).”

알고 보면 눈물도 많은 여자      
실제로 그이는 조그만 농담에도 웃을 정도로 웃음이 많았고, 또 눈물도 별로 참지 않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을 펑펑 쏟기도 했다고.
“미국에 갔을 때, 돈이 별로 없어서 여행을 못 다녔어요(웃음). 그런데 어느 날 이웃에 한인 가족이 ‘장밋빛 인생’이라는 테이프를 빌려주더라고요. 처음에는 여기까지 와서 드라마를 보나 하다가, 아이들과 함께 보게 됐어요. 그런데 티슈통 하나가 없어지던데요(웃음). 최진실 씨 연기가 어찌나 실감나던지, ‘자신의 인생이 녹아나서 저런 연기가 나오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이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뉴스에서 본 당차기만 했던 ‘추다르크’는 다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든든한 서포터, ‘가족’
그이는 바쁜 의정활동으로 제대로 돌보지 못한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도 표현했다.
“딸 둘은 대학생이고 막내인 아들은 이제 고등학생이에요. 막내는 거의 할머니 손에 컸어요. 그래서 특히 막내에게 더욱 미안하죠. 사내아이여서 그저 무던한 줄만 알았는데… 엄마한테 섭섭한 적도 많았나 봐요. 막내가 어느 날 어렸을 때 일을 이야기하더라고요. 언젠가 퇴근하면서 시장에서 아이들 옷을 사 가지고 갔는데, 막내 옷은 안 샀거든요. 할머니가 막내를 워낙 애지중지하셔서 막내 옷만은 할머니가 직접 백화점에서 사다 주시기에 막내 거는 일부러 안 샀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막내가 그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니 많이 미안하네요.”
바쁜 엄마를 둔 탓에 거의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해야 했던 아이들이 밝고 건강하게 크고 있다는 것 하나로도 감사하다는 그이. 시간이 나면 아이들과 집 근처 영화관에서 심야영화를 즐기는데 요즘에는 통 시간이 안 난다고 아쉬워했다. 남편에게도 미안함이 들기는 마찬가지다. 남편인 서성환 변호사는 그이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다. 판사였던 그이가 정계에 입문할 수 있었던 것도 남편의 격려가 큰 힘이 됐다.
“때로는 적극적으로 토론도 해주고, 때로는 다독여주는 고마운 사람이에요. ‘정치를 해야 할까’라고 고민할 때, 적극적으로 해보라고 힘을 준 사람도 남편이었어요.”
그이는 남편과 대학 동기로 만나 7년간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지금이야 캠퍼스 커플들이 학교 내에서 과감한 애정 표현도 서슴지 않지만, 그이가 연애하던 시절에는 손을 잡기는커녕 아는 척하기도 눈치를 봐야 했다고.
“서로 시험(사법고시)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데이트를 많이 하지는 못했어요. 저는 절에서 공부를 했고 남편은 집에서 공부를 했죠. 우리는 주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마음을 키운 것 같아요. 남편이 문장력이 좋아요(웃음).”
남편과 결혼을 앞두고 집안의 반대도 있었다. 영남 집안에서 호남 사위를 보는 일은 당시만 해도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이의 부모도 결국 서 변호사의 진솔함에 끌려 허락을 했다. “남편이 처음에는 이것저것 많이 챙겨주더니 요즘에는 좀 뜸해요”라며 살짝 불만을 내비치는 그이. 하지만 남편은 그이에게 누구보다 가장 듬직한 버팀목이다.

미래까지 내다보는 정치 해보고 싶다
4년 만에 국회에 돌아온 만큼 그이는 의욕이 넘쳐 보였다. 그이에게 추미애의 정치란 무엇인가 물어보았다.
“정치에 대한 기대는 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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