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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지휘하는 마에스트로 함신익
세상을 지휘하는 마에스트로 함신익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03.22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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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예일대 명물교수가 되기까지
세상을 지휘하는 마에스트로 함신익

‘결핍은 나의 힘’이라고 말하는 지휘자가 있다. 가난한 개척교회 가정에서 태어나 2백 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유학, 한국인 최초의 예일대 교수가 된 함신익. 작은 성가대의 반주자였던그의 지휘봉이 이제는 감동을 만들어가고 있다.
취재_ 엄지혜 기자 사진_ 양우영 기자
장소협찬_ 서울프라자호텔(02-771-2200)

“어린 시절의 가난과 결핍이
저의 50년을 이끌어온
원동력이고 자양분이에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놓자 소요산에서 텃밭을 가꾸고 있는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리고 달동네였던 삼양동에서의 추억, 정릉고개 언저리의 맛있는 찐빵을 추억한다. 지금은 찐빵집도 없어지고 삼양동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가난이 지독하게 싫었던 어린 함신익은 이제 중년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마이크 없이 카랑카랑하게 쏟아내던 아버지의 설교가 얼마나 은혜롭고 자랑스러운지 새삼 깨닫게 된다.

세상 공부의 터가 됐던 삼양동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어린 함신익의 가장 큰 소원은 아버지의 직업란에 ‘목사’라고 쓰지 않는 것이었다. 삼양동 달동네에서 군용천막으로 개척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드렸던 그의 유년은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검은색 단벌 양복에 하얀 고무신을 신고, 오른손에는 성경과 찬송가를 들고 전도를 하기 위해 산동네를 누비던 아버지의 모습. 존경보다는 가난의 이유라는 생각이 그를 지배했다.
“당시에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전혀 자랑스럽지 않았어요. 우리 집 가난이 모두 아버지가 하시는 일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니까요. 아버지께서는 폐결핵이 깊어져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가 어머니의 극진한 간호로 소생하셨다고 해요. 잃을 뻔했다가 되찾은 목숨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믿고 목사가 될 결심을 하셨죠.”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분에 아버지의 신학 공부는 가능했다. 어느 교우의 집 다락방에서 시작한 목회는 무허가 빈민촌으로 옮겨졌고, 가스통을 장대로 두드리던 종소리는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아버지의 목회활동을 반갑게 여기고 의지하는 주민들도 있었지만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주민들이 더 많았어요. 동네 불량배들은 시도 때도 없이 천막을 찢기도 하고, 교회 종소리가 시끄럽다면서 돌 던지고 행패 부리는 일도 많았죠. 하지만 아버지의 교회를 찾는 주민은 조금씩 늘어났고 천막 교회는 조그만 벽돌건물로 바뀌었어죠. 아버지의 열정적인 설교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스틸 사진처럼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어요.”
그의 기억 속의 삼양동은 암울한 빈민촌이 아니다. 동네 이름 그대로 삼각산 남쪽 아래 양지 바른 놀이터고, 천태만상의 삶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세상 공부의 터였다.
그는 생각한다. ‘문화적으로 척박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풍요로운 환경을 일찍부터 누렸다면 과연 음악적 성취가 지금보다 빨랐을까, 오히려 음악에서 그 어떤 절실함과 갈증을 느끼지 못하고 일찍 싫증을 느껴 다른 일에 빠지지는 않았을까’ 하고.
삼양동은 삶의 수많은 얼굴을 볼 수 있게 한 공간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해야 하는 그에게 어떤 고급 문화체험보다도 값진 양분을 만들어줬다.

세상의 어려움에서 해방시켜준 피아노
함신익은 초등학교 3학년 때 피아노와 처음 만났다. 동네 아이들에 휩쓸려 여기저기 쏘다니던 개구쟁이 시절, 어머니는 한두 푼이 아닌 레슨비를 들여가며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동기는 아주 소박했다. 단지 교회에서 아름답게 성가 반주를 하는 아들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마 아들을 통해서나마 어머니에게 숨겨져 있던 예술적 기질을 꽃피우고 싶으셨던 것 같기도 해요. 처음에 피아노 가방을 들고 학원에 갈 때면 왠지 사내답지 못한 기분이 들었어요. 여자아이들만 모여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는 게 싫었죠(웃음). 그래서 줄행랑을 쳤다가 어머니한테 들켜서 무릎 꿇고 의자 들고 벌을 받았던 적도 많아요.”
하지만 금세 피아노와 친해지기 시작했다. 음악이 주는 즐거움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어려운 형편에서 어머니께서 어떻게 피아노 레슨비를 해결하셨는지, 참으로 기적적인 일”이라며 소탈한 미소를 보인다. 교육에 대한 집념이 상당했던 어머니의 열정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고 회상한다.
“처음에는 교회 반주자이셨던 박원숙 선생님께 배웠는데, 나중에는 인근 다른 선생님을 수소문해서 한 시간씩 걸어야 하는 먼 곳으로 피아노를 배우러 다녔어요. 개구리, 가재, 잠자리를 잡으러 다니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제게 피아노는 또래들과 조금 다른 정신세계로 나가게 하는 계기가 됐죠.”
그렇게 친구들과 어울리기에 바빴던 유년시절, 그는 점차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노는 것과는 다른 재미를 발견한 것이다. 학교 음악시간에 풍금은 언제나 그의 차지였고, 주일이면 변함없이 아버지 교회에 나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또래의 음대 지망 학생들 수준에는 훨씬 못 미쳤지만, 피아노 레슨도 꾸준히 받았다.
“피아노는 제게 이 세상의 모든 것에서 해방시켜주고 환상 속에 머물게 해줬어요. 피아노를 치고 있는 순간만은 모든 어려운 일들이 문제가 되지 않았고 제가 왕이 됐죠. 피아노를 잠시 손에서 놓았던 적도 있었지만 결국 음대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굳히게 됐죠.”
그는 뒤늦게 시작한 입시 준비에도 불구하고 건국대학교 음악과에 수석 입학했다. 그토록 목말라했던 음악적 환경이 주어지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피아노를 쳤다. 하지만 학교생활에 익숙해져갈 무렵, 왠지 모를 과의 침체된 분위기가 그에게도 전염됐다.
“비주류 그룹에 속하게 된 사람들 특유의 현상이라고 할까요. 자포자기하는 분위기가 많았어요. 그때 돌파구가 바로 지휘였어요. 교회에서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지휘자가 그만두는 바람에 제가 지휘를 맡았거든요. 합창단을 이끌고 대회에 나가 일등도 하고, 지휘에 대한 새로운 매력을 느끼게 됐죠.”

 
 
 
 
 

2백 달러로 떠난 유학생활에서
예일대 풀타임 교수가 되기까지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3년간의 군대생활 그리고 복학. 그는 남은 대학생활을 지휘자의 길을 가기 위한 준비로 계획했다. 시간이 허락되는 한 모든 연주회, 지휘 세미나, 워크숍을 쫓아다녔고, 졸업과 함께 미국으로 가서 본격적인 지휘 공부를 하기로 했다.
“교내 행사, 교회 행사를 가리지 않고 지휘봉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어요. 행사가 시작할 때의 애국가 지휘까지도 가능하면 ‘내가 하겠다’는 자세로 살았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격언을 늘 품고 살았어요.”
보통 사람들에게는 지휘를 전공한다는 개념조차 희박하던 때, 그는 지휘자가 되는 길을 창조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 유학의 길은 쉬운 여정이 아니었다. 가정으로부터 현실적인 도움을 받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물질적 후원을 꿈꾸지 않았던 그는 “미국 땅에 떨어지고 난 다음부터는 내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1984년 휴스턴에 있는 텍사스남부주립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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