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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결핵 극복 후 성직자 된 가수 윤항기
폐결핵 극복 후 성직자 된 가수 윤항기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03.22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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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결핵 극복 후 성직자 된 가수 윤항기
거지깡통 차고 동냥을 다니던
가슴 시린 추억을 말하다

윤항기의 얼굴은 세월의 무게만큼 주름져 있다. 이마에는 그가 살아낸 주름 같은 삶이 흐르고 있고, 머리에도 하얀 전설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눈빛은 삶의 무게를 견뎌온 사람만이 담을 수 있는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어쩌면 이 평온함은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극도의 외로움과 싸워 이긴 전리품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취재_ 이시종 기자 사진_ 김도형 기자

“부모님이 우리 남매에게 주고 간 재산은 한 푼도 없었어요.
그러나 재능을 물려주셨기에 감사한 삶을 살고 있어요”

이른 봄비가 내리려는지 하늘이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는 날이었다. 여느 날처럼 출근을 하려 버스에 올라탔다. 아직 쌀쌀하기만 한 날씨에 옷깃을 여미며 비어 있는 좌석에 몸을 기댔을 때였다. 라디오에서 귀에 익은 노랫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네가 만약 외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 줄게.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어둔 밤 험한 길 걸을 때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친구야. 나는 너의 형제야. 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야.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순간 나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노래는 그 시절의 추억을 생각나게 한다고 했다. 이 노래를 만들었던 한 잘생긴 남자가수가 떠올랐다. 가수 윤항기. ‘별이 빛나는 밤에’, ‘장밋빛 스카프’, ‘나는 행복합니다’ 등 무수한 히트곡을 낸 가수이자, 동생 윤복희가 불러 불멸의 히트를 한 ‘여러분’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30년 넘게 가수로 전성기를 누린 톱스타였다. TV만 켜면 그가 나왔다. 그러나 그는 어느 해인가부터 TV에서 모습을 감췄다.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성직자의 길을 걷고 있다는 얘기뿐. 그는 왜 스타의 영광을 뒤로하고 고난과 가시밭길이라는 성직자의 길을 택했을까.

 
 
 
 

바람처럼 살다 간 천재 예술가 아버지,
그리고 잡초 같았던 유년시절
그를 만난 곳은 서울 중구 예장동에 위치한 예음예술종합신학교였다. 가수로서 최고 절정의 자리에 있을 때 미련 없이 화려한 삶을 버리고 목회자의 길을 선택한 그는 신학교 총장이라는 새 옷을 입고 취재진을 반갑게 맞았다. 넉넉한 웃음에 여유가 느껴지는 모습과는 달리, 그가 지나온 세월은 그리 평탄치만은 않았다.
“아버지께서 일본 유학까지 다녀올 정도로 형편이 괜찮았어요. 그리고 대중예술을 선도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제 어린 시절은 유복한 편이었죠. 당시 남들은 꿈도 못 꾸는 유아용 그림책은 물론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며 놀았으니까요.”
그는 유랑악극단장이었던 아버지와 무용수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우리 대중예술계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받는 윤부길 씨다. 서울대학교 음대의 전신인 경성음악전문학교에서 성악과 작곡을 전공했던 윤부길 씨는 일본 유학에서 문화의 새로운 흐름을 접하면서 대중예술 쪽으로 방향을 돌렸고, 귀국 후 ‘견우와 직녀’, ‘콩쥐팥쥐’ 등 토속적인 이야기로 악극이라는 한국형 뮤지컬을 만들었다. 그의 기억 속의 아버지는 슈퍼맨 그 자체였다.
“아버지는 못하는 게 없는 분이셨어요. 음악도 클래식, 재즈, 국악 등 세계 음악을 전부 다 하던 분이셨어요. 시나리오도 직접 쓰고 심지어는 무대장치와 의상디자인까지 혼자 하셨어요. 어떤 작품이 시작되면 음악, 음향, 조명, 무대장치를 하시느라 몇날 며칠을 밤을 새우셨죠. 그리고, 쓰고, 곡을 만들고, 열 사람이 할 일을 혼자 다하시는 듯했어요. 정말 제가 우리 아버지한테서 태어났다는 것에 너무 감사해요.”
그러나 행복한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불행의 시작은 그의 아버지가 아편에 손을 대고서부터다. 한국전쟁 직후 그의 아버지는 공연 스트레스로 인한 불면증과 심한 감기에 폐가 안 좋았다고 했다. 친구의 권유로 아편을 하게 됐는데, 그만 중독이 돼버린 것이었다.
“그때는 아편이 감기에 제일 좋은 약이라는 말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만 중독이 돼버린 거죠. 아편을 하면 계속 주무시기만 했어요. 그러다 보니 공연약속을 해놓은 것이 펑크가 나기 시작했죠. 그것이 반복되다 보니 소문이 나서 나중에는 일을 못하시게 됐어요. 그때부터 여인숙을 전전하게 됐어요.”
그러는 와중에 아버지는 ‘더 이상 안 되겠다’는 생각에 마약환자 수용소로 직접 자수해서 치료하겠다고 들어갔다. 그러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를 대신해 생계를 책임지던 어머니가 공연 중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것. 그때 그의 나이 열 살이었다.
“아버지가 수용소로 가시면서 어머니가 정말 많이 고생하셨죠. 우리 남매만 여인숙에다 남겨두고 유랑악단을 따라 지방 공연을 가셨어요. 강원도 묵호에서 공연하실 때였는데, 무대에서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당시 어머니가 서른이셨어요. 젊디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거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년 후,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를 하루아침에 소년가장으로 만들어놓았다. 여인숙에서 쫓겨난 어린 남매는 청계천 부근의 시장을 헤매면서 구걸을 했고, 밤이면 좌판 밑에 들어가서 잤다. 그때의 고달픈 삶은 남매가 시체실에서 깨어난 사건이 잘 말해준다.
“겨울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도 어김없이 좌판 밑에 들어가서 자려고 했죠. 추워서 솔방울을 모아 모닥불을 피우고 잠이 들었는데, 솔방울에서 가스가 나왔는지 정신을 잃은 거예요. 아침에 깨어나 보니 옆에 시체들이 누워 있더라고요. 행려사(死)한 사람들을 쌓아놓은 곳이었어요. 장사꾼이 아침에 장사를 하려고 좌판을 펼치는데 좌판 밑에 거지남매가 죽어 있다고 신고를 했던 거예요.”

핏속에 끓던 예술인의 피, 음악인생의 시작
어린 동생과 시장바닥을 헤매다가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생각에 고아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고아원에 사는 것도 녹록지 않았다. 그는 동생과 고아원을 나와 다시 거리를 헤맸다. 그러던 중 동생 윤복희는 미8군에서 쇼를 하는 한 사무실에서 보호를 받게 됐고, 얼마 후에는 미8군 쇼 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기회를 얻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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