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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수단에서돌아온 김혜자 ‘Mother Kim’으로 살아온 봉사인생
아프리카 수단에서돌아온 김혜자 ‘Mother Kim’으로 살아온 봉사인생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04.14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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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에서 얻는 행복


아프리카 수단에서돌아온 김혜자
‘Mother Kim’으로 살아온 봉사인생

강원도 태백의 폐광촌을 비롯해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베트남과 북한까지… 벌써 20여 년 가까이 봉사의 삶을 살고 있는 배우 김혜자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었다. 매번 혼신의 힘으로 연기한 작품이 끝나면 마치 그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떠올리는 그이. 아이들을 찾아가야 한다는
조바심은 또다시 그이를 절망의 땅 아프리카로 향하게 했다.

취재_ 황정호 기자 사진_ 우미진(프리랜서), 월드비전 제공

화제를 몰고 왔던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를 통해 다시금 구구절절한 생활연기를 선보이며 일상 속 현실감이 묻어나는 새로운 어머니상을 보여준 김혜자. 연기자로서, 한평생 ‘한국의 어머니’로 불리며 살아온 그이의 삶 한편에는 세계 곳곳에서 고통받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
지난 1991년 처음 아프리카를 방문한 이래 벌써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세계 곳곳을 누비며 아이들을 보살펴온 그이는 ‘Mother Kim’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어찌 보면 이제는 힘에 부칠 만도 한 나이. 그러나 그이는 여전히 식지 않는 연기 열정만큼이나 아이들을 위한 봉사를 이어오고 있다. 장시간의 비행에 이어 포장도 돼 있지 않은 도로를 또 몇 시간을 달려야만 도착하는 아프리카 남부 수단. 매번 더하면 더했지 편치 않은 여정이지만, 그이는 또다시 작품이 끝나기가 무섭게 길을 나선다. 때론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막막한 상황에서도 그이의 눈은 오직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에게 향해 있다.

인생의 한 부분이 된 봉사와 나눔의 시간들
그이는 매번 새로운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제작진에게 다짐을 받는다. 아무리 드라마의 시청률이 높다고 해도 절대 연장 방송은 하지 않겠다는 것. 그 이유는 바로 아프리카를 비롯해 세계 곳곳의 불우하고 굶주린 어린이들을 위한 봉사활동 때문이다. 지난해 성공리에 막을 내린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극 ‘다우트’에 이어 바로 시작하게 된 드라마인지라 너무 오랫동안 아이들을 찾아보지 않은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그이. 그러나 드라마가 끝난 후 곧 아이들을 보러 떠나겠다던 결심은 다시금 늦춰지고 말았다. 오래전부터 약속해온 영화 ‘마더’의 촬영 일정이 급작스럽게 결정됐기 때문이다.
“월드비전을 통해 봉사활동을 하면서 이번처럼 간격이 길어진 것은 처음이에요. 지난번 아프리카 콩고를 다녀온 뒤로 꼬박 1년 반을 꼼짝할 수가 없었어요. 매 순간마다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이들이었어요. 오랫동안 가지 못해 꿈에 아이들이 나올 정도였죠.”
영화 촬영이 끝나고 후반 작업이 시작되자마자 그이는 서둘러 떠날 채비를 했다. 그이의 목적지는 역시 아프리카 남부 수단에 위치한 와랍주의 톤즈와 티엣 지역. 내전의 후유증으로 국민 대부분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남부 수단의 소식은 그런 그이의 마음을 급하게 했다.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를 다니며 아이들의 구호활동을 해온 그이이지만, 이번 남부 수단은 처음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이에게는 고통받는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상관이 없었다.
“아프리카는 정말 다 똑같아요. 왜 그렇게 끊임없이 내전이 일어나는지…. 하기야 지난 1백 년 동안 전쟁이 없던 날은 고작 14일뿐이었다더군요. 우리가 모르는 많은 곳에서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셈이죠.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받는 것은 아이들과 여자들이에요.”
오랜 세월 동안 그이의 눈에 비친 아프리카는 슬픔으로 가득한 땅이었다. 땅속에 매장돼 있는 엄청난 양의 자원은 오히려 독처럼 아프리카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대륙으로 만들었다. 종교와 자원 다툼에 의한 20여 년간의 내전으로 의료기반시설을 비롯한 대부분의 인프라 시설이 전무한 상태가 바로 남부 수단이 처한 현실이었다.
“처음에는 어느 나라에 간다고 하면 공부를 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이제는 제가 그런 내용을 알아 뭘 할까 싶어요. 제가 방문한 대부분의 나라들이 거의 다 비슷비슷한 상황이에요. 누가 먼저 화살을 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원인이 무엇인지도 알고 싶지 않아요. 단지 굶고 있는 아이들에게 밥을 먹여주고, 항생제가 없어서 다리를 절단하고 눈을 잃어야 하는 아이들을 돕는 것이 우선이에요. 방송이나 잡지를 통해 그러한 실상을 알리는 게 제 역할이죠.”
그이가 월드비전의 친선대사로 활동하게 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바로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처음 결성된 단체가 월드비전이기 때문. 당시 세계를 상대로 ‘한 달에 10달러면 한국의 아이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며 구호를 외친 것이 월드비전의 시초였다. 오래전 그이가 처음 아프리카를 방문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제가 처음 구호활동을 위해 간 곳이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예요.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한국전쟁에 참전한 국가죠. 당시에 무려 두 달간 배를 타고 와서 우리나라를 위해 싸웠다고 해요. 그 나라가 아프리카에서 최빈국으로 곤두박질친 거죠. 한국에 참전했던 병사도 있고 ‘코리안 빌리지’라는 마을도 있었어요.”
막연한 이미지만을 갖고 떠난 아프리카에서 그이는 그야말로 지옥을 경험했다. 에티오피아인 대부분이 인간의 삶을 살고 있지 못했다. 며칠씩 굶다가 기아로 죽는 것은 물론, 영양실조로 말라리아를 비롯한 각종 질병에 노출된 아이들은 눈과 입 주위에 가득 파리가 엉겨붙은 채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열흘간 그이는 울면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결연으로 가슴에 품은 백세 명의 아이들
처음 에티오피아를 다녀온 뒤 그이는 두려움을 느꼈다. 죽어가는 아이들이 즐비한 지옥을 다시 경험하고 싶다는 생각 또한 들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그런 그이의 마음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다시 소말리아로 가자는 제의를 거절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구로공단에서 일하는 한 아가씨가 전화를 걸어와, TV를 통해 아프리카를 갔던 제 모습을 봤다며 8만원의 성금을 전달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때 속으로 ‘하나님이 그 아가씨를 통해 사인을 주시는 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후 그이의 마음에 망설임은 사라졌다.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이자 어머니로서 ‘Mother Kim’이라는 이름을 통해 적극적인 구호활동에 앞장섰던 것. 그 와중에 결연을 맺고 후원을 하기로 한 아이는 한 명, 두 명씩 늘어나 어느새 백세 명이 되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아이는 케냐에서 만난 에꾸아무였다.
“7년쯤 전에 케냐의 투르카나라는 마을을 간 적이 있어요. 온통 가시나무밖에 없는 사막과 같은 곳이었죠. 거기서 에꾸아무를 만났어요. 당시 일곱 살이었던 에꾸아무는 천막으로 엮은 집에서 동생을 돌보고 있었어요. 엄마는 돈을 벌기 위해 나갔다더군요. 거기는 결연도 안 되는 지역이었어요. 유목을 하는 사람들이라 월드비전에서도 관리가 불가능한 곳이었죠. 저는 에꾸아무와 헤어지면서 꼭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했어요.”
그후 그이는 에꾸아무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결국 찾을 수가 없었다.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날의 약속은 그이에게 늘 마음의 짐이었다고. 그러나 하늘이 도왔던 걸까. 그런 와중에 다시 찾은 케냐에서 그이는 결국 에꾸아무와 재회할 수 있었다.
“열세 살이 돼 있더군요. 놀랍게도 저를 기억하고 있었어요. 제가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믿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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