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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이 곧 예술이다” 난소암 투병 중인 ‘화가 김점선’ 병상 만남
“나의 삶이 곧 예술이다” 난소암 투병 중인 ‘화가 김점선’ 병상 만남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04.14 11: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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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예술가

“나의 삶이 곧 예술이다”
난소암 투병 중인 ‘화가 김점선’ 병상 만남

김점선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채롭다. 모두들 그이의 매력에 푹 빠져
탄성을 지른다. 치열함이 없이는 단 한순간도 견딜 수 없었던 화가 김점선. 암투병 중에도 붓과 펜을 놓지 않았던 그이가 자신의 전기를 내놓았다. 제목은 ‘점선뎐’이다.

취재_ 엄지혜 기자 사진 및 자료제공_ 매거진플러스 DB·점선뎐(시작)

지난 2007년 4월 난소암 수술을 받은 화가 김점선. 만성 장염을 앓다가 난소암을 발견하고 지금은 2년째 항암치료 중이다. 하지만 그이는 투병 중에도 그림을 그리고 책을 펴냈다. 하기야 오십견으로 붓을 못 들 때는 아들에게 컴퓨터를 배워 디지털 전시회를 열었던 이가 바로 김점선이다.
어느 날 찾아온 암을 두고 ‘앎’이라 하며, 모든 것이 더욱 선명해졌다고 말하는 사람. 김점선은 자신의 지난 삶을 담담한 필치로 글을 써내려갔다. 이제까지 낸 책들과는 다르다며 ‘점선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주 어릴 때 외할머니 방에서 본 여자들의 전기 ‘옥단춘뎐’, ‘숙영낭자뎐’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김점선은 자신이 그 여자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김점선은 현재 암세포가 간으로 전이돼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 통원치료를 받다가 최근에 체력저하로 다시 입원했다. 암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그이는 아들에게 알리지 않고 홀로 수술을 받았지만, 병세가 악화되면서 지금은 아들의 간병을 받고 있다.
기자가 병실을 찾았을 때는 막 외출 준비를 하던 찰나였다. 그이의 아들은 “바람을 쐬러 드라이브를 가려고 한다”고 말해주었다. 기자가 김점선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했지만 낯설어하는 것 같았다. 더벅머리에 호쾌하게 웃던 화가 김점선은 보이지 않았다. 간이침대에 앉아 있는 그이의 손자와 낯빛이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형형한 눈빛만은 예전 그대로였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예술품, 김점선
김점선에게는 친구가 많다. ‘파란만장, 엽기만발, 독야청청’이라는 말로 자신의 인생을 표현하지만, 또 한국 화단에서는 외따로 솟아 있지만, 그이를 친구로 둔 사람들은 말한다. 김점선이 내 친구인 것이 감사하다고. 피아니스트 신수정은 “보통 사람이 살 수 없는 삶을 대신 살아주는 점선, 그가 주는 대리만족으로도 삶이 풍요로워진다”고 말한다. 연극인 김방옥은 “김점선의 글과 그림은 단순하고 거침이 없다. 그 사람의 삶과 생각과 느낌에는 큰 긍정의 힘이 있다”고 표현한다.
별나기로 소문난 사람, 김점선. 국내 최초로 앙데팡당 전에서 파리 비엔날레 출품 후보에 선정되며 화려하게 등단했지만, 너무나 파격적인 그림으로 인해 화단과는 대립을 해왔다. 온전히 독립적인 삶을 살고자 처음 본 남자와 하루 만에 결혼했고, 혹독한 가난 속에 젊은 날을 지내야 했다. 돈이 없어 한 가지 색깔로 광목에 그림을 그려 팔아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중성적이고 반항적인 외모로 장발 단속에 걸리고 수차례 경찰에 연행되었던 젊은 시절, 소란을 피우는 동네 청년들 앞에서 네 시간이 넘도록 설교해 탈진하게 만든 일, 자신의 결혼식에 참석해준 것만으로 엄마에게 너무나 고마워한 아들의 사연.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아연실색할 만한 일들이 김점선의 인생에는 그렇게 수놓아져 있다.
하루 여덟 시간씩 노동으로 그림을 그려온 김점선은 1983년 첫 전시회를 연 뒤, 20년 이상 개인전을 60여 차례 열었다. 2002년부터는 디지털 판화전도 개최했다. 하지만 그이는 유화를 팔지 않는다. 컴퓨터로 그린 디지털 판화를 저가에 판다. 예술계는 대중과 영합했다며 따가운 시선을 보냈지만 김점선은 “예술을 감상하는 데 돈에 대한 공포가 따라가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이는 작품활동 외에도 TV 문화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아, 꾸미지 않은 투박한 언어로 문화계 인물들을 만나 내밀한 삶을 이야기했다. 글과 그림으로 자신의 삶을 투영했듯이 타인의 삶에도 귀를 기울였다.
1998년 남편을 폐암으로 잃은 뒤 자신도 암 진단을 받았지만, 여전히 당당하다. 그리고 초탈하다. 고통스러운 삶의 순간들마저 발랄한 폭소를 자아내게 하는 김점선의 힘은 그래서 더욱 깊은 여운을 남긴다.

 

어떤 여자가 자기는 매우 개인적이며 독자적인 인생을 산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늙어갈 무렵 암에 걸렸다. 너무 심하게 마르고 기운 없어해서 주변 사람이 그를 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리고 내일 수술한다고 칼 잡을 의사가 밤중에 그 여자의 입원실로 찾아와 말했다. 내일 어디어디를 잘라낼 거라고 설명했다.
그 여자가 말했다.
“이왕 배를 여는 데 왕창 잘라내주시오. 나는 늘 내 창자들이 쓸데없이 긴 게 불만이었소. 내가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내장은 크로마뇽인과 다름없지 않소. 나는 나의 대장을 디자인하고 싶소. 십이지장에서 항문까지 직선으로 연결하고 나머지 창자들은 잘라서 버려주시오. 나는 이제까지 살면서 긴 창자 때문에 쓸데없이 섬유소를 먹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려왔소. 이왕 배를 열 거면 나를 도와주시오.”
의사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칼은 내가 쥐고 어디를 잘라낼지는 내가 결정합니다.”
그 여자가 말없이 생각했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건가? 내 창자도 내 맘대로 못하네.’
그 여자는 아주 새로운 고통과 분노를 느꼈다. 그다음 날 밤 의사가 다시 왔다. 창자는 하나도 안 잘라냈다고 말했다. 그 여자는 병에 걸린 것보다 내 몸을 내 맘대로 못하는 이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2년 넘게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 여자는 여전히 병원에 다니고 있다. 그냥 살아만 있을 뿐 전혀 독자적이고 개인적인 인생은 아니다.

- 나의 전기, ‘점선뎐’ 프롤로그 中

 
 

김점선의 특별한 인연

환갑이 넘은 나이에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김점선은 자신의 사진 위에
유머가 넘치는 말풍선과 그림을 덧입혔다.

단순하게 마주 보며 천치처럼 살았던 부부
나는 내가 힘들어할 때 스스로 즐거워하면서 나와 어울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준 사람들만 기억한다. 나의 남편은 그런 면에서 내게 가장 많이, 그리고 자주자주 나를 그 자신의 행복감 속으로 끌고 들어간 사람이다. 그는 내가 아주 어려워하는 일들을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쉽게 풀어주곤 했다. 무지무지하게 힘든 일들이 눈 녹듯이 아예 없어져버리는 느낌을 나는 수없이 체험했다.
그는 내가 임신한 나 자신에 대한 두려움과 새로운 체험에 대한 부적응, 무서움, 정서적인 거부현상 등으로 평형을 잃고 있을 때,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말과 행동으로 나를 치유했다.
“우리 강아지 기르자”고 그가 말했다. 나는 웃었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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