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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맨 김한석, 17년간 암 투병 아버지 간호하며 지내온 애틋한 사연
개그맨 김한석, 17년간 암 투병 아버지 간호하며 지내온 애틋한 사연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05.21 02: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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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웃는다

방송인에서 개그맨으로
돌아온 김한석

17년간 암투병하는 아버지 간호하며 지내온 애틋한 사연

1992년 예능 프로그램의 FD로 방송계에 첫발을 내딛은 개그맨 김한석. 방송에서 늘 환한 웃음을 보이던 그에게는 사실 남모를 아픔이 있었다. 데뷔 당시 직장암으로 쓰러진 아버지 때문이다. 재발과 후유증을 이겨내며 투병생활을 견뎌온 아버지 곁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이제는 건강을 회복한 아버지를 보며 김한석은 이 모든 일에 감사할 뿐이라고 말한다.
취재_ 김은희 기자  사진_ 김도형 기자


“톱스타가 되지는 못했어도 꾸준히 방송을 누빈 17년…
‘아버지를 살렸다’는 자부심 하나로 충분하다”

 “예전에는 제가 별로 웃을 일이 없었나 봐요. 전 웃는다고 웃었는데도, 늘 우울하고 슬픔에 사로잡힌 표정으로 보였는지… 요즘은 늘 웃고 다닌다는 소리를 들어요. 전 잘 모르겠는데,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달라 보이나 봐요. 그만큼 편안해 보인다는 거겠죠.”
지난해 푸드스타일리스트 박선영 씨와 결혼한 후 부쩍 “얼굴이 밝아졌다”는 인사를 자주 듣는다는 그. “행복하다”라며 미소를 짓는 그에게 얼마 전 신나는 일이 하나 더 생겼다.

14년 만의 콩트 코미디, 이제야 본업을 찾은 느낌
김한석은 지난 4월 12일 첫 방송을 시작한 OBS의 콩트 코미디 프로그램 ‘코미디多, 웃자GO’를 통해 개그맨으로 다시 돌아왔다. ‘코미디多, 웃자GO’는 그동안 공개 코미디 형식에 밀려 사라진 정통 콩트 코미디의 부흥을 꿈꾸며 야심차게 문을 연 프로그램. 이봉원, 김지선, 김대희, 강유미 등 스타 개그맨들이 총출동한 가운데 김한석도 이봉원의 추천으로 ‘만수동 1970’s’ 등 두 코너에 합류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콩트 코미디를 했던 것도 벌써 14년 전의 일이다. 이후 사실상 코미디를 접고, 방송 리포터나 MC로 활동한 그는 어느덧 개그맨보다는 방송인이라는 이미지로 강하게 남았다.

“십 몇 년간 개그맨이라는 타이틀만 붙어 있었지 코미디를 해본 적이 없었어요. 스스로 코미디를 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못하고 있었던 거죠. 비공개 콩트 코미디 연기는 그동안 너무나 갈망해오던 것이라서 이봉원 선배로부터 같이 하자는 제의를 받았을 때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어요.”

10년 넘게 코미디 연기를 하지 않았기에 다른 후배들보다 감이 떨어졌을 것 같다고 걱정하면서도 “예전에 내가 어떻게 했는지 끄집어내는 과정이 굉장히 재미있다”며 뿌듯한 표정을 짓는다.

“방송 녹화가 굉장히 보람되고 기다려져요. 현장에서도 서로 모니터를 해주며, 예전에 하던 정통 코미디 방식 그대로 하고 있죠. 이제야 본업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이에요. 신인 시절 ‘오늘은 좋은날’에서 연기를 하던 느낌이 되살아나네요.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활동하려는 노력을 좀 더 미리 하지 않았는지 후회스럽기도 하고요.”

방송인으로서의 이미지가 굳어져서인지, 어디에 가더라도 자신이 콩트를 하면 관중들이 어색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고 말하는 그. 관중들로부터 공감대를 이끌어내며 그들이 몰입할 수 있도록 연기를 해야 하는데, 자신의 모습을 ‘오버’로 받아들이는 반응에 선뜻 용기를 내지 못했다. ‘코미디多, 웃자GO’ 현장에서도 처음에는 자신의 연기를 두고 불안해했지만, 이제는 극에 몰입해 자신과 역할을 일치시키는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는 중이다.

최선을 다하는 B급 스타이고 싶다

김한석의 원래 꿈은 배우였다. 개그맨 데뷔는 사실 생계를 꾸려가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된 일이었다.

“1991년 겨울에 아버지가 직장암으로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그리고 오래지 않아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집, 주식, 땅 등 아버지의 모든 재산이 도미노 무너지듯 넘어가는 것을 봐야만 했어요. 등록금을 낼 수가 없어서 서울예전을 자퇴한 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휘재(이휘재)가 MBC의 FD를 같이 하자고 권유했죠.”
당시 그가 아르바이트하던 패션회사에서 받는 월급이 1백만원. 반면 FD는 수입이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배우의 꿈을 안고 있던 그에게 방송국에서 경험을 쌓는 일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꿈과 현실 앞에서 어느 길을 가야 할지 고민하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그전까지는 아버지에게 힘들다는 얘기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때는 새벽에 아버지가 계신 중환자실로 찾아갔죠. 그리고 아버지를 바라보며 무언의 대화를 나눴어요. 아버지가 ‘방송국 FD를 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50만원이라는 돈, 있으나 없으나 얼마나 큰 차이가 나겠냐고 하시는 듯했죠(웃음).”

아버지의 병문안도 간신히 한 달에 한 번꼴로 갈 정도로 바쁘게 FD 생활을 하던 그는 우연한 계기로 ‘몰래 카메라’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게 됐다. 그리고 인상 깊은 연기로 활약을 펼치며 인기를 얻었고 곧 개그맨으로 데뷔했다. 하지만 그 이후 개그맨으로서의 삶이 화려하지만은 않았던 것도 사실. 

“전 스스로를 B급 연기자라고 말해요. 만일 이 세상에 웃기는 능력을 가진 A급 스타들만 존재한다면, 그들은 돋보이지 못할 거예요. 그들을 받쳐주는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시청자들은 잘 모르죠. 하지만 영화 속에서 개성 넘치는 조연이 주목받는 것처럼 코미디의 조연들도 빛을 보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생각해요.”  

17년 방송활동을 하는 동안, 대중에게 가장 사랑받는 최고의 스타가 되고 싶다는 욕심으로 괴로웠던 시간이 그라고 왜 없었을까. 특히 20대에는 ‘나도 A급 꼭대기까지 가보고 싶다’는 욕심으로 조급증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철이 들면서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존재감이 무엇인지 고민을 하던 그는 어느 날 송은이가 던진 한마디에서 문제의 실마리를 잡게 됐다.

“제가 뭘 잘하는 것 같으냐고 물었더니, 송은이가 ‘남이 웃길 수 있도록 정말 잘 도와준다’라고 하더군요. 그 얘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했죠. 오히려 제가 웃기려고, 돋보이려고 욕심을 냈을 때에는 시청자들이 ‘오버’라고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을요. 제게 맞는 역할은 남들이 웃길 수 있도록 받쳐주는 일이 아닐까, 라는 결론을 내리게 됐어요.”
A급 스타가 되겠다는 열망이 욕심이었다는 생각을 하고 나니 그는 한결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었다. B급 연기자로서 열심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남들의 인정을 받고 A급 스타가 될 수 있는데, 처음부터 A급 스타의 욕심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은 옳은 게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지칠 때마다 일으켜 세워준 한마디, “수고했다”

직장암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아버지는 이후에도 재발과 후유증에 시달리며 폐암, 뇌졸중, 심장수술 등 몇 번의 수술을 통해 고비를 넘겼다. 지난 17년은 굉장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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