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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딸아이 키우며 암 투병 속에 추는 춤 무용강사 김진순 씨의 ‘어둠 속에서도 웃음 잃지 않는 법’
홀로 딸아이 키우며 암 투병 속에 추는 춤 무용강사 김진순 씨의 ‘어둠 속에서도 웃음 잃지 않는 법’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05.21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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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가 사는 법

홀로 딸아이 키우며 암투병 속에 추는 춤
무용강사 김진순 씨의
       ‘ 어둠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법’

어느 날 본지 홈페이지에 자신의 힘겨웠던 삶을 가감 없이 털어놓은 한 독자의 사연이 올라왔다. 40대 무용강사 김진순 씨가 그 주인공. 감당하기 힘들었던 어린 시절부터 행복하다고 할 수 없었던 결혼생활, 이어진 암투병까지… 삶이 종용한 시련 속에서도 언제나 행복을 꿈꾸었다는 그이에게 늦게 얻은 딸아이는 살아가는 이유이자 희망이 되고 있었다.

취재_ 황정호 기자  사진_ 권오경 기자


“안무가로 살아온
젊은 시절, 암투병 후
20년 만에 버렸던 무용을 다시 시작하다”


김진순 씨의 하루 일과는 바쁨의 연속이다. MBC 문화센터를 비롯해 백화점과 사회복지관, 학생들의 특별활동은 물론 개인 레슨까지 스케줄이 빡빡하게 짜여 있기 때문. 결혼 전 안무가로 활동을 한 그이지만, 20여 년 만에 다시 무용복을 입기까지 삶은 여러 갈래의 상처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머릿속에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았다. 여자의 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아직 어린 딸아이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암투병이라는 큰 고통이 잦아들고 있는 요즘, 그이는 또다시 새로운 희망을 조심스레 꿈꾸어본다. 

알코올중독 아버지 밑에서 독학으로
키워온 무용의 꿈

김진순 씨는 고향이 강원도 강릉이다. 어린 시절, 가난은 지금도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사무치는 한이었다. 유달리 미술과 무용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그이지만, 매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집안에서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더구나 알코올중독이던 아버지로 인해 가족 모두가 힘들어할 때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무용을 너무 좋아했어요. 사실 더 좋아한 것은 미술이었는데, 그림을 그리기 위해 물감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죠. 그래도 무용은 저 스스로가 하면 될 것 같았어요. 당시 학교에 무용부가 있었는데 매일 밤 레슨 시간에 구경을 하고 집에 와서 혼자 연습했어요. 그게 고등학교까지 계속 이어졌죠.”

그렇게 독학으로 무용공부를 해온 그이는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국립발레단을 찾아갔다. 운명이었을까. 그이는 발레단의 프리마돈나 선생이 운영하는 학원에서 두 달간 교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두 달 후에 바로 국립발레단에 시험을 봤어요. 합격했죠. 발레에 대한 제 열의를 알아주신 듯해요. 당시에는 정말 꿈을 꿔도 발레 하는 꿈만 꿀 정도였거든요.”

그렇게 어렵사리 들어간 국립발레단에서 무용수로 일한 지 1년여. 그이의 마음속에는 또 다른 목표가 자리잡았다. 대학에 들어가 정식으로 무용 공부를 하고 싶다는 것. 한번 마음먹은 이상 주저할 이유는 없었다. 결과는 역시 합격이었다.

“어렵게 들어간 대학생활은 꿈만 같았어요. 그래도 집안 형편이 안 좋은 것은 여전해서 손을 벌릴 수가 없었죠. 결국은 장학금도 받고 개인 레슨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근근이 학교를 마칠 수 있었어요.”

대학을 졸업한 무용수로서 그이의 선택은 꿈 대신 현실이었다.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비록 장녀는 아니라도 가족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수입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

“당시 국립발레단이냐 MBC무용단이냐를 두고 고민을 많이 했어요. 결국 대학 학력에도 불구하고 수입이 좋은 MBC무용단을 선택했죠. 무용단 생활을 하다 보면 안무 쪽을 비롯해 할 수 있는 일이 많기도 했고요.”

불행한 결혼생활에서 기적적으로 얻은 딸아이

결과적으로 그이가 방송국 무용단에 들어간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노력하는 모습을 통해 국장들의 신임을 받으며 일할 수 있었던 것. 게다가 그이의 생각대로 안무가의 일도 함께하게 됐다. 그렇게 일에 몰두해 몇 년이 흐르는 동안 한계가 찾아왔다.

“안무가로서 실력은 인정받았지만, 인맥이 없어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았어요. 거기에 대한 좌절감으로 갈등하던 차에 지인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죠. 당시 저에게 결혼 상대에 대한 기준은 유일했어요. 아버지의 영향으로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라면 다른 조건은 아무래도 좋았어요.”

당시 그이의 나이는 서른네 살. 늦은 나이였지만 행복을 꿈꾸며 결혼을 선택했고, 그렇게 무용을 버렸다. 그러나 결혼생활에 대한 환상은 오래가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남편은 아이를 원치 않는 것은 물론이고 사업을 한답시고 커다란 빚만 만들었다. 한 해, 두 해가 지나면서 아이에 대한 기대를 거의 접을 즈음, 기적이 일어났다. 나이 서른여덟에 아이가 생긴 것이다.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에 눈물이 복받쳐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런 그이와 달리 남편의 반응은 냉담할 뿐이었다. 아이를 가졌다는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던 남편은 집에도 들어오지 않으며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내비쳤다.

“저한테는 소홀해도 아이에게는 신경을 써주길 바랐지만, 남편은 아이가 태어나 네댓 살이 될 때까지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어요.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이혼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이에게 이혼 가정에서 자랐다는 손가락질을 받게 하진 않겠다는 생각이었죠.”
그러나 상황은 그이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사업가의 자질이 없던 남편은 잘되는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적자를 냈다.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억대를 넘게 됐다.

결혼한 이후 처음부터 생활비라는 것도 없었지만, 그이의 명의로 돈을 끌어온 탓에 무책임하게 가출을 한 남편 대신 홀로 아이를 키우며 빚을 갚아나가야 했다.

그러나 빚은 줄 기미를 보이지 않고, 더욱이 그이도 모르는 독촉장이 계속 날아들었다.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20년 만에 다시 시작한 무용, 딸아이의 크는 모습 지켜보고 싶어

홀로 아이를 키우며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해서 얻는 수입으로 간간이 생활해오던 지난 2007년 1월, 그이에게 닥친 또 다른 불행은 유방암이었다. 그러나 그이는 좌절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불행에 남은 것은 오기뿐이었다. 게다가 당시 여섯 살의 딸아이를 위해서라도 살아야만 했다.

“이미 몸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병원에 갔어요. 암 선고를 받았을 땐 덤덤했죠. 남편한테 말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어요. 결국 지난해 말 이혼 소송에 들어갔어요.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그냥 데리고 다녔어요. 항암주사를 맞으면 두 시간 정도 누워 있어야 하는데 약이 독해 기절해 있으면 아이는 그런 제 옆에서 혼자 놀았죠. 그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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