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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소녀’에서 ‘칼국수 아줌마’ 된 육상스타 임춘애의 그 후 20여 년
‘라면소녀’에서 ‘칼국수 아줌마’ 된 육상스타 임춘애의 그 후 20여 년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05.21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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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스타

‘라면소녀’에서 ‘칼국수 아줌마’된
육상스타 임춘애

세 아이 엄마로, 아내로 바쁘게 살아온 20년 세월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과 가냘픈 체격에 연민까지 불러일으켰던 ‘라면소녀’ 임춘애. 그녀의 달리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국민영웅’이라는 타이틀은 오래전에 내려놓았지만, 제2의 인생을 달리느라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가 20여 년 만에 자신의 영광 속에 숨은 이야기들과 최근의 일상을 공개했다.

취재_ 이시종 기자  사진_ 양우영 기자


“제일 가슴 아팠던 소리가  ‘배부르니까 못 뛰네’라는 거였어요.
사람들은 그 말을 너무 쉽게 하더라고요”


돌이켜보면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당시로는 초대형 국제스포츠제전이었던 1986년 제10회 서울아시안게임. 아시아 육상계에서도 비주류였던 한국이 중국을 제치고 육상 중·장거리 800·1500·3000m에서 무려 세 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그것도 어린 소녀가 거둔 성적이었다. 이후 소녀는 그야말로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라면소녀’라는 별칭을 달고 뛰었던 어린 소녀. 23년이 지났어도 이 소녀의 이름은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바로 임춘애다.

‘국민영웅’의 타이틀 벗고 ‘칼국수집 사장’으로 살아가는 일상
임춘애는 지금 남편과 함께 용인시 수지구청 부근에서 칼국수집을 운영하고 있다. 예전에 비해 살이 좀 붙은 모습이지만 호리호리한 체격과 날카로운 턱선은 오래전 모습 그대로였다. 취재진이 방문했을 때, 그녀는 남편과 함께 가게를 정리하고 있었다. 정리하는 손놀림이 꽤 익숙해 보였다. 정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요즘 장사하기 어떠냐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전보다 손님이 좀 줄기는 했지만, 요즘 경기에 비하면 그래도 괜찮은 편이에요. 7∼8년 동안 운영돼온 가게를 인수해서 단골손님이 꽤 있거든요. 그리고 저를 보러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도 좀 있어요(웃음).”

세월의 힘일까, 그녀는 생각보다 사교성이 좋았다. 긴장한 빛이 역력해 보이던 과거 인터뷰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직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가게 매출이 좀 줄어서 이제는 저희 둘이 장사를 해요. 아침 열 시에 나와서 밤 열 시에 집에 들어가죠. 세 시까지 점심 장사를 하다가 아이들 학교가 끝날 무렵에 잠시 집에 가서 아이들을 돌봐요.”

그녀는 은퇴 후 프로축구 선수 출신인 이상룡 씨와 결혼해 올해 중3이 된 딸 지수, 초등학교 2학년인 쌍둥이 아들 강이와 산이를 두었다. 한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스포츠 스타는 가족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살며 소소한 행복을 즐기고 있었다. 

세 개의 금메달에 숨은 눈칫밥 그리고 설움

임춘애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가게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세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고 수줍게 웃고 있는 앳된 소녀.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그날의 감동은 그녀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나 잊을 수 없는 짜릿한 추억이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그 시절의 이야기로 흘렀다. 사실 대회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녀가 금메달을 따리라고는, 더구나 세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아시안게임이 제 일생에서 컨디션이 가장 좋았던 때였던 것 같아요. 다 뛰고도 힘든 줄 몰랐으니까요. 일이 되려고 그랬나 봐요.”

금메달을 땄을 때 처음 느껴지는 감정은 환희보다는 ‘이젠 밥값을 했구나’라는 안도감이었다. 세 개의 금메달 뒤에는 ‘눈칫밥의 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아시안게임이 열리기 4개월 전까지만 해도 저는 대표선수가 아니었어요.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하지도 않았죠. 그런데 제가 전국체전에서 3관왕을 하면서 추가선발이 된 거예요. 저로 인해 그 대회에 못 나간 선수도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대표팀 안에서도 미운 오리새끼였어요. 무조건 잘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사실 임춘애의 국가대표 선발을 놓고 육상계 안에서는 말들이 많았다. 육상연맹선발위원회가 다시 열렸고, 당시 막후 실력자이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인 이규동 씨의 지원 사격에 힘입어 그녀는 대표선수로 뽑혔다. 그 후 초등학교 때부터 스승이던 김번일 코치도 함께 태릉선수촌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와 김 코치는 태릉선수촌 안에서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느닷없이 들어온 이들에 대한 시선은 따갑기만 했다. 다른 육상 대표선수들과 별도로 훈련을 해야만 할 정도였다.

“코치님께서는 성적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매일 밤 가위에 눌리곤 하셨어요. ‘금메달 못 따면 너랑 나랑은 끝이다’라는 말도 자주 하실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다 800m에서 첫 금메달을 땄는데도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당시 임춘애는 1위보다 2초가량 늦은 2위로 들어왔으나, 1위였던 인도의 아브라함 선수가 규정보다 빨리 레인을 벗어난 것으로 판정되면서 뜻하지 않게 금메달을 받았다. 이를 두고 육상계 일각에서는 “금메달을 주웠다”며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후 1500m와 3000m를 잇따라 우승하면서 실력을 입증해 보였다. 더욱이 3000m 우승 기록은 한국신기록이었다.  

“어쩌면 모든 것이 우연과 행운 덕분인지도 모르겠어요(웃음). 대회 전 기록으로는 중국 선수들에 훨씬 못 미쳤거든요. 특히 3000m는 10초 정도 차이가 났죠. 그런데 저는 평소보다 잘 뛰었고, 중국 선수들은 한국에 와서 컨디션 조절에 실패했는지 10초가량 부진한 기록을 냈어요.”

‘헝그리 정신’의 대표 아이콘이 된 그녀

3관왕이 되자 사람들은 육상의 불모지에서 별이 떴다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모든 언론의 포커스는 임춘애를 향했다.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신데렐라가 된 것이다. 그리고 결승선을 힘겹게 통과한 당시 우승 소감은 전설처럼 전해져왔다.

“라면 먹으면서 운동했어요. 우유 마시는 친구가 부러웠고요.”

이 말에 국민들은 안타까움과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 ‘헝그리 정신’에 딱 맞아떨어지는 그 말은 언론에 집중 보도되면서 신화처럼 굳어졌다. 이때부터 그녀에게는 ‘라면소녀’라는 별명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이 일화가 한 언론사의 오보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초등학교 합숙 훈련 때 외부에서 증정 받은 라면을 간식으로 먹었다는 말이 와전됐어요. 운동선수가 어떻게 라면만 먹고 운동을 할 수 있겠어요. 특히 육상은 기록 경기이니만큼 체력이 중요해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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