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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어린시절)‘영원한 아나운서’ 차인태 교수가 말하는 열정적인 삶의 기록
(명사의 어린시절)‘영원한 아나운서’ 차인태 교수가 말하는 열정적인 삶의 기록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06.19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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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어린 시절



“돌아보면 실패도 많은 삶이었지만,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배웠다”

방송인으로 30년을 보내고, 그 후로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12년을 보냈다. 올 8월 정년 퇴임을 앞둔 차인태 교수. 인생의 2막을 내리는 그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요란스러운 것은 질색인지라 정년 퇴임과 관련해 일체의 행사를 하지 않을 계획이다. 정년 퇴임식, 퇴임 기념특강, 논문헌정식 등의 행사도 갖지 않는다. 그간의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 출간한 에세이집 ‘흔적’을 이래저래 신세진 지인들에게 보내는 것으로 조용히 퇴임을 기념하려 한다. ‘흔적’은 한 시대, 방송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차인태 교수의 치열한 삶의 기록이기도 하다.
“성장하면서 실패와 좌절도 겪었지요. 방송인으로서의 귀한 달란트 덕분에 인생의 축제기간도 거쳤고요. 이제는 ‘감사’라는 삶의 제목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어요. 방송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아, 이렇게 살아온 사람도 있구나’라고 읽힐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제목을 ‘흔적’으로 지은 것은 흔적이란 남을 수도 있고, 지워질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한국 방송사에 잊히지 않을 흔적을 남기다
“나의 흔적은 남을 수도 있고, 지워질 수도 있다”라고 겸손하게 말을 잇는 그이지만, 차인태 교수는 한국 방송사에 잊을 수 없는 순간마다 함께한 ‘살아 있는 역사’ 그 자체다. 1969년 2월 MBC에 아나운서로 입사한 이후 인포테인먼트의 원조격인 ‘장학퀴즈’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1970~80년대 하나의 문화 트렌드를 형성했던 그는 1998년 3월 제주 MBC 대표로 퇴임하기까지 30년간 방송현장을 누비며 ‘아나운서의 전형’으로 불렸다.
특히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장학퀴즈’. 차인태 교수가 1973년 2월부터 1990년 4월까지 17년 2개월 동안 진행한 장학퀴즈는 한 시대를 풍미한 문화 아이콘이자 숱한 인재를 배출해낸 요람이기도 하다. ‘고등학생 대상 퀴즈 프로그램이 시청자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라는 우려 속에 파일럿 방송으로 편성됐던 장학퀴즈는 예상을 뒤엎고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차인태 교수 역시 아나운서로 살아온 30여 년 동안 그를 거쳐간 프로그램이 하나하나 자식 같고 애인 같지만, 장학퀴즈는 각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진행했던 모든 프로그램이 제게는 다 소중합니다. 장학퀴즈만이 베스트 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햇수로 18년을 함께하는 동안 처음의 시청자였던 까까머리, 단발머리 고등학생들도 저와 함께 나이를 먹어갔죠. 그렇게 점점 시청자 층이 넓어지면서 함께 세월을 보냈던 것 같아요.”
신입 아나운서 시절에는 정확한 표준어 발음, 올바른 우리말 구사를 위해 선배 아나운서들의 방송 테이프를 필사하면서 밤을 지새웠고, 단 3초짜리 방송을 위해 수십 번, 수백 번씩 연습을 거듭했다는 차인태 교수. 그는 곧 모든 PD들이 함께 작업하기를 원하는 아나운서, 시청자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아나운서로 이름을 떨치게 됐다. 일정이 많을 때는 TV와 라디오 방송을 합쳐 일주일에 열세 편의 방송을 소화하기도 했다.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가 방송일정 때문에 하룻밤 만에 올라와야 했을 정도였다.
30년간의 방송생활을 회상하며 차인태 교수는 “좋아서 했고, 미쳐서 했던 시절”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꿈이 처음부터 아나운서였던 것은 아니다. 아나운서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인생의 행로에서 만난 수많은 우연이 겹친 운명이었다.

실패는 끝이 아니라 과정일 뿐이다
차인태 교수의 고향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마주하고 있는 궁벽한 산골마을인 평안북도 벽동군이다. 1948년 다섯 살이던 그는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손을 잡고 38선을 넘었다. 기독교인인 증조할아버지가 평북도 도의원까지 지낸 지방 지주여서 해방 이후 북한 체제에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기독교 집안인 데다 지주의 손자이고, 직업이 의사인 아버지는 대표적인 부르주아 계층이었어요. 사회주의 국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도태되거나 숙청 대상이 될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죠. 모든 재산을 포기하더라도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하셨어요.”
경주에 자리를 잡고 적응을 해나가기 시작했지만, 1950년 아버지가 군의관으로 징집돼 7년간 복무하게 되면서 생계수단 없이 남겨진 가족의 형편은 극도로 어려워졌다. 하지만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그는 학교를 다녔고, 아버지의 제대 이후에는 서울로 올라와 미동초등학교에 전학했다. 지금은 표준어 구사의 표준으로 불리는 그이지만 당시만 해도 심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바람에 반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기도 했다.
방송 준비를 할 때나, 강의 준비를 할 때나 늘 완벽을 추구하고 좀처럼 실수를 하지 않는 빈틈없는 그의 모습을 보며 많은 이들은 실패 한 번 겪지 않고 자란 엘리트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는 성장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실패를 겪었다고 말한다. 시험을 한번에 시원하게 통과해본 적이 없는 것은 그를 괴롭힌 징크스였다. 공부 잘하는 우등생으로 가족과 교사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지만 중학교, 고등학교 입시 모두 1차 시험에서 낙방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아버지의 뒤를 잇고자 연세대 의대를 지원한 대학 입시에서도 좌절을 맛봐야 했을 때 그의 실망과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원래는 의대를 목표로 재수를 해야 하는데, 대학에 적을 두기 위해 지원했던 연세대 성악과에 합격을 하게 됐어요. 하지만 전공수업에 흥미를 가질 수 없었고, 재능도 부족했죠.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음대를 다니면서 도저히 내 악기(몸)로는 성악인이 되기 힘들겠다는 판단을 하게 됐어요.”
좀처럼 학업에 흥미를 붙일 수 없던 그는 곧 교내 교육방송국 YBS에서 활동하며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됐다.
“YBS에서 아나운서를 하던 시절, 아나운싱에 섭외, 취재, 방송원고 작성까지 하다 보면 하루가 모자랄 정도였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전공과목 강의보다 방송에 열성적으로 매달렸죠. 전문방송인을 향한 꿈도 그때부터 시작됐어요. YBS 출신 선배들 중에는 방송국에서 PD, 기자, 아나운서, 엔지니어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선배들과의 교류를 통해 방송일에 대한 관심을 키우게 됐어요. 처음에는 라디오 PD에 관심이 있었는데, 어느 선배가 무심코 던진 ‘넌 아나운서 한번 해보면 어때?’라는 말이 저의 길을 이끌어준 셈이 됐죠.”
젊은 시절 그는 여러 번의 실패를 겪었다. 공부 잘하는 우등생인 장남에게 거는 가족의 기대도 컸기에 그는 더욱 깊은 괴로움에 빠졌다. 하지만 실패의 경험이 인생을 살아나가는 데 큰 버팀목이 되어준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족의 눈물 어린 기도, 친구들의 따듯한 위로가 그때마다 저를 일으켜 세워줬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실패는 바닥이나 끝이 아니라, 하나의 여정이고 과정’이라고 생각을 바꾼 일인 것 같아요. 실패를 실패라고 생각하는 순간 희망은 사라집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니 운명도 바뀌더군요.”
차인태 교수는 지금도 제자들에게 방송 현업에 대한 지식만을 전달해주는 선생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실패의 경험이 인생을 어떻게 단련시키는지, 맞닥뜨린 실패 앞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전해주기 위해 노력한다.
“신입생 M.T나 오리엔테이션을 가게 되면 제가 꼭 묻는 것이 하나 있어요. 각자의 나이와 재수 여부지요. 전 늘 분명히 얘기해요. 바로 대학에 들어온 아이들보다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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