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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만희 감독의 마지막 사랑이었던 배우 문숙
고 이만희 감독의 마지막 사랑이었던 배우 문숙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07.15 14: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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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utiful Life

고 이만희 감독의 마지막 사랑이었던 배우 문숙
그의 사망 충격으로 인기절정의 배우생활 접고 미국행

30년 만에 돌아와 털어놓은 감동의 사랑 연가


한국 영화계에서 ‘천재감독’으로 불렸던 고 이만희 감독.
그는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한 여인을 운명적으로 사랑했다.
당시 신인배우였던 문숙과 마지막 한 해를 보낸 것. 
세상에 온전히 털어놓지 못했던 그들의 사랑은 결코 비극적이지 않았다.
취재_ 엄지혜 기자  사진_ 권오경 기자  자료제공_ ‘마지막 한해’(창비)

 

배우 문숙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TBC 공채로 데뷔해 한창 인기가 좋은 탤런트였지만 그녀가 우리들 기억 속에 남긴 작품은 고 이만희 감독의 영화 ‘삼포 가는 길’과 ‘태양 닮은 소녀’가 전부다. 대종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할 만큼 연기력을 인정받았지만 이만희 감독의 죽음 앞에 배우로서의 생을 놓아버렸다. 그와의 짧고 강렬한 사랑을 뒤로한 채 미국으로 홀연히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문숙은 그 사랑을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잊혀버린 이만희 감독의 삶, 그와의 아름다웠던 사랑을 말하고 싶었다.

그와의 사랑을 꺼내 보일 때가 됐다
그가 떠난 지도 어언 30년이 넘었다. 그가 존재하지 않는 한국에서 숨을 쉴 수 없어 무작정 떠났다. 풀리지 않는 많은 의문들을 안고 한국을 떠나왔고 어느 한곳에도 발을 붙이지 못한 채 말문을 굳게 닫았다. 방랑자처럼 떠돈 세월도 많았다. 미국 캘리포니아와 플로리다, 산타페에서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림은 나를 표현하는 도구가 됐다. 오래전 연기가 내 소통의 수단이었던 것처럼,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내 마음속 이야기가 전달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도시의 문화, 개인전의 스트레스가 나를 옭아맸다. 나는 멀리 바다가 보이는 바람 많은 섬, 하와이 마우이 섬으로 떠나왔다. 번쩍거리거나 화려하게 장식하지 않은 단순 소박한 공간이 내 성격에 맞는 것 같아 나를 편하게 한다. 이름도 모르는 자그마한 섬의 수없이 많은 새들과 한 무리가 되어 원시적으로 살아가는 삶, 행복하다.
나는 이곳에 오기 직전 우연히 영화 ‘삼포 가는 길’을 보게 된 후로 심중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표면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고 쫓듯 혹은 쫓기듯 방랑하던 나의 마음속 오래된 우울증의 실마리가 잡히며 풀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성숙한 인간으로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표현할 수 있는 때가 충분히 무르익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때마침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한국에서 배우생활을 할 때 친분이 있던 선배 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영화배우 이혜영 씨의 인터뷰 기사에 네 이름이 나왔다”며 기사를 보내주었다. 그 기사 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기사에 내 이름이 나온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자신의 아버지인 영화감독 이만희 씨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솔직하게 밝힌 대목이었다.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사실이었다.
오래전 한국을 떠난 후 세계 곳곳에서 한국 영화의 역사가 거론될 때마다 그의 작품이 한국 영화예술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상영된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작품을 만들었는지, 무엇이 그렇게 침울하면서도 단아한 영상을 만들게 했는지 알려진 것이 없었다. 강하고 거칠기만 한 충무로 영화계 바닥에서 터프한 옹고집의 천재로 알려졌던 이만희 감독. 꾸밈없고 거친 듯하면서도 묵묵하던 그의 행동 뒤편의 모습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가 표현한 사랑의 언어들, 그의 사랑과 영화는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 아직도 내가 모르는 척 그냥 지나쳐버릴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정열적인 그의 짧은 인생의 마지막 목격자였던 내가 입을 열 때가 됐다는 생각이 강하게 찾아왔다.

호기심 많던 나, 그의 이야기를 좋아하게 됐다
1974년 5월 서울, 그와의 첫 만남이 있었다. 화천영화공사라는 영화사로부터 오디션을 보라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나는 당시 스무 살을 갓 넘긴 나이에 나름대로 잘나가는 TV 탤런트인 데다 내 잘난 맛에 사는 당돌한 아이였다. 평상시처럼 간소한 차림새로 생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덜렁하게 영화사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낯선 분위기의 사무실에서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영화감독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바로 이만희 감독이었다. 그는 많이 기다리게 해 미안하다며 겸손한 말투로 거듭 사과를 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영화사에서 오디션은 시작됐고, 그는 호감으로 가득한 친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불안하고 초조한 내 마음을 읽었는지 그 어떤 사람들보다 나를 편하게 살펴주었다. 몇 주일이 흐르고 나는 영화의 주인공으로 발탁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태양 닮은 소녀’의 재수생 ‘인영’ 역을 맡았다. 상대역은 신성일 씨였다.
동대문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시작된 첫 촬영. 영화 현장은 처음이었던 내게 이 감독은 다감하면서도 호기심 가득한 태도로 다가왔다. 솔직하고 장난기 있는 그의 말투는 어려움 없이 금세 친근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낯선 스태프들 속에서 마음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관심과 배려 때문이었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흥건하게 땀 흘리며 촬영을 한 날은 어김없이 충무로 근처 작은 음식점을 향했다. 가는 곳마다 음식 만드는 아주머니들은 이 감독을 가족처럼 반겼고 특별히 주문을 하지 않아도 그가 좋아하는 안주들을 내왔다. 나는 이 감독이 술을 과하게 마시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는 술보다 뒷골목의 주점문화 자체를 사랑했다. 그곳이야말로 당시 문화를 이끌던 충무로 예술가들이 서로 만나 의견을 교환하는 만남과 교류의 장소였다. 몇몇 신세대 감독은 그런 충무로 분위기를 빠져나와 명동의 맥줏집 동네로 자리를 옮겼지만 이 감독은 철저한 충무로 뒷골목파였다.
어느 곳에 가든 사람들은 진심으로 이 감독을 좋아하고 존경했고, 그는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호기심 많던 나는 그의 옆에서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게 됐다. 간혹 우리 둘만의 자리가 되면 그는 아주 친한 벗을 대하듯 자기만의 생각들을 허물없이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보기보다 훨씬 외로움을 많이 타는 상처받기 쉬운 영혼의 소유자였으며 예술가들이 흔히 그렇듯 내면 깊숙이에는 어둡고 슬픈 면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기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했다. 언제부턴가 그는 나를 자기 예술세계의 최고 동반자라도 되는 양, 내 눈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물었다.
“너는 알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

그가 지어준 이름 ‘문숙’, 막내딸 혜영이와의 만남
우리는 영화를 만드는 일에 전념하면서 자연스레 서로의 곁을 지켰다. 그의 존재는 하루하루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어갔다. 그와 함께 더 있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나는 가족이 있었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통행금지시간 안으로는 집에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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