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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출혈로 죽을 고비 넘긴 기상캐스터 이익선의 다시 찾은 일상
장출혈로 죽을 고비 넘긴 기상캐스터 이익선의 다시 찾은 일상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07.15 15: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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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고 나서야 이타(利他)라는 것을 처음 알았죠. 엄마가 된 이후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정말 많이 바뀌었어요"


하이 톤의 부드러우면서도 똑 부러지는 음성. 이익선은 세월이 무색하다는 말이 맞을 만큼 일기예보를 하던 당시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예전처럼 날씨를 전하는 그녀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요즘은 그 당시보다 훨씬 바쁜 생활의 연속이다. 두 아이의 엄마 노릇은 물론 라디오와 케이블 방송을 넘나들며 활약하는 그녀이기에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일기예보를 그만둔 지 한참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기상캐스터라는 수식어는 그녀의 이름 뒤에 늘 따라다닌다. 그러나 기상캐스터가 되지 않았다면 오늘의 자신도 없다고 말하는 그녀이기에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고. 지난해 장출혈로 생사를 넘나들었던 경험을 뒤로하고 바쁜 일상을 조곤조곤 털어놓는 그녀의 얼굴에서 잔잔한 행복이 배어나왔다.

운명처럼 찾아온 기상캐스터의 삶,
지금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그녀는 기상캐스터로 첫 스타트를 한 순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각 방송사마다 여성 기상캐스터 한두 명쯤 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당시에는 파격에 가까운 시도가 아닐 수 없었다. 당시 SBS가 개국을 하며 공석이 된 KBS 기상캐스터 자리에 그녀를 내세우기까지 방송사 내부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후로 무려 16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KBS를 대표하는 기상캐스터로 자리매김했다.
“당시에는 궁여지책으로 사람을 구하다가 여성을 한번 써보자는 의견이 나온 것이었어요. 아마 한번 시도해보고 아니면 다시 바꾸자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저를 가르친 기상캐스터 조석준 선배님이 보장한 기한은 3년이었죠. 그다음은 너 알아서 하라는 분위기였어요(웃음).”
그러나 막상 기상캐스터가 된 그녀가 첫 번째로 부딪힌 벽은 참고할 롤모델이 없었다는 것. 국내에서는 여성으로서 최초였기에 ‘여성 기상캐스터’의 색깔이 모호했던 것이 사실이다. 모든 것이 생소하기만 했던 실수투성이의 초보 기상캐스터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 특히 첫 방송 때는 숨은 쉬었는지, 눈을 뜨고 있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떨기만 했다. 게다가 이후 얼마 동안은 하루도 실수를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두 시간 뉴스 중에 일기예보를 총 다섯 번 하는데, 네 번을 잘하면 마지막에 꼭 더듬고 끝나곤 했어요. 매일 실수를 하니까 저는 괴로워 죽겠고, 스태프들은 왜 저런 사람을 쓰나 하는 반응이었어요. 시청자들은 ‘오늘은 또 어떤 실수를 하나’를 기대하는 상황이었고요. 당황하고 쩔쩔매는 모습이 재미있었다고 하더군요(웃음). 그때는 아나운서 아카데미 같은 곳이 없었으니까 실전에서 트레이닝을 받는 수밖에 없었죠. 아마 지금처럼 잘하는 후배들하고 같이 시작했다면 오래가지 못했을 거예요.”
그렇게 시작한 기상캐스터는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사람들이 그녀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첫 여성 기상캐스터라는 것 외에도 또 있다. 기존의 딱딱하기만 했던 일기예보와 달리 그녀만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일기예보를 했기 때문이다. 멘트 하나, 복장 하나를 선택하는 데도 고민을 거듭한 그녀. 때론 원칙을 깨면서까지 ‘이익선 스타일의 일기예보’를 만들어냈다.
“장마철 일기예보를 하면서 우비를 입은 것은 당시로서는 그만둘 것을 각오하고 한 일이었어요. 사전조율 없이 무작정 저지르고 보자는 생각으로 한 시도였거든요(웃음). 지금이야 모르지만 당시 기자들은 굉장히 보수적이었어요. 스튜디오에 비가 안 오는 것을 시청자들이 다 아는데 무슨 엉뚱한 짓이냐는 분위기였죠. 그래도 다행히 잘리지는 않았어요(웃음). 그다음에는 선글라스를 머리에 올려도 보고, 긴소매 옷 속에 반소매 옷을 입고 가서 일교차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한쪽을 벗기도 하면서 더 대담하게 했죠. 그런 아이디어를 고민하는 것이 즐거웠어요.”
그렇게 기상캐스터로 시작해 한때 임백천, 김병찬 등 당시 최고의 진행자들과 함께 ‘연예가 중계’ MC 자리까지 맡으며 승승장구한 그녀. 그러나 결국 결혼에 이은 두 번의 임신과 출산을 거치면서 방송국의 결정에 의해 기상캐스터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16년 가까이 매일 새벽잠과 싸우며 단 한 번의 결근도 하지 않았던 그녀지만 프리랜서의 입장에서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시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방송을 떠나지 않았다. 처음 기상캐스터를 할 때도 그랬지만, 그녀의 내면에는 여전히 일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이 존재했다. 그런 열정 덕분에 다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수 있었다. 때론 망설임이 없지 않았지만, 그러한 선택은 결국 새로운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
“저는 일요일이 불안하고 싫어요. 약간은 일 중독인 셈이죠(웃음). 끊임없이 스스로를 실험대에 올려놓는 일을 즐기는 편이에요. 그래서 일을 멈추지 않았던 것 같아요. 작년 초에는 EBS 라디오 프로그램을 쭉 하다가 방송이 폐지돼 백수가 된 적이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국군방송 MC 공채에 응시했죠. 까마득한 후배들과 경쟁해야 했지만, 창피한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방송을 놓지 않았고, 그런 열정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YTN의 ‘과학향기’를 비롯해, 불교방송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 등 진행을 맡고 있는 프로그램의 성격이 다양해진 것도 또 다른 변화. 물론 기상캐스터 시절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프로그램이지만, 오히려 지금이 더 만족스럽다.
“일등을 할 수 있는 열의가 있지만, 이등을 하는 사람의 마음이랄까요. 물론 어떻게 보면 거만하게 들릴 수 있는 이야기지만, 굳이 일등을 함으로써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 제 생각이에요. 실리 추구라고 할 수 있죠(웃음).”

치매 앓다 세상 떠난 아버지,
효녀라는 소리는 부담스러워

그녀는 기상캐스터를 하던 시절 치매를 앓는 아버지를 부양하기도 했다. 대단한 것이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던 그녀가 털어놓은 이야기 속에는 남다른 겸손함이 녹아 있었다.
“제가 늦둥이예요. 오빠 세 명하고 11년, 10년, 7년 차이죠. 오빠들이 다 결혼했으니까 당연히 결혼 전에는 제가 부모님과 사는 거고, 연세가 많고 경제활동을 못하시니까 제가 벌어 온 수입의 상당 부분을 쓴 것은 사실이에요.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치매는 사실 가족에게 더 힘든 부분이 있어요. 제 경우는 일을 병행했기 때문에 더 쉽지 않았죠. 길을 잃어 새벽까지 안 들어오시는 아버지를 파출소의 연락을 받고 안도하며 모시러 간 적도 있었어요. 급기야 사발면을 데우신다고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는 지경까지 되셨죠. 결국 요양병원으로 모셔야 했어요.”
요양병원으로 옮기고 얼마 뒤 아버지는 곧 세상을 떠났다. 그런 그녀의 이야기가 우연히 알려지고 결국 효령 대상까지 받게 됐지만, 정작 그녀는 ‘과장된 것’이라며 말을 이어갔다.
“저랑 비슷한 상황에서 부모님을 모신 수많은 분들이 계신데, 제가 알려진 방송인이기 때문에 상을 주신 것 같아요. 상금이 1천만원인가 했는데 양심상 도저히 받을 수가 없더라고요. 노인단체에 기부해서 치매노인들의 치료를 위해 쓰도록 했어요. 일정 부분 제가 한 일은 사실이지만, 누구보다 더 잘 부모님을 모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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