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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에 잠든 고미영에게 보내는 가족의 눈물 편지
히말라야에 잠든 고미영에게 보내는 가족의 눈물 편지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08.20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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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양성, 히말라야 원정대를 향한 꿈을 품은,
항상 자신 있고 당당했던 산악인”

지난 7월 11일, 고미영의 친언니 미란 씨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히말라야 8,000m급 14봉 완등 도전을 떠난 막내 동생 고미영의 위성 전화번호였다. 하지만 동생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함께 원정을 떠난 한국여성산악회 위원장의 목소리였다.
“미영이가 실종됐다”는 이야기. 미란 씨는 “실어증이라고요?”라고 답했다. 고산에 오르면 간혹 실어증에 걸리기도 한다는 동생의 이야기가 기억이 난 것이다. 하지만 이내 실어증이 아닌 ‘실종’이라는 소식이 미란 씨의 귓가에 울렸다. 며칠 전 전화통화에서 “잘 내려올 수 있게 기도해달라”는 막내 동생의 목소리는 이제 들을 수 없게 됐다.

여성 산악계의 큰 희망이었던 그녀가 남긴 일기
산악인 고미영은 2년 만에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일곱 개를 정복하는 대기록을 세우며 국내 여성 산악인의 희망이 되었다. 2005년 파키스탄 드리피카(6,447m)를 시작으로 지난해는 히말라야 마나슬루(8,163m) 무산소 등정에 성공했고, 여성 산악인 최초로 히말라야 14봉 첫 완등에 도전 중이었다. 올봄 마칼루, 칸첸중가, 다올라기리를 정복한 고미영은 이런 추세로 간다면 마지막 14번째 등정으로 안나푸르나를 오를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난 7월, 11번째 봉우리인 낭가파르바트 등정에 성공한 그녀는 하산하는 길에 난기류를 만나 실족해 히말라야 14좌 도전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히말라야의 차가운 눈 속에서 생을 거두었지만 산악인 고미영의 도전은 빛났다. 현지의 기상 악화로 시신 수습이 늦어졌지만 다행스럽게 그녀는 가족의 품에 안겨졌다.
평소 글재주가 뛰어났던 그녀는 산악인으로 입문하면서부터 오랫동안 일기를 써왔다. 친오빠 고석균 씨가 발견한 일기장에는 산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산과 겨뤄서는 안 된다”, “깎아지를 듯한 산들이 용기와 자유를 일깨워준다”는 고백들이 그녀의 마음을 대변해준다.
한편 조심스레 지켜온 그녀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산과 결혼하다시피 했기에 아직 미혼이었던 그녀는 코오롱스포츠 챌린지팀의 김재수 원정대장과 애틋한 사이임이 알려졌다. 이번 원정에 동행했을 뿐 아니라 고미영의 11좌 등정 중 10개 봉우리를 함께 올랐던 김재수 대장은 그녀의 죽음에 크게 오열했고, 구조대로 동참해 그녀의 시신을 마음에 품었다.

‘암벽등반가’에서 ‘고산등반가’로 제2의 인생
전북 부안에서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난 고미영은 어릴 적부터 산을 좋아한 당찬 소녀였다. 9년 동안 집에서 꼬박 40여 분을 걸어서 학교를 다녔는데 그때부터 이미 기초체력이 탄탄했다고 한다. 유독 가족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그녀는 고등학교 졸업 후 농림수산부에 들어가 공무원 생활을 하던 중 우연히 산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동료들과 가평 명지산으로 야유회를 갔다가 산이 주는 짜릿한 재미를 느낀 것이다. 당시 스물두 살이었던 그녀는 주말이면 혼자 배낭을 메고 지도책을 들고 전국의 등산코스를 찾아다녔다.
그녀가 전문산악인의 길로 접어든 계기는 북한산 등반이었다. 백운대로 향하는 등산로 대신 험준한 만경대를 택한 것이다. 그 길에서 암벽 타는 사람들을 만났고 암벽등반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이후 코오롱 등산학교 암벽반에 들어가 20kg을 감량하며 전문산악인들을 만나게 된다. 타고난 체력으로 암벽등반을 시작, 1993년 처음 출전한 암벽대회에서 6위에 오르고, 서른 살이 되던 1997년 프랑스로 등반유학을 떠난다. 전문 암벽등반가(스포츠클라이머)로 나선 그녀는 2003년까지 아시아선수권 6연패를 기록, 세계 랭킹 5위에 오를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취미로 시작한 산악스키 실력도 월등해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11년 동안 암벽등반가로 화려하게 활약했지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슬럼프가 왔고 그녀는 새로운 길을 꾀하기 시작했다. 근력을 많이 쓰는 암벽등반은 오랜 선수생활을 하기에는 체력이 부치기 때문이다. 암벽을 타던 또래 선수들의 은퇴 소식을 들으며 심란해하던 중 등산학교 산악반 강사들과 히말라야 드라피카로 고산 등반을 떠났고, 첫 고산 등반 신고식을 훌륭하게 치러냈다. 함께 갔던 강사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고소 적응을 잘했고, 고산병 증상도 없었다. 고미영은 비로소 ‘이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이구나’ 다짐했고 고산등반가로 새출발을 하게 된다. 숨조차 쉬기 어려운 해발 수천 미터를 넘나드는 산 위에서 그녀는 가뿐했고, 아무도 도전하지 않은 ‘세계 여성 최초 14좌 완등’의 꿈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글쓰기를 좋아하던 다정다감한 사람
타고난 체력과 지구력으로 고미영은 ‘늦깎이 산악인’이라는 타이틀을 금세 ‘여자 엄홍길’로 바꿔나갔다. 그녀는 체력적으로도 탁월해 맥박수가 1분에 약 49회로 마라톤선수 수준이었고 폐활량도 일반인의 두 배가 넘었다. 동료 산악인들에게 철인, 멘탈스트롱으로 불리며 미개척지이던 여성 산악인계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20여 명의 등반대원 중 유일하게 여자인 적도 많았지만 특유의 밝은 성격으로 적응해나갔다. 그녀는 ‘강하다는 것은 이를 악물고 참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을 평소 노트에 적어두고 자주 들여다봤다고 한다.
지인들은 그녀를 두고 “겉은 남자 같지만 속은 영락없이 여자”라고 표현했다. 타고난 산악인이지만 십자수, 클래식 기타, 한지공예 등을 취미로 할 정도로 여성스러운 면도 많았다. 누구와도 잘 어울려 “고미영을 알게 된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매력에 흠뻑 빠진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였다. 희망원정대를 함께 갔던 연예인 정준호, 이종원 등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지난해 12월 히말라야 마나슬루 등정에 성공한 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고미영은 산악인으로서의 생활을 이렇게 밝히기도 했다.
“밤에 텐트 안에 있으면 설렘 반 걱정 반의 심정이에요. 그럴 때는 글이 잘 써져서 수첩에 이것저것 많이 적어요. 원정을 가면 대부분의 시간을 베이스캠프에서 지내요. 총 40일 일정이라면 실제 움직이는 건 15일 정도라서 책도 많이 읽고 십자수도 해요. 작년에 갔던 시샤팡마는 베이스캠프가 엄청 아름다웠어요. 호수도 있고, 병풍처럼 산에 둘러싸여 있는데요. 히말라야를 파노라마로 보면서, 세계에 이 풍경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정말 극소수일 텐데 하는 생각에 행복했죠. 그리고 7,500m를 넘어가면 잠을 거의 못 자요. 잠자는 것으로 스트레스 안 받으려고 그냥 편하게 눈을 감고 있어요. 음식 같은 경우 보통 6,500m 지점부터는 거의 안 먹히는데요. 저는 7,000m 초반대까지도 잘 먹어요. 그러다가 더 높은 곳으로 가면 음식 냄새가 많이 역해져요. 그러면 2∼3일 정도는 안 먹고 가기도 하고요. 마지막 캠프부터는 누룽지같이 소화가 잘되는 음식을 먹어요.”
고미영은 원정을 떠날 때면 에세이나 대하소설 같은 책을 몇 권씩 가져갔다고 한다. 동행하는 원정대원이 있지만 베이스캠프에 들를 때면 조용히 책을 읽는 시간이 많았다. 오빠 고석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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