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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집 아저씨’ 김영희 PD의 아프리카 여행기
‘쌀집 아저씨’ 김영희 PD의 아프리카 여행기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08.20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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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MBC 예능 프로그램 ‘느낌표’ 연출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프로그램을 통해 그가 던진 화두는 이내 사회적인 이슈로 떠올랐고, 청소년들의 0교시 폐지는 물론 외국인 이주노동자와 관련한 법도 개정시켰다. 그가 만든 프로그램이 막강한 권력으로 자리잡아갈 즈음, 그는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했다. 특히 프로그램을 위한 아이디어마저 고갈되면서 연출에 대한 자신감도 상실해갔다. 그 즈음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는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그는 결심을 했다. 회사에 몸을 담고 있는 신분이지만 용기를 내어 아프리카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매너리즘에 빠진 자신에게 필요한 새로운 자극을 통해 새로운 구상을 해보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결국 회사는 그의 뜻을 받아들였고, 그는 홀로 아프리카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아프리카가 불쌍하다고? 천만의 말씀!
그는 여행지를 아프리카로 택한 이유에 대해 아직도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단지, 수년간에 걸쳐 축적된 아프리카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그를 그곳으로 이끌었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다고 한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라는 소설책을 보면 이야기 말미에 여자주인공이 없어지는데, 결국 아프리카에 사는 걸 누군가 봤다는 한두 줄의 내용이 나와요. 그 소설을 보고 나니까 ‘아프리카라는 곳이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그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여자가 마지막에 아프리카까지 갔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마도 그런 소소한 경험들이 쌓여 한 번도 가지 못한 아프리카에 대해 동경하기 시작했던 같아요.”
그는 70여 일간의 아프리카 여행을 통해 케냐, 우간다, 탄자니아, 짐바브웨, 보츠와나, 잠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모로코, 말리, 가나 등 10개국을 돌며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경험을 했다. 하루하루가 새로움의 연속이었지만 아직도 잊히지 않는 기억은 단연 죽을 뻔한 일이다.
“여행을 하면서 강도를 만난 사건은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대낮에 강도가 칼을 들이대며 돈을 요구했어요. 저의 대처방법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지만, 욕을 하며 소리를 있는 대로 지르는 것이었어요. 다행히 제 반응에 놀랐는지 강도가 도망갔죠. 급하게 숙소로 돌아와 주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미쳤느냐? 가진 돈 전부를 줘라.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만약 칼에 찔리기라도 했다면 목숨도 잃을 뻔한 상황이었는데, 대처방법이 조금 무모했던 것 같아요.”
그러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프리카를 인간미와 생동감이 넘치는 곳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흔히 아프리카인들은 지독한 가난 때문에 불쌍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가 직접 본 아프리카인들은 불행하지도, 불쌍하지도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아프리카가 불쌍한 곳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경제적으로 절대 빈곤이다 보니 불쌍한 사람들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대다수의 아프리카인들은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우리보다 훨씬 더 멋있게 살고 있어요. 아프리카 사람들처럼 생동감 있게 사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거예요. 사람들이 살아서 꿈틀거린다는 느낌을 갖게 할 정도죠. 좀 못살긴 해도 어느 게 더 인간답게 사는 건지, 그들을 통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한편 그는 70여 일간의 아프리카 여행기를 엮어 최근 ‘헉(Hug) 아프리카’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의 판매 수익금은 아프리카 아이들이 마실 수 있는 우물을 파는 데 사용된다.

‘승률 9할의 승부사’보다 ‘쌀집 아저씨’가 좋다
그는 1986년 MBC 공채로 입사했다. PD라는 직업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대학 졸업 직후, 친구의 권유로 PD 시험을 보게 됐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프로듀서를 꿈꾸지는 않았어요. 심지어 PD라는 직업이 있는 것조차 몰랐죠. ‘방송국 PD가 좋다’는 친구들의 이야기만 듣고 PD 시험을 본 겁니다.”
PD로 입봉(‘정식 PD로 발령 받았다’는 의미)한 후 그의 첫 작품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일요일일요일밤에’의 ‘몰래카메라’다. 당시 ‘몰래카메라’라는 방송 포맷은 일본 등 외국에서 이미 어느 정도 알려진 상태였고, 우리나라에서도 5∼10분 분량으로 비중이 크지 않게 방영되고 있던 시절이었다. 때문에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그는 조금 다르게 접근했다.
“이경규를 MC로 투입해 프로그램 내에서 효과적으로 캐릭터화한다면 충분히 대작의 가능성이 있다고 봤어요. 그래서 처음 시작한 게 당시 가수 이범학 씨의 ‘퀴즈 아카데미’ 편이었죠. 제 예상은 적중했고, 그때부터 ‘몰래카메라’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어요.”
처음으로 연출을 맡은 프로그램에 이경규를 선택한 이유는 너무도 간단명료했다. 사람을 정말로 웃기는 개그맨이자 MC였기 때문이다. 사석에서도 자신을 쉴 새 없이 웃기는 이경규를 보며, 캐스팅하겠다는 마음을 키워나갔다고 한다.
“그 당시 이경규 씨와 친분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단지 방송국에서 몇 번 만났는데, 저를 너무 웃겼어요. 방송에서도 웃음을 주는 개그맨이지만, 사석에서조차 몇 시간 내내 웃기는 이경규 씨를 보면서 캐스팅하기로 결심했죠.”
이후 그는 새로운 성격의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예능 프로그램 PD들에게 두 마리 토끼라고 불리는, 공익과 재미가 절묘하게 조합된 프로그램을 연출해낸 것. 시청률도 높게 측정됐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프로그램으로 평가받았다는 점이다. 물론 그러한 프로그램을 만들기까지 그 역시도 서태지의 말처럼, “뼈를 깎는 창작의 고통”을 느꼈겠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승률 9할의 승부사’가 될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과장되게 포장하지 않았다.
“다른 프로듀서들보다 제가 프로그램을 진짜 잘 만드는지, 못 만드는 건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남들보다 열심히 했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저보다 열심히 하는 PD는 본 적이 없거든요. 프로그램을 하고 있을 때는 매일 밤을 새우는데, 새벽 네다섯 시에 보면 방송국에서 저만 밤을 새우고 있거든요. 아마 그 차이가 지금의 저를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그는 ‘김영희’라는 이름보다 ‘쌀집 아저씨’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방송을 통해 개그우먼 이경실이 처음으로 사용했던 ‘쌀집 아저씨’라는 별명이 대중에게까지 깊숙이 퍼져나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 역시도 방송계에서 떠도는 ‘승률 9할의 승부사’라는 호칭보다 ‘쌀집 아저씨’라는 애칭이 더 각별하게 다가오는 모양이다.
“사실 ‘승률 9할의 승부사’보다는 ‘쌀집 아저씨’가 더 좋아요. 이 별명 때문에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설 수 있는 계기가 됐거든요. 덕분에 저는 PD로서는 최초로 인심 좋은 아저씨라는 이미지를 갖게 됐죠(웃음). 사실 그것 때문에 몇 가지 오해가 생긴 것도 있어요. 대표적으로 제가 만드는 프로그램이 착하니까 저 역시도 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무지하게 악랄하거든요. 프로그램을 만들 때는 얼마나 독한 줄 몰라요. 물론 다른 사람들처럼 착한 부분이 있겠지만, 그건 일부일 뿐이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많다는 거죠.”
재기 넘치는 그의 대답에서 예능 프로그램 PD다운 면모를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20여 년간의 프로듀서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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