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01:30 (토)
 실시간뉴스
안타깝게 세상을 등진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을 기리다
안타깝게 세상을 등진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을 기리다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09.09 13: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금도 믿을 수가 없어요.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 아무렇지 않게 저와 전화통화를 하셨는데…”

한때 ‘아시아의 물개’로 불리며 수영의 변방국에 불과했던 우리나라에 금메달을 안겼던 이가 바로 조오련이다. 불과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아시아를 재패하며 한국 수영의 영웅으로 등극했던 그. 그가 일구는 성과를 지켜보며 어려운 시절 우리 국민들은 삶의 고단함을 위로받았다. 그런 그의 열정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았다. 은퇴 이후에도 대한해협을 횡단하며 한국 국민들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한 수영 선수로서 그의 인기는 적어도 한참 후배인 박태환이 등장하기 전까지 거의 독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1980년 처음 대한해협을 횡단을 시작한 이후 그의 무대는 수영장이 아닌 바다로 바뀌었다. 최근에는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2000년 다시 대한해협을 횡단했으며, 2003년에는 ‘삼부자의 독도사랑’을 표방하며 장성한 두 아들인 성웅, 성모씨와 함께 독도를 횡단했다. 일본과의 영유권 분쟁에 시달리는 독도를 두고 볼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 이후에도 지난해 7월까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을 기리는 의미로 독도 33바퀴를 도는 도전을 감행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환갑이 되는 내년, 광복절을 목표로 재차 대한해협 횡단을 계획한 그. 그러나 야심찬 그의 계획은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미완의 대장정이 되고 말았다. 첫 아내를 먼저 보내고 오랜 세월 홀로 지내다가 새로운 인연과 결혼한지 불과 4개월 만의 일이었다. 아버지의 행복한 결혼을 축복하며 기뻐했던 아들들의 슬픔은 깊고도 컸다. 삼우제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큰 아들 성웅씨는 아버지를 떠나보며 가슴 속에 응어리진 슬픔을 긴 한숨으로 털어놓았다.

아직도 생생한 아버지의 마지막 목소리
“지금도 솔직히 황망할 따름이에요. 몸이 아프시거나 지병이 있으셨다면 모르겠는데, 아시다시피 늘 건강하셨거든요. 돌아가시기 전날 저녁 저한테 전화를 하셨어요. 내년에 대한 해협을 횡단하는데 믿을 사람이 큰 아들 밖에 없다고 하시면서 함께 하자고 하셨죠. 지금은 아버지가 힘들어도 곧 다시 일어설 테니 조금만 힘내자고 하시면서…. 로또 맞으면 차 사주시겠다는 농담까지 하면서 전화를 끊으셨거든요. 늘 자식들에게 뭔가를 해주지 못해 안타까워하셨어요. 그 다음 날 아침에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죠.”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건강상의 문제가 없었던 아버지였기에 처음에는 운명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했다는 성웅씨. 충격을 받은 동생을 추슬러 장례를 치르기 위해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한스러웠다.
“어머니도 제가 군대에 있을 때 돌아가셨어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심장마비셨죠.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황이 그때랑 너무 똑같았어요. 당시에도 어머니는 저와 저녁에 마지막 통화를 하고 난 뒤 아버지가 돌아가신 오전 시간에 돌아가셨거든요. 부모님을 모두 그런 식으로 떠나보냈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정신이 아득해지더군요. 안 그래도 얼마 전 아버지가 방송 때문에 해남으로 내려오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일이 바빠 못 간 것이 너무 한스러웠어요.”
아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평생을 사리사욕 없이 살아온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대한해협 횡단부터 시작해 아버지는 나라에 분위기가 어수선 할 때마다 국민들에게 용기와 자긍심을 심어주고 싶다는 일념으로 매번 새로운 도전을 계획했다. 때로는 그런 아버지를 시기한 사람들이 이런 저런 말들을 만들어 내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결코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해했던 부분이 ‘조오련은 돈이 많을 것이다’라는 것이었어요. 나름대로 이름이 알려지셨고 대한해협 횡단을 비롯한 여러 번의 프로젝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상은 정 반대였어요. 아버지는 이제까지 해 오신 일에 거의 자비를 다 쏟아 부으셨거든요. 이제까지 한강 6백리 완주, 독도 횡단 모두 아버지 홀로 시작하신 일이었어요. 그러다 조금씩 지원이 들어오면 보태는 정도였죠.”
성웅씨는 “아버지가 수영 코치만 했더라면 나름대로 돈을 모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단 한 번도 돈을 벌기위해 일을 벌인 일이 없었던 아버지였기에, 때론 자식의 입장에서 불만도 없지 않았다. 내년을 목표로 준비했던 대한해협 횡단 역시도 세상의 눈에는 어떻게 비쳐졌는지 모를 일이지만, 필요한 지원이 거의 이뤄지지 않아 힘겨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포기를 말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바보’셨어요. 늘 사람들에게 기쁨과 용기를 주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일을 밀어붙이셨죠. 이번에는 심지어 결혼 축의금으로 들어온 것 중 남은 돈까지 보태며 정말 열심히 준비 중이셨어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싫진 않았어요. 다만, 아들로서 이제 좀 편안하게 사셨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죠. 간혹 힘이 드실 때면 그래도 장남이 의지가 되셨던지 속을 털어놓으시곤 했어요. 언젠가 양자강 4km를 수영으로 내려오는 계획을 세우셨는데, 결국 여건이 안 돼 어그러졌어요. 그때 많이 힘들어 하신 기억이 나네요. 그래도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으시고 곧 또 다른 계획을 세우셨죠. 멈춤이 없는 분이셨어요.”
  
아버지의 재혼을 가장 기뻐했던 아들, 그래서 더 큰 슬픔
철인 같던 아버지도 8년 전 아내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아들들에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평생을 함께한 반려자를 잃은 아버지의 상실감은 컸다. 당시 성웅씨는 군대에, 동생인 성모씨는 수영 훈련으로 집을 떠나 있었기에 아버지의 그러한 슬픔을 위로하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어쩌면 아버지가 매번 새로운 도전에 몰두하신 것도 그런 슬픔을 잊기 위해서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4개월 전 아버지와 재혼하신 새어머니는 그런 면에서 저희에게 너무도 고마운 분이시죠. 저는 그때 1년간 호주에서 일을 하고 막 왔을 무렵이었는데, 어느 날 결혼을 하신다는 거예요. 성모와 저는 대찬성이었어요. 두 분 사이가 너무 좋으셨어요. 아버지가 눈치를 보는 것도 처음 봤죠. 그렇게 다시 행복하실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속절없이 떠나셨네요.”
말이 멈출 때마다 깊은 한 숨을 내쉬는 성웅씨의 얼굴에는 짙은 회환이 느껴졌다. 누구나 그러하지만, 자식으로서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후회가 남기 마련. 그 역시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은 한으로 남은 듯 했다.
“이제까지 아들이라고 해서 아버지에게 제대로 된 효도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게 너무 후회가 되요. 제 입장에서 모든 게 한 업이 죄송해요.”
그러나 이제는 그가 가장이 된 이상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삼우제가 끝나고도 이틀을 더 집에 머물며 새어머니를 위로했다는 성웅씨. 아직은 아버지의 죽음을 감당하지 못하는 동생 성모씨를 다독이는 것 역시 그의 몫이다.
“공교롭게도 결혼하신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신 것을 두고 몇몇 사람들이 편협한 시선을 보내기도 하지만, 새어머니가 아버지께 어떻게 하셨는지 저희가 가장 잘 알아요. 누가 뭐라해도 두 분은 정말 행복해 하셨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