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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호텔 폭탄테러에서 구사일생 도신우 회장
인도네시아 호텔 폭탄테러에서 구사일생 도신우 회장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09.24 1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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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이 더 남아 있다고
숙제를 주신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좀 더 덕을
쌓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생 겪어보지 못할 테러 현장
지난 7월 17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한 호텔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했다. 이번 테러로 9명이 사망했고 50명이 부상을 당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유일한 한국인은 모델센터 인터내셔널의 도신우 회장.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호텔 로비에 있는 레스토랑을 찾았던 그는 “만약 과일을 먹기 위해 테이블을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다른 세상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오전 7시 40분경 터진 폭탄은 호텔 천장을 무너뜨리면서, 로비 안의 구조물을 내려앉게 만들었다. 도신우 회장은 무너져내린 구조물에 덮여 15분 정도 정신을 잃었고, 의식이 돌아오자 아수라장이 된 호텔을 겨우 빠져나와 응급차를 탈 수 있었다.
“바로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정신을 잃었었다고…. 호텔 로비 유리가 산산조각이 나서 힘들게 그곳을 기어서 나왔어요. 옆에 있던 외국 여성이 부축을 해줘서 겨우 호텔 밖으로 나갈 수 있었어요. 출발하려던 구급차를 극적으로 탔죠.”
그는 천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있었던 곳에서 조금만 떨어져 있었더라면 사망자 중 한 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출혈이 너무 심했던 그는 “정신을 차려보니 다리가 뜨거웠다”며 “피가 수도꼭지 틀어놓은 것처럼 멈추지 않았다”고 말했다.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갔는데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어요. 이미 다른 호텔에서 부상을 당한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우리까지 갔으니 아수라장이었죠. 의사들도 다 쩔쩔매고, 전 출혈이 도무지 멈추지 않아 사정사정을 해서 겨우 치료를 받았어요. 마취를 하고 왼쪽 팔꿈치, 오른쪽 다리에 봉합수술을 했죠.”
수술을 마쳤을 무렵 그의 휴대전화는 불이 났다. 부상자 중 한국인이 있다는 사실이 대사관을 통해 보고됐고, 그 부상자가 도신우 회장인 것이 알려진 것. 가족과 회사 직원들, 그가 패션쇼 기획차 자카르타에 간 사실을 알고 있던 지인들은 그의 부상에 충격을 받았다.
“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괜찮다고 했죠. 치료도 받았으니까 조금은 안심이 됐고요. 그런데 수술을 하고 입원실로 가는데 좀처럼 다리의 부기가 가라앉을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점점 부어오르기 시작해 딴딴한 느낌이 왔어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죠.”
두 시간 후에 엑스레이 사진을 찍을 수 있었고 확인한 결과 다리에 스크루가 박혀 있었다. 다리뼈 가까이에 깊이 들어가 있어 빨리 수술을 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한 시름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더구나 병원의 사정은 열악해 믿음이 가지 않았다. 결국 한국에 있는 의사인 친척과 상의를 한 후, 바로 수술에 들어가기로 했다.
“척추마취를 하는데 한번에 못하는 거예요. ‘어이구,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솔직히 너무 무서웠어요. 척추마취를 잘못하면 하반신이 마비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때마침 그 생각이 나는 거예요. 초조하고 긴장돼 죽겠는데 의사들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수술을 하지…. 지금 다시 생각해도 끔찍해요.”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다. 그러나 평소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지 말라는 의사의 당부에 혹시라도 자면서 무의식중에 움직일까 봐 한숨도 못 잔 채 그날 밤을 꼬박 새웠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어요. 나한테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도 이만한 게 천만다행이죠. 사고가 난 그날은 패션쇼 기획자 미팅도 있었고 모델 오디션과 디자이너들도 만나기로 했는데, 다 취소했어요.”
두 번의 수술을 마치고 나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비행기 안에서 하늘을 바라보는데 참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모델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청년 시절, 그리고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에 대해. 그는 “아무래도 해야 할 일들이 아직 남아 있어 숙제를 주신 것 같다”고 말했다.

모델이라는 단어가 없던 시절,
최초의 남성 모델

도신우 회장은 1960년대 패션모델이 됐다. 당시 한국에서는 모델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중앙대학교 연극학과 재학 시절, 모델을 하면 맞춤양복을 공짜로 준다는 이야기에 솔깃해서 모델 일을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옷을 워낙 좋아했어요. 교복을 입던 시절에도 옷을 따로 챙겨 가지고 다니면서 학교를 마치면 갈아입고 다닐 정도였죠(웃음). 대학에 가서는 옷을 마음대로 입을 수 있어서 어찌나 좋던지…. 연극에 막 심취할 무렵 모델 일을 알게 됐어요. 당시에는 맞춤복밖에 없던 시대라, 모델이 입었던 양복을 팔 수 없어 그대로 지급을 해줬거든요. 옷을 입고 사진을 찍으면 돈도 주고 양복도 준다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때부터 모델 일에 그냥 빠져들었죠.”
고급 맞춤양복이 샐러리맨 월급보다 더 비싼 시절이었다. 그는 옷을 신주단지 모시듯했고 집에는 그가 가져오는 양복으로 넘쳐났다. 옷을 주체할 수 없어 2단 붙박이장을 직접 만들 정도였다.
“연극과 모델 일을 겸하다가 1969년에 동료 여섯 명과 국내 최초의 직업모델단체인 ‘왕실모델클럽’을 만들었어요. 반응이 대단했죠. 쇼가 끝나면 사인해달라는 사람들이 기다리기도 했고, 지방으로 패션쇼를 하러 간 날이면 숙소 근처로 여자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얼굴 좀 보자며 성화였어요(웃음). 한번은 식당에서 쇼를 한 적이 있는데, 무대가 따로 없어서 식탁 사이사이에 합판을 올리고 그 위를 모델들이 걸어나갔어요. 그런데 합판과 헝겊이 밀리면서 모델들이 바닥으로 꽈당 넘어졌죠. 어휴, 지금 생각해봐도 아찔한 순간이에요. 그만큼 패션이나 모델 문화가 정착이 되지 않았던 시기죠.”
1973년 모델 활동이 5년째 접어들 무렵, 그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세계맞춤양복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세계 80개국에서 각각 다섯 개의 맞춤양복을 출품했는데 한국이 ‘월드베스트 10’ 안에 들었다. 모델산업이 전문화된 선진국 문화를 보면서 그는 자극을 받았다. 특히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지고 모델 활동을 하는 일본인 모델을 만나고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후 모델과 패션산업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그는 1984년 ‘모델센터 인터내셔널’을 출범시켰다.
“외국 모델들은 프라이드가 굉장히 강했어요. 한번은 영국인 모델 집에 초청을 받아 간 적이 있었는데 ‘모델로 사는 게 너무 행복하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저도 모델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국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었어요. 누구라도 이 문화를 전문적으로 정착시켜야 하는데, 내가 먼저 시작했으니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이 들었죠. 그때는 정말 공부 많이 했어요(웃음). 잡지도 많이 없던 때라 보따리상을 통해 겨우겨우 외국 잡지를 구하고, 인터넷도 없었으니 정보가 많이 부족했죠.”
그렇게 도신우 회장은 경영행정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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