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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도선수권 2연패 왕기춘 선수 심부전증 앓고 있는 어머니를 향한 지극한 사랑
세계유도선수권 2연패 왕기춘 선수 심부전증 앓고 있는 어머니를 향한 지극한 사랑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10.18 14: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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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의 시련으로 15년 동안 쌓아온
모든 것을 모래성처럼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그때 어슴푸레 떠오른 얼굴, 바로 어머니였다”


무뚝뚝한 왕기춘의 얼굴에 오랜만에 미소가 피어났다. 1년 전만 해도 다시는 웃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판정시비 속에 ‘확실한 금메달 후보’로 여겼던 선배 이원희를 이기고 베이징으로 간 그에게 쏠린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갈비뼈 부상을 당하고도 투혼을 발휘해 은메달을 얻었지만, 금메달이 아니면 무엇도 인정받지 못하는 한국의 엘리트 스포츠 풍토에서 자신이 가져온 은메달은 초라하게만 보였다. 자괴감에 운동을 그만두고 싶은 충동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보란 듯이 다시 일어섰다. 올해 2월 파리 그랜드 슬램과 모스크바 그랜드 슬램을 제패하며 페이스를 끌어올리더니, 마침내 세계 정상의 자리에 섰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세 글자, 바로 ‘어.머.니’였다. 

올림픽 후 세 달 간의 방황, 그러나 주저앉을 수 없었다
“정말 술을 원 없이 마셨어요. 그때만 해도 술밖에 위로가 되지 않았어요. 운동을 하고부터 몇 번 힘든 일이 있었는데, 올림픽 이후에 찾아왔던 방황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솔직히 아직도 다 아물지는 않았어요. 그때 이야기만 나오면 웃다가도 얼굴에 미소가 사라져요.”
태릉선수촌에서 만난 그는 지난해 쓰린 기억의 단편을 이렇게 말했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평상심을 찾는 데 꼬박 세 달이 걸렸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도 게임에서 한 번 지면 사나흘은 식음을 전폐하던 그였지만, 올림픽의 기억을 지우는 데는 그 시간의 20∼30배가 더 걸린 셈이다.
방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는 정훈 대표팀 감독으로부터 “너 왜 유도 시작했느냐”라는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가슴을 파고드는 한마디에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그.
“다시 운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정훈 감독님 덕분이었어요. 처음부터 다시 잡아주셨죠. 저는 그저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따라간 것뿐이에요. 그렇게 이를 악물고 훈련을 하니까 훈련한 만큼 성과가 나오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는 “그때는 무슨 얘기를 들어도 남의 얘기 같았는데, 감독님 말씀은 뇌리에 오래 남았다”고 회상했다. 감독의 얘기대로 ‘이번 일로 15년 동안 쌓아온 것을 모래성처럼 다시 무너뜨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때 어슴푸레 떠오른 얼굴은 어머니였다.

가슴속에 사무치는 그 이름 ‘어머니’
그렇게 방황하던 중 20년간 만성 신부전증을 앓아오던 어머니의 존재가 다시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 유도부 합숙비를 댈 수 없어 숙소에서 취사를 자청하며 그를 돌본 어머니였다.
“초등학교 때는 꽤 잘살았는데, 제가 중학교에 입학할 때쯤 집이 많이 힘들어졌어요. 제 뒷바라지를 위해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죠. 매일 새벽 여섯 시면 유도부에 나오셔서 15인분의 아침밥을 지으며 일과를 시작하셨어요. 아침밥을 시작으로 유도부의 모든 끼니를 혼자 다 지어주셨고, 설거지에 빨래까지 다 하셨어요. 오후 운동을 갔다 오면 유도복이 땀에 흠뻑 젖어 3∼4kg 정도가 되는데, 그 열다섯 명의 옷을 혼자 세탁하셨어요. 말씀은 안 하셨지만 굉장히 힘드셨을 거예요.”
그는 어머니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가슴속을 관통하기라도 한 듯 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머니는 현재 아들의 경기를 마음 놓고 보지 못하는 상황이다. 항상 안전에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스포츠 경기 같은 긴장되는 순간은 볼 수가 없다. 그가 어릴 때부터 각종 대회를 휩쓸 때에도 어머니는 경기장 주변에서 기도만 하다가 결과를 전해들었을 뿐이었다. 베이징올림픽이 끝난 뒤 지난 추석 아침에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다. 부상 때문에 아쉽게 금메달을 놓친 아들의 아픔이 심한 스트레스로 엄습했던 것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시면 안 되는데, 저로 인해 마음고생이 심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도 이번에는 기분 좋은 소식을 전해드려서 한결 마음이 가볍습니다.”
어머니는 1년간 모진 마음고생을 하던 막내아들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을 풀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도 또다시 조용히 기도만 올렸다.

무뚝뚝하지만 알고 보면 속 깊은 효자
그는 항상 곁에서 말없이 응원해주는 부모와 가족이 있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말을 가족에게 직접 한 적은 없다고.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좀 무뚝뚝한 편이에요. 표현을 잘 못해요. 그러면 안 되는데, 집에서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말도 거의 하지 않아요.”
주변 사람들은 그가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정도 많고 속이 깊은 청년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태릉선수촌에서도 소문난 효자다. 해외에 경기라도 나가면 수시로 어머니의 안부도 챙기고, 얼마 전에는 태릉선수촌에서 받는 얼마 안 되는 훈련수당을 모아 아버지에게 중고차를 선물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오래된 경차를 타고 다니셨어요. 제가 비록 많은 돈을 버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좀 더 좋은 차를 타고 다녔으면 하는 바람에서 얼마 전에 선물로 사드렸어요. 부모님이 해주신 것에 비하면 제가 한 일은 정말 작은 거죠. 평생 동안 갚아나갈 생각이에요.”
스물두 살답지 않은 어른스러운 대답이다. 그는 한 차례 홍역을 치르고 나서 한층 성숙해 있었다.

파죽의 44연승, 왕기춘의 전성기는 이제부터  
마음을 다잡고 훈련에 전념하기 시작한 그의 기세는 무서울 정도다. 그는 올림픽 결승에서 패한 후 작년 12월 일본가노컵유도대회를 시작으로 이번 세계선수권대회까지 44연승을 거두면서 체급 최강자로 우뚝 섰다. 이원희가 보유하고 있는 국내 유도 최다 연승 기록(47연승) 경신도 바로 눈앞에 두게 됐다. 이제 불과 스물두 살, 그의 시대는 어쩌면 지금부터 시작인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지는 날이 오겠지만 기록을 깨고 싶어요. 국내 경기든 국제 경기든 매 경기가 결승이라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모든 운동선수가 그렇겠지만, 그의 승부욕은 남다르다. 특히 유도에 있어서는 조금의 실수도 용납 못하는 완벽주의자다.
“다른 것들은 모두 져줄 수 있어요. 그러나 유도만큼은 절대 그럴 수 없어요. 유도는 어느 하나도 빈틈을 보이면 안 됩니다. 요즘은 전국체전을 앞두고 하루에 6∼7시간 운동을 하면서 몸 만들기에 집중하고 있어요. 운동은 양보다 질이 중요하기 때문에 매사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올림픽에 한이 맺힌 그이기에 올림픽에 대해 남다른 각오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물론 속으로는 단단히 벼르고 있죠. 그러나 아직은 부담 갖고 싶지 않아요. 2012년 런던올림픽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고, 다른 대회도 중요하니까요.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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