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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덟 자폐성 장애아들 둔 박성효 대전시장 부부, 세상의 행복을 누리는 키워드
스물여덟 자폐성 장애아들 둔 박성효 대전시장 부부, 세상의 행복을 누리는 키워드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11.24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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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에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어쩌면 대전시장이 누구인지 관심조차 없을 수 있다. 하나 뉴스 등을 통해 지난 3년간 대전광역시의 눈부신 변화는 크든 작든 접했을 것 같다.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드는 이야기로 최근 책을 발간했다는 박 시장. 딱딱한 시정활동이겠거니 생각하고 그 책을 펼쳐보았는데, 두 시간 만에 술술 읽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장이 되기 전에 썼다는 그의 예전 자서전도 어렵게 구해 읽게 됐다. 어릴 적 읽었던 위인전집에서나 나올 법한 선한 사람…. 그 선(善)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 애정을 갖게 되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같은 시련이 있기 때문이라는 동병상련?

스물일곱이 된 박 시장의 아들 용현 씨는 자폐성 장애를 안고 사는 청년이다. 아내의 해산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장애를 얻게 된 아들. 특별히 남의 마음 아프게 한 일 없고, 남에게 해를 끼친 일도 없었던 박 시장으로서는 당시에는 시련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그 시련은 오래가지 않았다. 죄인처럼 모든 고통을 감내하는 아내 백기영 여사의 눈물을 봐서였다. 그리고 애써 마음을 추슬렀다.

“공무원 생활 때부터 제가 유독 어려운 사람에게 관심을 많이 기울이자, 많은 이들은 장애를 안고 사는 아들 때문에 그런가 보다 하고 먼저 규정하더군요. 참 불편했어요. 남들보다 불편한 몸을 가진 아들, 그래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어렵고 힘든 일도 많은 아들이지만 저희 부부의 아들이에요. 가슴 아플 때가 순간순간 있지만 장애인이라고 규정짓고 그에 맞춰 살아가게 한다면 우리 아들이 더 불행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희 부부에게 아들은 장애인이 아니에요. 가족 중 키도 가장 크고, 가장 밝고 순수한 청년으로 자라줬거든요. 어쩌면 장애는 또 다른 능력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박 시장 부부의 시련과 아픔은 세상 사람들이 예측한 것만큼 깊거나 크지 않았을까. 아니다, 나름의 상처는 분명 있지만 부부는 현실을 이내 인정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아들을 바라보았고, 그 눈으로 더 넓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일련의 제 노력과 성과들은 아들과는 큰 관계가 없습니다. 겸손도 아니고 숨기기 위함도 아닙니다. 물론 아들의 존재와 역할이 우리 가족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의 자양분은 될 수 있습니다. 하나, 제 일에 아들의 문제가 더해지면 매번 곤혹스러울 따름입니다.”

박 시장 부부는 여성지 인터뷰가 처음이다. 아들 이야기를 들추어낼까 봐 인터뷰를 거절할 마음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분명 아들은 부부의 인생에 많은 덤을 주는 존재가 됐다. 길에서 만나는 시민들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하고 이런저런 어려움을 토해낼 수 있는 편안함과 가까움에는 시장 역시도 자신들과 같은 시련이 있기 때문이라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편은 그동안 환경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어요. 아주 바쁜 시장이죠(웃음). 아들은 언제나처럼 저와 함께하죠. 함께 운동하는 우리 모자는 남편이 그간 일궈놓은 곳에 가요. 아파트 뒤에 갑천이라는 하천이 있는데, 그곳에서 자전거도 타고 조깅도 하죠. 그러면서 시민들의 반응도 보고 듣게 돼요. 그러면 시장인 남편에게 생생한 현장 보고를 할 수 있고, 시정 운영에도 도움이 되겠죠. 그러고 보니 우리 용현이도 아버지 일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아들인 셈이네요(웃음).”

박 시장은 3년간 대전광역시에 5백30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나무 심기가 곧 경제이며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라는 생각에서다. 이뿐만이 아니다. 행복한 하천 만들기라는 일념 아래 3대 하천을 대전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인터뷰 도중 “말보다 보는 게 더 중요하다”며 박 시장이 안내한 3대 하천. 정말 많은 시민들이 야구, 축구는 물론 자전거, 조깅, 산책 등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대전의 3대 하천은 생태를 복원함으로써 자녀를 둔 가정에 교육적인 이점까지 선사하는 것이었다.

# 소통과 나눔을 통해 모두에게 행복을 주고 싶다

대학원 1학년 때, 친구의 소개로 처음 만난 아내는 당시 대학교 1학년. 그러나 첫 만남에서는 그저 형식적인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 그후로 박 시장이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연수를 받던 시절 또 다른 친구가 여자를 소개해줬는데, 2년 전 만났던 지금의 아내가 앉아 있더란 것. 풋풋한 여학생에서 성숙한 여성으로 변한 모습에서 ‘인연’을 느낀 박 시장은 이후 사랑을 키워 결혼을 하게 됐다.

“1982년에 결혼을 했으니 어느새 28년이 됐습니다. 사실 전 아내에게는 살가운 말 한마디 못 건네는 스타일입니다. 표현은 잘 못하고 마음으로만 챙기는 편이죠. 더욱이 시장이 된 지난 3년간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습니다. 많은 시간을 함께해주지 못하는데도 아내는 늘 한결같이 묵묵한 내조를 해주고 있습니다.”

쉬지 않고 달려온 시간. 더욱이 시장이 되었을 때 ‘기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그에게 보냈던 대전 시민들의 기대는 무척이나 컸다. 약속을 실천하고 변화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어찌됐건 자신의 역할이라 생각한 박 시장은 누구보다 분주히 움직이고 불철주야 일을 해야 했다. 끊임없는 소통과 나눔을 통해 모두에게 행복을 주고 싶은 것이 지난 3년간 그리고 앞으로 박 시장이 펼쳐야 하는 소신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결혼 후 온전히 가족과 함께했던 시간은 지난 1999년 1년간 미국에 파견연수를 갔을 때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못했던 가장의 역할도 하고, 가족과 여행도 많이 다녔던 시간이었죠. 무엇보다 제 평생 가장 긴 휴식을 보낸 때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이따금 힘이 들 때면 그때를 떠올려봅니다. 다시 가보고 싶기도 하면서 말입니다(웃음).”

하나 구두장수에게는 구두만 보이고 가방장수에게는 가방만 보인다고, 당시 지방행정가인 그의 눈에는 미국의 행정시스템이 속속들이 들어왔다. 녹지, 버스노선, 복지프로그램 등 눈에 보이는 것마다 그냥 지나치지 않았던 결과로 그는 이후 수많은 것을 일궈냈다. 그렇다 보니 “다시 가보고 싶다”는 그의 말이 ‘쉬고 싶다’는 것보다 ‘또 다른 도시행정시스템을 답사하러 떠나겠다’는 말로 들려오는 듯했다.

“남편은 어떤 일에 한번 동력이 걸리면 끝을 봐야 해요(웃음). 이제는 어느 정도 면역이 돼 뭐라고 하기보다는 지켜보고 응원해줘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게다가 시장 부인으로서 나름의 역할도 있잖아요. 남편이 주로 소외된 사람들을 걱정하고 염려하듯 저 또한 많은 봉사와 위문을 다녀야 할 때가 있거든요. 그러고 보니 어느새 남편의 일과 마음을 공감하는 조력자가 됐네요.”

상냥하고 이해심 많은 아내. 한때는 아들보다 하루만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를 할 정도로 장애를 안고 사는 아들 걱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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