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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만에 고국 방문 자니윤, 부부 동반 귀국 인터뷰
7년만에 고국 방문 자니윤, 부부 동반 귀국 인터뷰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11.24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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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두세 번씩 한국을 방문하는데 올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요.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또 놀라는 것이 아직도 제 목소리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예요. 택시를 타면 기사님들이 목소리만 듣고도 알아봐주세요. 참 오래 지난 일인데, 감사하죠.”

아직도 청바지를 즐겨 입는 그는 1989년 KBS ‘자니윤 쇼’로 국내에 토크쇼의 장을 연 주인공이다. 당시 자니 윤의 인기는 전국적으로 대단했다. ‘자니윤 쇼’는 심각한 사회 이슈를 다루면서도 적절한 유머를 구사해 새로운 감각의 프로그램으로 인정받았다. 토크쇼가 방송되는 날이면 온 가족이 TV 앞에 모여들었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의 말투를 흉내내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한창 ‘자니윤 쇼’가 인기를 끌 때가 제 인생의 황금기였죠. 처음에 담당 PD가 미국으로 찾아와 토크쇼 진행을 해보자고 설득할 때만 해도 재차 거절을 했어요. 미국에서 여러 무대를 서보긴 했지만 이름을 걸고 토크쇼를 맡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나는 못하겠다고 거듭 말하는데, 담당 PD가 하는 말이 ‘누구를 같이 붙여주면 할 수 있겠냐’고 묻는 거예요. 그때 좋아하는 가수가 조영남 씨였고, 그를 지목했더니 당장 섭외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하게 되었어요.”

‘미국을 웃긴 최초의 한국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귀국한 그는 미국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던 ‘자니 카슨 쇼’에 코미디언으로는 가장 많은 34회를 출연하면서 1973년 뉴욕시의 최고연예인상을 받았다. 그의 세련된 입담은 한국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3년 남짓 최고의 시청률로 토크쇼 진행을 이어갔다. 국내의 많은 방송국에서 그에게 장기 출연을 요청했지만 미국 코미디쇼 무대에 복귀하기 위해 1993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성악가 꿈꾸던 소년, 코미디는 내 인생 최고의 선택

실제로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의외의 소감을 전한다. 너무나 점잖은 모습에 어떤 유머가 나올지 좀처럼 예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조용하게 툭 던지는 자니 윤식 유머는 일상에서 묻어 나오는 이야기다. 어릴 적 그는 천성적으로 지루한 것을 싫어해 새로운 일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한 꼬마였다.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 불러서 동네 어른들한테 잘 불려 다녔어요. 노래 몇 곡을 부르면 어른들이 예쁘다고 용돈을 쥐어주셨는데, 교육자이셨던 아버지는 돈 받는 걸 무지 싫어하셨어요. 그래서 그냥 노래만 부르며 돌아다녔죠. 아버지께서 보통 엄하신 분이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유머가 참 많았어요.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대단했는데 자주 하셨던 말씀 중 하나가 ‘사람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잘될 사람은 다 알아서 할 수 있다’는 말이었어요. 원래 저도 중학교만 졸업하면 내쫓으려고 하셨대요(웃음).”

그는 고등학교 방학 중에 친척이 근무하고 있던 미군 부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는 상황이었는데, 기어이 일자리를 받아냈다. 그는 부대 안 페인트가게에서 군용차량에 번호와 사인을 적는 일을 맡아 학비를 충당할 만큼의 돈을 벌었다. 부대에서는 맹랑한 녀석이라고 소문이 났지만 맡은 일을 톡톡히 해내 신임을 얻었다. 시골에서 태어나 동네 밖을 벗어나본 적 없던 그는 세상 밖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고 안정적인 직업보다는 더 큰 세계를 경험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미군 부대에서 일하면서 외국에 나가서 살아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당시 음대에 진학하고 싶었는데 집안의 반대가 있어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 광학사를 지원해 미국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때만 해도 외국에 나가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잘 풀렸던 거죠.”

그는 남들이 하지 않는 일에 대한 도전의식이 강했다. 미국행을 택한 것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뛰어난 성적으로 해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오랫동안 꿈꿔왔던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웨슬리안대학교 성악과에 들어갔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열린다고,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상황이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옛날에는 음악을 한다고 하면 고생길이 열렸다고 했어요. 예술을 하면 춥고 배고프다는 인식이 강했으니까 집에서도 허락을 안 했죠. 하지만 미국에서는 달랐어요. 당시 제 노래실력을 높게 평가해주신 프리다 여사님의 도움으로 성악을 공부할 수 있었어요. 학교를 다니면서 틈틈이 가수 활동도 시작했는데 인기가 꽤 괜찮았죠. 평상시 유머를 좋아하니까 무대에서도 노래를 마치고 몇 마디 이야기를 하고 내려왔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그러다 가수만 하지 말고 코미디도 한번 해볼까 하고, 뉴욕에서 연기와 모던재즈 등을 공부하게 됐고요.”

예비 성악가에서 코미디언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에게 가장 즐거운 것은 사람을 웃기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극장에서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던 친구의 소개로 쇼 오디션에 참가했고, 노래와 유머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에게 출연요청이 쏟아졌다.

“그때 가수들의 출연료가 굉장히 적었어요. 한 1백 달러를 받는 정도였는데, 코미디언은 40분 정도 웃긴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2백50달러를 주더라고요(웃음). 노래를 부르려면 20명의 사람들과 악보를 보면서 연습을 해야 하는데 코미디언은 혼자서도 가능한 일이잖아요. 경제적인 면으로 봐서도 코미디가 낫겠다 싶었어요.”

극장 코미디쇼에서 소문이 나자 방송 출연으로 이어졌고, 드라마 ‘러브보트’, 영화 ‘내 이름은 부르스’를 통해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내 이름은 부르스’는 도미하기 전 한국에서 영화 일을 했던 경험을 살려 직접 시나리오를 쓴 작품이다.

“지금도 무대에 오르고 있어요. 방송은 게스트로 많이 출연하고 라스베이거스 쇼에서는 계속 진행을 맡고 있어요. 미국에서 주로 활동하지만 한국 예능 프로그램도 자주 챙겨보는 편인데, 요즘 한국 쇼는 진지하거나 아니면 너무 웃고 떠드는 분위기인 것 같아요. 사회적 이슈를 다루면서 웃음을 주는 프로그램이 없어서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들어요.”

추석을 앞두고 잠시 귀국한 그는 아침 토크쇼에 나와 녹슬지 않은 입담을 자랑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저를 보고 ‘만나게 돼서 영광입니다’라고 말하면, ‘저는 굴비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식이에요(웃음).”

아내를 만나 사람이 됐다

바쁜 스케줄 탓인지 오랫동안 인연을 만나지 못했던 그는 1999년 18세 연하의 아내 줄리아 윤 씨와 결혼을 했다. 라스베이거스의 한 호텔 송년파티에서 친구의 소개로 만난 아내는 자니 윤의 마음을 단번에 빼앗았다. 그는 처음 아내를 본 순간, ‘난 이제 끝났구나. 지금부터 이 여자의 노예가 되겠구나’ 하고 한눈에 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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