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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개그맨 이동우, 가족과 다시 세상을 나서다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개그맨 이동우, 가족과 다시 세상을 나서다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0.01.14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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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말과 생각, 사람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딸아이가 조금 더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하고 싶다."

겨울치고는 제법 포근함이 깃든 오후, 귀여운 네 살배기 딸 지우의 손을 잡고 온 이동우 부부의 얼굴은 밝아 보였다. 얼마 전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희귀병으로 시력을 잃어가고 있음을 밝힌 이동우. 망막색소변성증은 눈의 시세포가 유전체적 영향으로 퇴행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눈앞의 세상이 좁아져 마치 터널에서 바라보는 듯한 상태가 되어가다 결국은 실명에 이르게 되는 질환이다. 5년 전 발병한 탓에 이미 이동우는 상당부분 시력을 잃은 상태이다. 
“의학적으로는 3급 시각장애인이 된 거죠. 정상인들의 시야가 40∼50도 정도라고 할 때, 저 같은 경우는 5도 미만이에요. 쉽게 말해 보고자 하는 곳만 간신히 볼 수 있는 정도죠. 누군가를 만날 때 어렵사리 초점을 맞춰야 그나마 상대방의 눈을 볼 수 있어요. 그 정도가 현재 저한테 허락된 시력이에요.”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그로서는 세상에 그러한 사실을 알리기까지 오랜 고민과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했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내 상황을 세상에 밝혔다”고 말하는 이동우. 그러한 용기를 얻기까지 변치 않는 믿음으로 그의 곁을 지켜준 아내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딸이 큰 힘이 됐음은 물론이다.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아파해준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 소중한 이들의 응원과 사랑은 그에게 새로운 도전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 됐다.

행복을 꿈꾸던 어느 날 드리워진 어둠
그의 인생에 예기치 못한 어둠이 드리워진 것은 5세 연하의 아내 김은숙 씨와 행복을 꿈꾸며 결혼생활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미 연애 당시부터 야맹증 증상을 감지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이 화근이었다. 결혼 후에도 바쁜 일상 탓에 하루 이틀 병원 방문을 늦추었다. 결국 남편의 야맹증 증상이 점점 심해지는 것을 보다 못한 아내가 병원을 예약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약 좀 먹으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병원에 갔는데… 검사를 하던 의사가 저를 내보내고 아내와 이야기를 했어요. 그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더라고요.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아내가 나와서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가서 같이 이야기를 듣자고 하더군요. 그런데 의사 역시도 말을 잘 못하고 ‘그래도 할 일이 있지 않겠느냐’며 무조건 위로부터 하는 거예요. 아마 제 직업이 연예인이라는 것 때문에 의사도 어떻게 이야기할지 당황했던 것 같아요.”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후 그와 아내는 서로 아무 말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삼십 대 중반, 게다가 갓 결혼을 한 그에게 운명은 너무도 가혹하게 느껴졌다. 절망하는 남편을 지켜봐야 했던 아내의 마음 역시 그보다 덜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저 역시 정말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어요. 그저 놀라서 멍하기만 했죠. 그러다 어서 다른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받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극도의 공황상태를 경험한 뒤 오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백방으로 다른 병원을 찾아 재검사를 받았다. 그러나 결과는 항상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처음 사실을 접했을 때의 충격은 강한 거부와 부정의 시간이 지난 이후 감당해야 했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일말의 희망마저 사라진 뒤 찾아오는 것은 분노였어요. 자포자기한 상태로 하루 종일 화만 났죠. 그 시기가 굉장히 길었어요. 아마 5년 중 3년은 그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와중에 우울증도 같이 겪어야 했죠. 마구 화를 내고 폭발을 하다가 급작스럽게 우울증이 오고,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어느 시기가 가장 절망적이었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하루에도 열 번씩 좌절하고 절망했죠. 5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러한 단계를 거치면서 결국 수긍을 하게 됐어요. ‘이제 정말 난 장애인이구나.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비로소 내일을 생각하고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하게 되더라고요.”
그가 상상하기 힘든 절망을 극복하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은 온갖 짜증을 묵묵히 받아주며 함께해준 아내와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딸 지우 덕분이었다. 해맑은 얼굴로 재롱을 떨며 아빠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천진난만한 지우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내는 “남편이 자랑스럽다”며 힘겨웠던 지난 기억을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처음 남편의 병을 알았을 때도 힘들진 않았어요. 결혼을 하면서 제게 ‘돈을 많이 벌어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어도 지금의 모습을 영원히 보여주겠다’고 했거든요. 항상 한결같았으니까… 그렇게 온화하고 진중한 사람인데 병이 진행돼 눈이 잘 안 보이면서부터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다 보니 스스로도 힘들어했어요. 그러면서 짜증이 많아졌죠. 평소 같으면 화낼 일도 아닌데 쉽게 언성을 높이면서 변해가는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며 저 역시 많이 안타까웠어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남편을 보며 아내는 가슴속에서 또 다른 희망이 깃드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그런 아내에게서 이동우는 꼭 한 번 원망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아내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병이 심해지면서 남편 스스로도 점자 공부 등을 하며 준비를 많이 하고 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책상에 하모니카가 놓여 있는 거예요. 이게 뭐냐고 하니까 하모니카를 배우고 있다고 하더군요.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흔히 앞을 못 보시는 분들이 하모니카를 불잖아요. 왜 하필 하모니카냐고 물으니까 ‘정말 아무것도 못할 때는 밖에서 아무 데서건 하모니카라도 불 수 있지 않겠냐’고 하더군요. 그땐 너무 화가 났어요. 하지만 항상 자랑스러운 가장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실망하지는 않아요. 정말 완전히 눈이 보이지 않는 그날이 온다고 해도 남편은 더 큰일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아내의 소망은 남편이 지금처럼 조금이나마 볼 수 있을 때 가족과 함께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는 것이다. 그 추억은 앞으로 남편이 살아가는 숱한 날들 속에 가족 모두에게 힘이 되는 행복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속 빛을 찾아 새로운 삶을 결심하다
“저 자신이나 가족만을 위한 삶은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제가 태어나서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저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어요. 저를 지켜주는 가족이 있었고 또 제 가족을 지켜주는 누군가가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죠. 그렇게 따지고 보니 은혜를 갚아야 할 사람도 많고, 제가 도움을 줘야 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더군요. 전혀 모르는 분들까지도 다가와 제 손을 잡아주는 그런 사랑과 뜨거운 관심을 무슨 자격으로 받기만 할 수 있겠어요. 받았으니까 줘야 한다는 단순한 논리는 아니에요. 그로 인해 제 마음도 같이 뜨거워졌다는 거죠. 분명한 것은 제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허락하는 한 앞으로는 누군가를 위하는 삶을 살겠다는 겁니다.”
이러한 마음은 어린 딸 지우를 키우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앞으로 커나가면서 ‘장애인 아빠를 둔 아이’로 행여 친구들의 놀림에 상처받지도 모를 딸에 대한 걱정을 털어놓는 그. 게다가 자신의 병이 유전적인 영향으로 딸에게까지 발병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불안감이 없지 않았다.
“어린아이들의 경우 악의가 없다 해도 상처받을 수 있는 말을 하잖아요. 그런 생각이 드니까 막막하더라고요. 그래서 더욱 나중에 지우가 커서 그런 아이들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는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고 싶어요. 유전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물론 걱정이 됐죠. 하지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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