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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경 작가, ‘명품 드라마’의 비밀을 털어놓다
노희경 작가, ‘명품 드라마’의 비밀을 털어놓다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0.04.07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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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삶 그리고 사랑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여주는 ‘노희경표 드라마’라는 말은 ‘명품 드라마’와 동의어처럼 쓰이고 있다. 그녀의 저력은 출판시장에서 일으킨 돌풍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2008년 펴낸 에세이집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는 그동안 40만 부가 팔려나갔고, 지난해 10월 출간된 ‘그들이 사는 세상’ 대본집 역시 3개월 만에 1만5천 부 이상 판매됐다. 그리고 두 번째로 선을 보이는 대본집이 바로 그녀의 대표작 ‘거짓말’이다.

젊은 날 아니면 언제 그렇게 미쳐볼까
배종옥, 이성재, 유호정 주연으로 1998년 3월 방영된 20부작 드라마 ‘거짓말’은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거짓말’의 주인공 성우(배종옥 분)는 유부남인 직장 후배와 치명적인 사랑에 빠지고, 행복했던 부부는 성우의 등장으로 위태롭게 흔들린다. 불륜을 다룬 통속극이라 치부할 만한 설정 속에서 노희경은 세 사람의 감정을 ‘독하다’ 싶을 만치 절절하게 그리며 ‘뻔하지 않은’ 드라마를 빚어냈다.
“너무 개개인의 캐릭터에 푹 빠져 있다 보니 글이 담백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보면 끈적끈적하죠. 신이 넘어가는 속도나 대사들이 정제되지 않아서 지금 보면 창피하기도 하고요. 그러면서도 ‘젊은 날 아니면 언제 그렇게 미쳐보겠나’ 싶어 좋아요.”
노희경은 “책으로 나온 대본을 몇 장 읽으면서 마음이 짠해졌다”라고 털어놓았다.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그들의 사랑에 아파하던 시절이 기억나서다. 주변에서 ‘대본 쓰다가 죽지 않을까’ 걱정했을 정도로 말랐던 그녀는 당시 몸무게가 32kg까지 떨어졌다. 요즘도 1년에 한 편씩은 ‘거짓말’을 본다는 그녀는 배우들이 고생하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제 대본엔 감정 지문이 많은데, 배우들은 그런 걸 처음 받아봤을 거예요. 남녀 배우 할 것 없이 ‘너무 울어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했었죠.”
‘거짓말’의 주인공 성우 역할에 애초부터 배종옥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방영 한 달을 앞두고 배종옥이 캐스팅되면서 대본의 말투를 배종옥에 맞게 다 바꿨다.
“도시적인 이미지의 커리어우먼을 주로 맡았던 배종옥 씨는 사랑에 우는 여자 역할이 처음이었어요.은 처음이다 보니, 12∼13년 된 배우인데도 고생을 많이 했죠. 그렇게 우는 역할은 처음이었는데, ‘안약 써도 되냐’고 묻기에 안 된다고 하니까 황망해하던 표정이 아직도 떠오르네요(웃음).”
그녀는 드라마 작업을 함께 하며 ‘절친’이 된 배우 배종옥, 김여진과 함께 국제구호 NGO인 JTS의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출간되는 책 수익의 일부도 이곳에 기부할 예정이다.
“배종옥, 김여진 씨랑 기부를 받으러 다니기도 하고, 활동 기획안을 써내기도 해요. 하나하나 모든 것에 관여하려면 짜증이 날 때도 있죠. 하지만 친구들과 모여서 ‘얼마를 기부했네’, ‘어떤 구호활동을 했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참 좋아요. 이걸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모여서 쇼핑이나 했겠지, 술 마시며 다른 배우나 드라마 흉이나 봤겠지, 싶어지니까요. 구호단체 활동 정말 재미있는데… 관심 있으면 제게 연락 좀 주세요.”

도대체 ‘마니아’들은 어디에 있는 거야?
“지적인 드라마의 출연”, “진정한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드라마”라는 팬들의 찬사와 언론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노희경의 드라마는 시청률이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평가를 받아도 시청률이 나오지 않으면 속상할 수밖에 없다.
“장사를 하려고 제품을 만들었는데 제품이 안 나가면 당연히 장인의 입장에서는 속이 상하겠죠. 다만 그게 오래가진 않아요. 글을 쓸 때 시청률이 몇 프로 나올지 고민해봐야 소용이 없는 것처럼, 이미 나온 결과를 두고 자책하는 시간도 줄어드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서너 달씩 가기도 했는데 요즘은 빨리 잊어요. 사람들이 ‘너는 참 상처를 안 받는다’고도 하죠. 제 작품에 마니아가 많다는데 대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요(웃음).”
‘거짓말’ 이후에는 ‘노희경표 드라마’에 대한 높은 관심이 부담스러워 후속작은 가명을 사용할까 고민했다는 그녀. 하지만 “다 파고들면 또 알아. 네가 감당해야 될 몫인 거지”라는 방송국 드라마 국장의 조언을 듣고 ‘노희경’으로 정면 돌파를 결심했다.
“지금은 별로 상관 안 해요. 저는 매번 새로운 걸 쓰겠다고 쓰는데 계속 똑같다는 것같이 들릴 때도 있고, 어떨 땐 기분좋게 들리기도 하고요. 가끔은 사람들에게 ‘씹히는’ 드라마이고 싶을 때도 있어요(웃음).”
최근 ‘공부 삼아’ 막장 드라마를 봤다는 노희경은 “시간이 정말 금방 가던데 이건 이것대로 선한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웃었다. “내 드라마는 어떨 땐 내가 봐도 머리가 아파서 팬 서비스가 모자라다는 생각도 든다”고 털어놓았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매번 고통스럽지만, 그녀는 “울며불며 그 길을 간다”고 미소 지었다.
“작년에 처음으로 18㎞의 길을 걸어봤어요. 울면서도 가고, 욕도 하고, 내가 여기 왜 왔나 싶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가기로 했으니 끝까지 가게 되더라고요. 어떻게 시종일관 자신을 믿겠어요. 그냥 순간순간 가는 거지. 어떻게든 결국 종착역까지, 목적한 데까지 가는 게 중요하죠. 다만 이것은 믿어요. 시청률이 잘 나오든 안 나오든 엔딩은 쓰고, 방송은 끝이 난다는 것을요.”
기억에 남는 캐릭터로 ‘거짓말’의 성우(배종옥),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의 인희(나문희) 등을 꼽은 노희경. 젊은 사람들 중에서는 ‘그들이 사는 세상’의 송혜교가 열심히 해서 기억에 남는다고. 송혜교는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극중 커플인 현빈과 연인관계로 발전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공효진 류승범 커플 역시 ‘화려한 시절’을 통해 연인이 되었다.
“재미있어요.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안녕하세요. 누구누굽니다’ 하며 인사하는 상견례 자리를 함께했으니 신기하기도 해요. 들리는 풍문에는 ‘애인 있는 사람은 노희경 작품에 출연하면 안 된다’는 얘기도 돈대요(웃음).”
배우들의 감정이 현실로 이어질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내는 멜로의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노희경은 “잔인할 정도로 연애할 때의 경험, 기억, 상상까지 우려낸다”고 털어놓았다.
“실제로 있었던 일에 상상까지 보태가며 우려먹죠(웃음). 글을 쓰면서 어렸을 때 했던 행동들을 되짚어보고 반성도 하게 돼요. 아직은 우려낼 기억과 상처가 남아 있다는 생각도 들고 재미있어서 멜로가 좋아요.”

내 묘비에는 ‘드라마 작가 노희경’ 새겨야지
노희경은 현재 새로운 드라마를 집필 중이다. 세 자매와 젊은 엄마와 늙은 할머니가 등장하는데, 서울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전문직 여성들이 낙향하면서 벌어지는 얘기다. 서민이나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그녀의 취향이 그대로 담겨 있다. 엄마와 딸들의 이야기를 담다보니 좀 끈적끈적한 느낌이 될 것 같다고.
“할아버지, 할머니 얘기를 쓸 때면 기분이 좋아져요. 이번 드라마에 ‘대장장이 문씨 아저씨’가 등장하는데, 대본에 그냥 ‘문씨 아저씨가 앉아 있다’라는 지문만 써놓아도 기분이 좋아져요(웃음).”
에세이집을 내면서 단어를 뒤집거나, 앞뒤를 바꿀 수 있는 산문의 매력도 느꼈지만 아직은 대본이 주는 매력이 더욱 크다.
“제 글 위에 감독과 배우의 색칠이 플러스되는 것이 좋아요. 특히 어른들만의 향기가 있죠. 어르신 배우들이 대사 치는 건 글로는 그 맛이 안 나요. 그런 작업의 베이스를 만든다는 것이 스스로 기쁘고 좋아요. 혹시 나중에 소설 하나가 ‘빵’ 터지더라도 묘비에는 ‘드라마 작가’라고 쓰고 싶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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