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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오페라 같은 삶 바리톤 김동규, 10년간 혼자 사는 남자의 자유와 음악 이야기
한 편의 오페라 같은 삶 바리톤 김동규, 10년간 혼자 사는 남자의 자유와 음악 이야기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0.04.07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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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를 한 번도 안 봤다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아파요. 가보면 정말 재미있는데….”
클래식의 대중화를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온 그이기에 더욱 와닿는 말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낯선 것이 사실이다. 세 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 외국 가사, 복잡한 전개과정 등 오페라 공연은 이브닝드레스나 턱시도를 입고 가서 봐야만 하는 신성한 곳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외국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어려운 거예요. 스토리는 무척 간단하죠. 사실 스토리는 우리나라 드라마가 더 복잡해요(웃음). 오페라는 하나의 드라마예요. 세 시간이라는 제약된 시간 안에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내용을 복잡하게 쓸 수가 없어요. 더욱이 음악으로 이어지잖아요. 대사로 이어지면 길게 표현할 수 있지만, 시적인 가사로 표현하다 보니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중간에 놓치면 내용이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죠. 사전예습 한 번은 필요해요.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 처음 오면 ‘경복궁’을 잘 못 찾지만, 한번 와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처럼 오페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페라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그는 총 두 권으로 이뤄진 책 ‘이 장면을 아시나요'를 펴냈다. 쉬운 설명과 함께 읽는 재미까지 더해주는 책이다. 그와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속 남자주인공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와 ‘카르멘’의 정열을 설명할 때는 금방이라도 노래가 터져나올 것 같았다. 번뜩이는 눈빛과 말하는 입술을 따라 움직이는 특유의 콧수염은 그 자체가 ‘클래식’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제1막_ 최고의 자리에 오르다
그의 첫 오페라는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였다. 할머니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 옛날이야기를 듣는 느낌이었을까. 그는 마냥 행복해했다.
“성악가라고 해서 모든 작품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토스카, 라 보엠, 춘희 같은 현실주의 오페라는 연륜이 있는 성악가가 하는 게 좋아요. 모차르트, 로시니 등 1700년대 작품들은 젊은 성악가들이 하기에 좋고요. ‘세비야의 이발사’에서는 주인공 로시니 역을 맡았어요. 이발사 역이니까 이발하는 연기를 하는데, 소프라노가 연기를 하다가 가발을 떨어뜨린 거예요. 당황하고 있는 통에 제가 가발을 주워 머리에 씌워주면서 연기를 계속했죠. 사람들이 ‘브라보’라며 손뼉을 쳐주더라고요(웃음).”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해프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 첫 공연에서 그러한 순발력이라니, 역시 타고난 성악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하게 연습한 결과”라고 했다.
“트레이닝을 많이 했어요. 오페라를 보면서 혼자 연구를 많이 했죠. 그러면서 내린 몇 가지 원칙이 있어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관객을 보며 노래한다, 상대방이 오른쪽에 있어도 나는 관객 쪽으로 45도 이상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는 식이죠. 이런 원칙을 철저히 지켜가며 훈련을 했어요. 물론 노래도 잘해야 했고요.”
스스로를 “연습벌레”라고 했지만, 빛나는 노래 실력은 겸손할 줄 몰랐다. 전 아내와 함께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던 그는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을 했다. 타국이라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노래만큼은 자신 있었다.
“한 선생님 앞에서 노래를 했는데 ‘너는 왜 유학을 왔니? 극장에서 노래해야지’라고 하더군요. 운 좋게도 유학 간 지 한 달 만에 무대에서 노래를 했어요. 이후 오디션 의뢰가 이어지고 공연도 했어요. 그 돈으로 학교도 다니고, 모든 과목에서 만점을 받아 학교도 1년밖에 안 다녔죠. 저는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 선생님들이 묻는 곡마다 미리 연습해간 곡들이었죠. 정말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그는 스물다섯 살에 모든 성악가가 꿈꾸는 ‘라 스칼라’에서 공연을 했다. ‘라 스칼라’는 ‘빈 오페라극장’과 함께 유럽의 3대 오페라극장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곳으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 어린 나이에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은 그였기에 자신감도 하늘을 찔렀다.
“굉장히 교만하고 제멋대로였어요. 세계적인 대가가 눈앞에 있어도 ‘나도 저 사람만큼 노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죠. 서양에서는 노래만 잘하면 그만이거든요. 다른 사람들이나 선배들 눈치 볼 필요도 없었죠. 그렇게 독불장군식이 되어갔어요.”

제2막_ 10년간의 싱글인생 즐기는 법
10년 전 그는 같은 성악가 출신의 아내와 이혼했다. 6년 동안 함께 살았고, 아이까지 두었지만 결국 헤어짐을 선택해야 했다. 이탈리아에서의 결혼생활, 누구보다 성공을 이루었지만 가정은 실패했다. 바쁜 스케줄은 아내와 아이를 볼 시간조차 앗아가버렸다.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어요. 일이 잘되면 잘될수록 가정은 충실할 수가 없었죠. 안 좋은 일이 있어도 저는 공연을 가야 하고, 아내는 집에 있어야 하니까 골이 깊어졌죠. 당시엔 너무 바빠 연결고리를 찾을 수도 없었어요. 서로가 서로에게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라는 질문을 던졌고, 답은… 결별이었어요.”
이혼의 아픔은 컸다. 자신에게 “지금 행복하느냐”고 물었지만, 답할 수가 없었다. 승승장구하던 극장 생활도 의미가 없어졌다. 결국 화려했던 유럽 생활을 모두 뒤로하고 맨몸으로 귀국했다.
“한국은 날 반겨주는 분위기였어요. 내 이름을 보고 표를 사줬고, 박수로 따뜻하게 맞아줬으니까요. 그렇게 상처를 치유해갔던 것 같아요.”
상처와 치유 모두 무대에서 이뤄졌다. 단 한 가지, 아이에 대한 그리움은 지울 수가 없다. 아내와 아이는 현재 독일에 살고 있다. 이혼 후 한 번도 왕래를 못했다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말을 이어갔다.
“1995년 2월 14일생이니까… 올해 열여섯 살이네요. 아이는 이제 다 컸겠죠? 정말 많이 보고 싶어요. 그런데 그쪽에서 연락이 안 되니까… ‘언젠가 만날 수 있겠지’라는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분위기가 무거워진 듯해 그의 기분을 바꾸고자 취미생활에 대해 물었다. 그는 운동 마니아답게 ‘할리 데이비슨 동호회’ 멤버로 모터사이클을 즐기기도 하고, 고가의 독일산 말을 소유해 승마를 하는 즐거움도 누리고 있다. 10년간의 독신생활이 너무 편해진 걸까. 무척이나 잘 생활하고 있는 그에게 “재혼할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
“결혼은 언제나 하고 싶어요. 제가 부른 모든 노래와 명예를 통틀어서 사랑과 맞바꿀 수 있어요. 가장 중요한 게 사랑이고, 사랑이 힘든 것도 알고, 고귀함과 가치도 알죠.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사랑에 섣불리 다가설 수 있는 용기가 아직은 없어요.”
군중 속의 외로움일까.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와 박수갈채를 받는 그이지만 한편으로 외로움도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그 외로움도 즐기고 있노라”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해요. 그곳에서 외로움을 느끼고 싶어하죠. 저는 외로운 공간을 구속당할 때 못 견뎌해요. 여자를 사귀더라도 일주일에 한두 번 이상은 안 보고 싶죠. 가까운 사이일수록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거든요. 혼자 살기 때문에 아쉬움도 있어요.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면 그만큼 시행착오도 많죠. 밥 먹을 때도 좀 그래요. 살기 위해 먹는다지만, 세상엔 맛있는 음식이 참 많잖아요. 좋은 사람과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건 큰 행복인데, 그런 건 좀 아쉬워요.”
자유로운 영혼. 그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그는 자신보다 노래를 더 잘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바로 물러날 것이라고 했다.
“노래를 안 하게 되면 혼자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고 싶어요. 여행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멋진 일들이 많이 생기거든요. 사회의 틀 속에서 이미 정해진 것과 다름없는 친구들 말고, 나의 명성과 상관없이 그저 웃으며 헤어질 수 있는 그런 친구들요. 그것은 자유에 대한 동경일지도 모르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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