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13:00 (토)
 실시간뉴스
코트의 황태자, 전설이 되다 LEGEND OF BASKETBALL DIARY 우지원
코트의 황태자, 전설이 되다 LEGEND OF BASKETBALL DIARY 우지원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0.08.01 21: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울산 모비스 팀에서는 그의 은퇴를 기리기 위해 그의 등 번호 10번을 영구 결번시키기로 했다. 대한민국 농구 황금시대의 주역이었던 그가 어느덧 세월과 함께 팀을 이끄는 주장이 되었고, 최고의 팀으로 팀원들을 이끌었다.
--------------------

아직은 일반 사복보다는 유니폼이 더 편하다는 그이지만, 코트의 황태자에서 최고의 꽃중년이라는 수식어가 미안할 정도로 멋진 모습으로 인생 2막을 이제 막 시작하고 있다. 모델 뺨치게 멋진 스타일로 10년 전 그때, 기자의 소녀 시절 설렘을 되살려준 우지원.

블랙 싱글 원 버튼 슈트 엘르옴므
그레이 타이와 화이트 셔츠 해리스톤
블랙 레더 밴드 워치 포체

-------------------------
당신이 1970년대에 태어났고, 80년대 청소년기의 방황을 경험하고, 90년대 젊음의 뜨거움을 만끽했다면 그 추억 속에는 농구대잔치의 한 장면이 남아 있을 것이다. 서늘한 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농구장은 사람들로 빼곡히 들어찼으며,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의 대항전이라도 열리는 날이면 그 어떤 국가 대항전보다도 그 열기가 강렬했다. 그 중심에는 오빠부대의 선봉을 도맡았던 코트의 황태자 우지원이 있었다. 냉철한 승부사 이상민과 람보 슈터 문경은보다도 수많은 여성 팬들, 비록 농구 자체엔 별 관심이 없는 이들이라도 한 번쯤 관심을 가져 보았을, 당대 톱스타 부럽지 않은 인기를 구가했던 우지원은 그야말로 농구 코트의 반짝이는 별이었다.
배우들은 간혹 잘 생긴 외모가 자신들이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이라고들 말한다. 이 말은 농구 선수 우지원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문경은, 이상민, 서장훈과 함께 뛰던 연세대 시절 그의 컴퓨터처럼 정확한 슈팅 실력은 외모의 빛에 가려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대학 졸업과 동시에 프로에 입단하였고, 그의 27년간의 선수 생활은 가장 화려한 지금 막을 내렸다. 던질 때마다 통쾌하게 그물망에 빨려들어 갔던 3점슛의 매직은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그의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했다.

Queen 30대 초반인 나의 추억에 우지원은 지금의 동방신기나 슈퍼주니어쯤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연세대학교 농구팀 독수리들은 수많은 소녀 팬들의 우상이었고, 그중에서도 넣었다 하면 통쾌한 3점슛을 쏘아대는 당신이야말로 원조 스포츠 스타 아닐까. 아마도 수영의 박태환 선수의 인기보다도 훨씬 더 대단했다고 자신한다.
우지원 그때, 말도 안 되지만 화보도 찍었다. 연예인도 아닌 운동선수가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척이나 쑥스럽고 창피한 일이지만. 당시 농구부 숙소 앞에 팬분들이 늘 가득했고, 농구장의 열기 또한 지금과는 또 다른 뜨거움으로 가득했다. 함께 활약했던 상민이 형이나 경은이 형, 장훈이와 만나면 가끔 그 당시 이야기를 하면서 즐거워 하기도 한다.
Queen 대학 선수에서 프로로 전향하고, 팀을 세 번 이적하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우지원 프로농구 원년 멤버로 대우 제우스 시절부터 총 13시즌을 뛰었다. 든든한 선배들이 있던 대학시절과는 다르게 팀을 이끌어야 했다. 이후 2004년 유재학 감독님이 모비스에 오시면서 나에겐 농구를 크게 보는 눈이 열렸다. 늘 주인공이었던 내가 후배들을 받쳐주고, 팀이 어려울때 위기를 넘겨주는 식스맨이 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셨다. 신생 팀이면서도 가장 경력이 적은 젊은 선수들로 이뤄진 팀이지만 지난 8시즌 동안 팀의 두 차례 통합 우승과 4차례 정규리그 우승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받게 되었다.
Queen 당신의 진가는 전성기 주전 선수 시절보다 식스맨으로 활약한 모비스에서의 마지막 5시즌에서 그 빛을 발하였다. 화려한 과거의 영광이 아닌 팀의 주장으로서의 명분과 2007년에는 식스맨 상까지 받았으니 말이다.
우지원 사실 나만의 알에서 껍질을 깨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 팀의 주포를 맞았던 내가 강철 체력으로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그들에게 든든한 맏형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팀이 어려울 때마다 적재적소에서 위기를 끊어주려고 노력했고, 유재학 감독님의 경기를 크게 보는 눈썰미를 배운 것이야말로 내 인생 최고의 보물이 아닐까.
Queen 지금 생각해도 90년대 농구선수 우지원은 그 어떤 연예인만큼이나 구름 같은 팬을 몰고 다녔던 진짜 스타였다. 잘생긴 외모와 차가운 얼음 왕자 같은 카리스마까지 수많은 소녀 팬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서인지 인간적인 냄새 따위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당신이 친절해지고, 사람다운 매력을 드러내 보이더라.
우지원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사랑을 받았다. 물론 성격 자체가 무뚜뚝하고 낯가림도 심한 편이라서 당시 팬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하지 못했다. 이런 나의 성격은 선수로서도 타의 모범이 된다기보다는 나만을 위해 뛰는, 어쩌면 이기적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그런 모습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선수로서 경험이 쌓이고, 나이를 먹고, 가정을 이루고 나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더라. 받기만 했던 팬들의 사랑과 관심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를 깨달았고, 가정이 생기니 책임감이 생겼다. 아내와 두 딸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아빠의 모습을 기억하게 해주고 싶었다. 내 자리가 어디인가보다 어느 자리에서든 꼭 필요한 사람이란 것에 감사하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스스로 관리했다.
Queen 화려한 선수였던 만큼 당신의 가족들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 대단하다. 특히나 미모의 아내와 두 딸에 대한 애틋한 애정을 자랑하는 고슴도치 아빠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우지원 아내는 결혼하기 전부터 마음 고생이 심했다. 당시 내가 인기 있는 선수이다 보니 당시 연애 사실이 밝혀지고서 아무 죄 없는 아내에게 별별 일들이 다 생겼으니 말이다. 지금이야 스타들이 연애 사실을 공개해도 다 인정하고 응원해준다고 하지만, 그 시절엔 팬들이 아내에게 괜시리 화풀이를 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내한테 항상 미안하다. 그렇다고 결혼하고 나서 잘해준 것도 아니다. 운동하러 다니느라 집에도 잘 있지 못하고, 살림부터 애들 교육까지 아빠의 빈자리까지 채우느라 늘 고생하는 아내. 게다가 애정 표현에 약한 무뚝뚝한 내 성격탓인지, 마음으로는 늘 고맙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아내인데 그만큼의 표현을 못해주어 항상 미안하다. 아이들 역시 아빠는 늘 바쁜 사람이고, 보고 싶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다. 초등학생인 큰딸은 아빠가 이제 은퇴했는데도 왜 집에 잘 없느냐며 투덜거리기도 한다. 인간 우지원에게 아내와 두 딸은 살아가는 이유이다. 특히 늘 고마운 아내에게 앞으로는 살가운 말도 한 번 더 건네려고 노력할 테니, 미처 겉으로 표현 못 하는 나의 마음속 진심까지 부디 알아주길 이 자리를 빌려 부탁해 본다.
Queen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예말이 운동 선수에게는 뼈 아픈 진실 같다. 그 어떤 최고의 플레이어도 시간과 함께 체력적 한계에 부딪히니 말이다. 우지원에게 농구 선수로서의 삶은 어떤 것이었나.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우지원 이제 곧 마흔이 된다. 27년 동안 선수 생활을 했으니 농구를 떠나서 다른 삶을 살 생각은 전혀 없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농구와 코트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농구 선수로 살면서 과분한 사랑도 받아보고, 선수라면 누구나 원하는 우승 챔피언도 되어보고, 선후배들과 함께 농구 전성기의 역사를 써내려 갔다고 생각하니 내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다. 나의 선수 생활은 대한민국 국가대표부터 팀의 벤치를 지키는 백업 선수까지 모든 위치를 다 경험했다는 게 가장 큰 수확이라 생각한다. 농구 경기는 5명의 선수가 뛰지만 그 몇 배에 달하는 선수들이 뒤에 있기 때문에 경기가 이뤄지는 것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내가 농구 코트에서 받은 사랑을 되돌려 주는 방법은 은퇴 후에도 농구 코트에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