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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삶과 사랑 ‘소름 돋는 천재와 세 살배기 아기가 공존했던 사람’ 아내 구보타 시게코 씨가 말하는 ‘나의 사랑, 백남준’
예술가의 삶과 사랑 ‘소름 돋는 천재와 세 살배기 아기가 공존했던 사람’ 아내 구보타 시게코 씨가 말하는 ‘나의 사랑, 백남준’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0.08.02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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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처럼 천진하고 우주처럼 심오했던 남자, 백남준과 함께한 삶에 감사한다”

세계인이 사랑한 예술가 백남준. 하지만 정작 인간 백남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라는 명성 뒤에 가려진 백남준의 가난과 외로움 그리고 좌절…. 평생 그의 예술적 동지였던 아내 구보타 시게코 씨는 남편의 삶을 담담히 회고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완전히 빈털터리였어요. 입는 것도 형편없었고 먹고살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가난한 예술가였죠. 사람들이 슈퍼에서 먹는 것은 쉽게 사지만, 정신적인 분야인 예술품을 팔기는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었죠.”

첫눈에 그의 천재성을 알아봤다
남루한 행색의 가난한 예술가였지만, 그때부터도 백남준의 천재성은 번뜩였다고 한다. 시게코 씨는 첫 만남에서 그에게 마음을 사로잡혔다.
“도쿄에서 열린 공연에서 그의 에너지를 보고 매료되었어요. 한눈에 정말 천재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저 역시 예술가라서 사람을 보는 안목은 있는데, 백남준의 가치를 알아본 거죠. 그는 비디오 아티스트로서 고급과 저급을 모두 망라할 수 있는 폭넓은 사람이었어요. 얼마 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비디오 메시지를 국민에게 보냈어요. 이것이야말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를 이용한 것이죠. 비디오 아트에 있어 백남준은 조지 워싱턴과 같은 존재예요.”
도쿄교육대학에서 조소과를 졸업하고 시나가와 중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던 시게코 씨. 하지만 내면에 에너지가 꿈틀대던 그이는 평범한 미술교사에 만족할 수 없었다. 현대무용가인 이모를 통해 존 레논의 아내이자 아티스트인 오노 요코 등과 교류하며 국제적인 전위예술운동인 플럭서스(Fluxus)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1964년 그이는 전위예술계의 총아로 떠오르던 백남준의 도쿄 공연을 보고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그해 7월 새로운 예술을 갈망하며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시게코 씨는 뉴욕에서 백남준과 운명처럼 재회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2006년 백남준이 타계할 때까지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받는 예술가 커플로 40여 년을 함께했다.

폭넓은 영향 주고받으며 예술가의 한길을 걸었다
구보타 시게코 씨는 “백남준의 그림자에 눌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불행한 비디오 작가”라는 평을 받곤 했다. 국내에서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의 일본인 아내를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도 많았다. 비디오 아티스트로 시작할 때는 “남편의 예술세계를 베껴먹는 얄팍한 날치기 작가로 매도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그이는 더욱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는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야 살 수 있다”고 다짐했다.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마르셀 뒤샹의 무덤’ 등 독창성과 심미안이 돋보이는 구보타 시게코 씨의 작품들은 이렇게 탄생했다. 뉴욕의 3대 현대미술관인 현대미술관(MoMA), 구겐하임 미술관, 휘트니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가진 걸출한 비디오 아티스트라는 점은 그이가 더 이상 백남준의 그늘로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예술가 커플로서 백남준과 구보타 시게코 씨가 나눈 교감은 작게는 비디오를 나르는 것부터 크게는 서로의 작품세계에 영향을 주고받기까지 폭넓고 다양했다.
10년간 연인으로 지내면서도 결혼만은 한사코 거부하던 백남준이 돌연 구보타 시게코 씨에게 청혼하게 된 데는 남모르는 사연이 숨겨져 있다. 평소 백남준은 “난 아이 가질 생각이 없어. 예술하고 작품 만드는 데만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라고. 그리고 나 닮은 아이가 태어나면 골치만 아프지”라고 말할 정도로 아이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하지만 시게코 씨는 어느 정도 삶의 기반이 잡히자 그를 닮은 아기를 원하게 됐다. 병원을 찾은 시게코 씨는 뜻밖에 자궁암 진단을 받았다. 살기 위해 자궁 적출 수술을 받아야 할 형편이었다. 당시 보험이 없던 시게코 씨는 엄청난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일본으로 돌아가 병을 치료하려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때 백남준이 청혼을 했다. 부부의 연을 맺으면 백남준이 든 보험 혜택을 구보타가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0년을 연인으로 지내면서도 결혼만은 한사코 거부하던 ‘바람 같은 남자’가 시게코 씨의 병 치료를 위해 결혼을 결심한 것이다.

생활보다는 예술이 먼저였다
백남준은 해방 후 최대의 섬유업체인 태창방직의 사장으로 ‘섬유업계의 거부’로 불린 백낙승 씨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국내에 딱 두 대밖에 없었다는 캐딜락 승용차 중 한 대가 백남준 집안의 소유였을 정도지만, 정작 그는 평생 가난에 시달렸다. 일본과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집안의 경제적 지원이 있었다. 하지만 시게코 씨가 그를 만났을 당시에는 형들의 연이은 사업 실패로 가산을 탕진한 상태였다.
비디오 아트는 많게는 수십, 수백 대의 TV 수상기가 필요했다. 한마디로 돈이 많이 드는 예술분야다. 백남준은 후원자를 찾기 힘들었던 무명 때는 물론이고 비디오 아티스트로서 명성을 쌓은 날까지도 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상황에 구애받지 않았다. 마치 예술을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좋을 만큼 오로지 창작에만 몰두했다. 작품 창작과 관련해서는 하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가난하고 궁핍했던 1972년, 그는 일본에 있는 형들을 방문해 1만 달러의 유산을 마지막으로 받아왔다. 하지만 그는 그 돈을 눈앞의 경제적 곤궁을 해결하는 데 사용하지 않았다. 맨해튼 시내 골동가게를 뒤져 불상을 사오는 데 써버렸기 때문이다. ‘사바세계의 고통으로 표정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불상은 2년 뒤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 중 걸작으로 꼽히는 ‘TV 부처’로 탄생했다.
“뉴욕에 예술을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이 많아요. 그 친구들에게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예술은 월스트리트보다 더 많은 기회가 있는 분야예요. 열심히 하면 백남준처럼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걸 이야기해주고 싶었어요. 이 책이 젊은 예술가들에게 큰 희망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에도 백남준은 끝까지 예술혼을 불태웠다. 200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 ‘백남준의 세계’가 열렸을 때, 그가 반신불수의 몸으로 병마와 싸워가며 만들어낸 ‘야곱의 사다리’에는 예술을 위해 평생을 바친 한 대가의 눈물겨운 투혼이 투사되어 있었다.

예술을 위해 태어나 별처럼 빛났던 사람
백남준은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에 유쾌하고 낙천적인 성격이었다. 그가 예술적인 아버지로 여겼던 작곡가 존 케이지는 “만약 당장 죽는다면 가장 아쉬운 게 뭔가”라는 질문을 받고 “남준의 농담을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답했을 정도다.
백남준은 컴퓨터처럼 정확한 두뇌와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였지만, 지독한 건망증이 있었다. 물건을 노상 잃어버려서 아예 소지품을 넣어 다니는 커다란 주머니를 덧댄 셔츠를 입고 다녔고 그것을 친구인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에게 선물하기까지 했다. 시게코 씨는 당뇨병 때문에 쉬이 피로를 느껴 아무 데서나 잠을 청했던 버릇이나, 한 끼 식사로 고기와 생선을 같이 먹거나 익지도 않은 베이컨을 집어먹는 식습관 같은 허점마저도 매력적이었던 인간 백남준을 떠올리며 그리운 마음을 드러냈다.
“내 나이 스물일곱 살에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별처럼 멀리 있는 예술가였죠. 남자로서도 좋아했지만 예술가로도 흠모했어요. 저렇게 빛나는 남자를 어떻게 잡을 수 있겠느냐고 친구가 물었을 때, 나 역시 치열한 예술가가 되어 그에게 닿겠노라고 다짐했죠. 그의 연인으로, 아내로 살아온 지난 40년은 그의 예술적 동반자가 되기 위한 열망과 정진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박스)

“내가 아프니까 시게코가 바빠. 손이 천 개 달린 부처님처럼 바빠.”
정말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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