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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인터뷰 이혼·사업 실패 이후 찜질방 생활 인생의 바닥에서 희망을 찾은 배우 임영규를 만나다
단독 인터뷰 이혼·사업 실패 이후 찜질방 생활 인생의 바닥에서 희망을 찾은 배우 임영규를 만나다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0.08.02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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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너무 힘들어 자살 결심… 딸들을 만나야 한다는 의지로 지금까지 버텨왔다”

1980년 MBC 12기 공채 탤런트로 뽑힌 임영규. 신인임에도 데뷔 3개월 만에 일일 시트콤의 주인공을 맡은 그는 이후 드라마 ‘연산군’, ‘일출봉’을 비롯해 십여 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하지만 1993년 돌연 이혼을 하게 되면서 그는 자취를 감췄다. 항간에는 외국에 있다, 사업을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언론을 통해 들려오는 소식은 폭행사건이 대다수였다.
한동안 모습을 감춘 채 구설수에 오르내리기만 하던 그가 최근 본지와의 만남을 통해 얼굴을 비쳤다. 이혼과 사업 실패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그는 알코올성 치매를 겪으며 노숙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17년 전 헤어진 두 딸을 만나겠다는 생각만으로 다시 세상과 소통을 시작한 임영규가 지난 심경을 털어놓았다.

- 1993년, 돌연 연예계를 떠났습니다. 갑작스런 선택을 한 이유는?
당시 이혼으로 전 부인에게 아이들을 모두 맡기고 나오면서 이후로는 얼굴을 전혀 볼 수 없었어요. 그렇게 되자 방송도 돈도 한국도 다 싫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잠시 머리도 식히고 마음도 정리할 겸 미국으로 갔어요.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LA에서 20년 전 이민을 간 외사촌을 우연히 만났죠. 그때 사촌은 면 실크를 대구에서 수입해 남미에 파는 사업을 하고 있었어요. 당시 사업을 하는 데 필요하다며 10만 달러를 빌려달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렇게 큰돈을 갖고 미국에 오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어머니와 연결해 8천만원을 사촌에게 빌려줬습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돈을 갚지 않아 사촌을 찾아가보니 회사는 이미 운영이 어려운 상태더군요. 결국 사촌의 간곡한 부탁으로 빌려준 돈을 받는 대신 회사를 인수해서 계속 투자를 하게 됐죠. 그런데 사업이라는 것이 하던 사람이 해야지, 저같이 배운 게 연기밖에 없는 사람이 잘하기는 힘들었어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마냥 사업은 계속 적자가 났고 결국 한국에 아버지가 물려주신 전세 아파트 한 채만 남겨두고 모두 처분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죠. 모든 사업을 접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그때가 미국으로 떠난 지 딱 2년 만이었습니다.

- 당시 이혼 사유는 무엇인가요?
다 제 잘못이라는 생각뿐이에요. 저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결혼 후에도 집에 늦게 들어갈 때가 많았어요. 사실 밖에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잖아요. 하지만 전처는 아이가 없을 때 혼자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힘들었나 봐요. 계속 앙금이 쌓여오다가 결국 6년 만에 이혼을 요구받았어요. 이제와 돌이켜보면 제가 원인 제공을 한 셈이지만, 그때는 결과만 놓고 따지다 보니 수긍하기도 힘들고 원망스러운 마음만 컸습니다. 당시 장모님이 1년만 서로 조금 떨어져서 생각할 시간을 갖고 다시 합쳐보자고 하셔서 그렇게 했는데, 이후에 미국에서 돌아와 보니 이미 재혼을 고려 중인 남자가 있는 것 같더군요. 그 이후로는 저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죠.

- 딸들이 두 살, 네 살일 때 헤어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건가요?
이혼 당시에 양육권은 제가 갖고 있었지만 실제적으로 딸들을 키운 것은 아이들 엄마였어요. 그래서 전 집을 나올 때도 옷가지만 몇 벌 챙겨서 나왔죠. 그때 저희 어머니가 “너는 이혼을 해도 본가에서 먹고살 수 있지만, 전처는 홀몸으로 자식을 키우는 것이 쉽지 않을 테니 위자료로 갖고 있던 재산을 다 줘라”고 하셨어요. 저도 그게 옳다고 생각해 1원도 들고 나오지 않았죠.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아이들 얼굴을 본 적이 없어요. 미국에서 돌아온 뒤에는 계속 사업이 실패하면서 양육권마저도 아이들 엄마에게로 넘어갔죠. 사실 그동안 가장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것도 방송생활을 못한다거나 사업에 실패한 것보다 과거 내 잘못으로 아이들에게 제대로 사랑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었어요. 식당이나 공원에서 아빠와 딸이 함께 있는 모습만 봐도 차라리 죽고 싶다는 마음만 들었죠. 나도 정말 저렇게 살아보고 싶은데 모든 것이 내 탓으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잖아요. 그래서 지금까지 재기를 해서 아빠로서 떳떳한 자리에 서게 되면 다시 아이들을 보러 가겠다는 생각으로 버텨왔어요. 그 꿈마저 없었다면 아마 죽음이라도 선택했을 거예요.

- 한국에서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나요?
미국에서 돌아와서는 형제들에게 신세를 졌어요. 강남에 전세 아파트 한 채만 달랑 있고 그밖의 생활을 할 돈은 없었거든요. 다시 방송에 복귀하기도 부담스러운 시기였고요. 저희 집이 6남매인데 주로 사업자금 명목으로 형제들에게 돈을 빌렸어요. 그때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죠. 한국에서의 사업이 내리막길을 달릴 때쯤 직원들 월급은 챙겨줘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사채를 끌어다 썼어요. 결국 다 갚지 못하자 빚쟁이들이 어머니의 장례식장 앞까지 찾아왔죠. 내가 그곳에 나타나면 난장판이 되고 형제들에게도 피해만 줄 것 같아 결국 어머니 마지막 가시는 길도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어요.
그렇게 한국에서 했던 사업도 망하고 전세에서 월세로, 월세 보증금마저 다 써버린 뒤에는 고시원, 이후에는 그 돈마저 없어 찜질방까지 가고 공원에서 노숙도 했어요. 거주지가 계속 불분명하다 보니 주민등록도 두세 번 말소됐죠. 그렇게 되자 인간관계도 다 끊어지고, 주변 사람들도 다 나를 피하기 시작했어요. 마음도 힘들고 생각도 많아지다 보니 밤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죠. 매일을 밤새우다 아침 10시나 11시에 잠들기 일쑤였어요. 그래서 수면제 대신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이 알코올성 치매로 이어지게 됐죠. 지금은 두 달 넘게 전혀 술을 입에 안 대고 있지만, 당시엔 술을 먹고 나면 중간중간 기억을 못할뿐더러 성격도 포악해졌어요. 매스컴을 통해 알려진 폭행사건도 술을 먹고 난 뒤 벌어진 일이었어요. 실제로는 멱살을 잡거나 따귀를 때린 정도의 수준이었는데, 제가 공인이고 전파를 타다 보니 확대되고, 자연스럽게 이미지도 안 좋아졌죠.
그렇게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니 어느 순간 스스로 일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할 줄 아는 것이 운전과 연기뿐이어서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가면 제 얼굴을 알아보시곤 공인이라 부담스럽고, 또 사고라도 치면 어떻게 할 것이냐며 거부했어요. 잘나가던 시절에 출연했던 밤무대 업소에도 찾아가봤지만 전 이미 가치가 떨어진 지 오래라고 하더군요. 역시나 한군데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어요.

- 계속되는 악재 속에서 삶을 놓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는지?
몇 번이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사람의 목숨이라는 것이 끈질겨요. 또 무엇보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몸을 자기 스스로 끊을 자격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죽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갈 고통과 피해를 생각하니 차마 죽을 수도 없었죠. 차라리 죽을 용기로 참고 견디자는 생각에 지금까지 살아왔어요. 조금만 이겨내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려고 노력했고요.

- 현재 식당에서 주차관리 일을 하면서 찜질방에서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주위에서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제가 먼저 아는 동생을 찾아갔어요. 처음에는 제가 못할 것이라 만류했지만 “나는 이제 탤런트도 아무것도 아니니 잘할 수 있다”고 말하며 보조라도 써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래서 일당 3만원을 받는 조건으로 일을 시작했죠. 찜질방비 7천원, 밥 세 끼 2만2천원, 내가 좋아하는 담배 한 갑 사고, 교통카드까지 충전하면 딱 하루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이더라고요.
주차관리를 하면서 식당 잡일도 돕고 있는데, 사실 육체적으로 엄청나게 힘든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술 취한 손님들이 제 얼굴을 알아보고서 괜한 시비를 걸 때면 정말 참기가 힘들죠. 속은 부글부글 끓어도 그냥 웃으면서 넘어가요. 결국 이런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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