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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팬 기자 은퇴 선언한 양준혁 선수를 만나다
삼성 팬 기자 은퇴 선언한 양준혁 선수를 만나다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0.09.14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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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사랑하는 것처럼 야구를 해왔다. 죽도록 열심히 해온 만큼 후회는 없다”

“1루까지 항상 전력으로 뛰었던… 그런 선수로 기억되고 싶어요”

야구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양준혁. 기자는 오래전부터 그와의 만남을 바라왔다. 그가 타석에 설 때면 “위풍당당 양준혁, 날려버려~”라고 응원했고, 그는 실망시키지 않았다. 20대 초반 선수들과 비교해도 체력적으로 뒤지지 않았던 그는 대한민국 40대의 희망이었다. 은퇴 선언 후에 가진 한 인터뷰에서 “중년에 들어선 40대들에게 더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는데 이렇게 떠나 미안하다”면서 “하지만 이제까지는 예고편에 불과하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많다”고 말하는 그는 여전히 청춘이었다.

홈런으로 프로선수 생활 멋지게 마치다
18년 야구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많이 섭섭할 것 같아요.
시원섭섭합니다. 어릴 때부터 치면 삼십 몇 년간 하던 걸 손에서 놓았으니까요. 그렇지만 마음은 홀가분해요.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요.
‘시즌 중 은퇴 시 잔여연봉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규정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 시즌 중에 은퇴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은퇴는 6월 중순부터 고민했어요. 올 시즌 초부터 선발 출전과 대타를 오갔는데 6월 18일에 있었던 대구 한화전 이후로는 한 번도 스타팅 멤버에 들지 못했죠. 벤치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생각도 많아졌어요. 주연만 하던 배우에게 갑자기 행인1 같은 역을 시키면 하겠어요? 못하잖아요. 그 마음은 참 표현하기 힘들어요. 벤치를 한두 달 지켰는데, 겉으론 웃고 있지만 속으론 수치심도 느끼고 자존심이 너무 상했어요. 저는 제가 좀 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선발이 안 되니까요. 그런 게 쌓이다 보니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었어요. 계속 선수 생활을 한다고 해서 나아질 것 같지도 않았고요. 계륵 같은 거 있잖아요. 팀에는 필요하지도 않는데 그런 식으로는 계속하고 싶지 않았어요. 저도 마음 편하게 살아야 하잖아요. 또 이렇게 자리를 비워줘야 올라오는 후배도 생길 거고… 그러니 빨리 결정해주는 게 낫겠더라고요.
대타자일지라도 누구보다 당당한 모습이었어요.
당당해 보일지는 몰라도 마음속으로는 외롭고 힘들었어요. 표정 관리하기 힘들었지만 어디까지나 제 문제이기 때문에 팀에 영향을 미치면 안 되잖아요. 담담한 모습을 보이려 애썼죠.
마지막 올스타전에서 홈런을 쏘아 올렸어요.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은데요.
올스타전도 대타자로 나간 거예요. SK 박정권 선수가 전반기에 발을 다쳤어요. 타구에 맞아 뼈에 금이 갔죠. 사실 박 선수 대타자도 원래 제가 아니었어요. 우리 편 사령탑이 김성근 감독님이셨는데 갑자기 저보고 나가라고 하더군요. 감독님은 올스타전이 대구에서 열린 만큼 은퇴하는 저를 배려해주셨어요. 이번이 현역 시절 마지막 타석이라고 생각하니 긴장됐어요. 최대한 집중해서 좋은 결과를 남겨야겠다고 다짐했죠. 다행히 마지막 피날레를 홈런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어요. 저로서는 그 홈런이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아요.
은퇴를 결정했을 때 부모님은 어떤 말을 했나요.
부모님께 상의드리지 않았어요. 마음의 결정을 하고 구단과 이야기를 마친 뒤 부모님께 말씀드렸죠. 부모님과 상의하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거든요. 부모님은 안타까우니까 “좀만 더 하지”라고 하셨어요.
안타 2천3백18개, 홈런 3백51개 등 많은 기록을 세웠어요. 야구는 어떤 기회로 시작하게 됐나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시작했어요. 우리 집이 야구 집안이거든요. 삼촌이 한장철 선수인데 굉장히 야구를 잘했고, 삼성 라이온즈 양희란 2군 투수 코치도 제 사촌형이에요. 아버지도 무척 야구를 좋아하셨죠. 집안이 야구를 하다 보니까 저도 자연스럽게 야구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부모님께 하고 싶다고 졸랐죠. 
프로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재정적인 뒷바라지도 있어야 하는데, 어린 시절 가난하게 자랐다고 들었어요.
우리 때는 이것 아니면 안 된다는 ‘헝그리 정신’이 있었어요. ‘야구를 잘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어릴 때부터 했죠. 그랬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한눈판 적도 없어요.
어린 시절부터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건가요.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보다 이거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했어요. ‘내가 최고다’ 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최고이지도 않았고요.
야구를 포기하고 싶은 적은 없었나요.
있죠. 왜 없겠어요. 1998년에 해태로 트레이드됐을 때랑 1999년 선수협회 파동 때는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정말 힘들었어요. 지금은 선수들의 권익이 많이 향상됐지만, 당시에는 선수 계약서에 불합리한 게 많았어요. 주위를 둘러보니 저 아니면 할 수 있는 사람이 없겠더라고요. 후배들한테 더 좋은 환경도 만들어주고 싶었고요. 제 야구 인생에 마침표를 찍는 한이 있어도 선수협회를 만들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선수협 파동 이후 다시는 삼성에 돌아오지 못할 거란 소문이 있었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죠. 그런데 2002년 당시 삼성 감독이셨던 김응용 감독님이 저를 부르셨어요. 그러곤 두 가지를 물으셨죠. “팀의 리더가 될 수 있느냐”와 “외야 수비가 가능하냐”라고요.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알았다”고 하면서 저에게 다시 삼성 유니폼을 입히셨어요. 그리고 그해 삼성이 우승했죠. 개인적으로나 팀으로나 첫 우승이었어요. 삼성이 한국시리즈에 여덟 번 올라갔는데 우승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정말 많이 울었죠. 아마 저뿐만 아니라 삼성 라이온즈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다 같이 울었을 거예요.
1998년 말 삼성 양준혁, 곽채진, 황두성과 해태 임창용 간 3 대 1 트레이드가 발표됐다. 큰 충격을 받은 그는 트레이드 거부 의사를 밝히고 일본 진출을 요구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고집을 꺾고 해태 유니폼을 입은 그는 1999년 시즌 종료 후 선수협의회 창립총회를 주도하는 등 선수협 주역으로 프로야구 선수들의 권익 향상에 앞장섰다. 지금은 한국야구위원회(KBO)로부터 선수협회를 인정받았지만, 선수협 사건은 그에게 큰 상처를 안겼다. 그 일로 구단과 갈등을 빚던 그는 2000년 시즌 개막 직전 LG로 또 한번 트레이드됐다. 그라운드 안팎에서 마음고생이 심했을 텐데도 그는 LG 시절인 2001년 자신의 한 시즌 최고 타율인 3할5푼5리로 네 번째 수위타자에 오른 뒤 2002년 자유계약선수(FA) 자격으로 꿈에 그리던 삼성으로 복귀했다.

“결혼? 이제부터 열심히 작업해야죠”
결혼 질문이 나올 때마다 답변을 잘 피하던데 오늘은 작정하고 묻고 싶어요. 너무 눈이 높은 거 아니에요.
기자들이나 주위 사람들이 자주 그런 말을 하는데, 그렇게 몰고 가면 제가 살아가기 너무 힘들어요(웃음). 저한테 소개를 시켜주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모르겠는데, 그러지도 않으면서 그런 말을 하면 어느 여자분이 저를 만나려고 하겠어요.
어떤 스타일의 여성을 좋아하나요.
밝고 선한 이미지면 좋죠. 대화가 잘 통하고… 예쁘기까지 하면 감사하고요(웃음). 예전 ‘무릎팍 도사’에서는 이상형을 김민정이라고 했지만, 사실 민정이하고는 친해요. 진짜 이상형은… 티아라 은정이요. 밝고 귀여운 스타일이잖아요.
설마 검색해서 찾아보거나 그러지는 않겠죠.
찾아봤는데요. 찾아보면 안 되나요(웃음).
‘무릎팍 도사’에서 귀엽다는 생각을 했는데, 인터넷에서 티아라를 검색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너무 귀여운 것 같아요.
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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