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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의 장애 극복 성공기는 사절입니다” Be the change 시각장애 피아니스트 은진슬
“감동의 장애 극복 성공기는 사절입니다” Be the change 시각장애 피아니스트 은진슬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0.09.14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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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기악과를 졸업한 은진슬 씨는 미국으로 건너가 사회복지정책을 공부한 뒤 귀국해 세계적인 시각장애인 보조 공학기기 회사에서 마케터로 일했고, 현재는 보컬 앙상블의 코디네이터 겸 반주자로 활동하면서 장애인의 권익을 위해 글을 쓰고 있다.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점자악보를 통째로 외워가며 피아노에 매달린 끝에 음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남들과 다른 외모와 장애라는 핸디캡은 극복하기 쉬운 것이 아니었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아 생긴 사고로 발등을 다쳐 전문 피아니스트의 꿈도 접어야 했다. 집안 경제를 책임지고 있던 아버지의 돌연사, 자신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온몸과 마음을 황폐하게 만든 우울증은 자살 시도로 이어지기도 했다. 힘들었던 지난 시간을 담담하게 토해낸 은진슬 씨는 “내가 쓴 책이 장애를 가진 한 사람의 역경을 딛고 일어선 휴먼 다큐멘터리로 읽히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내 존재 증명하기 위해 애쓴 ‘유령’의 시간들
어린 시절부터 배운 피아노에 빠져 피아니스트를 꿈꿨고 지독하게 연습했다. 수능 실기시험 전날 레슨을 받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쓰러져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됐지만, 바로 다음날 “제가 몇 년을 이날을 위해 살았는데, 앞으로 제 인생 책임지실 건가요?”라며 링거를 뽑아내고는 시험을 보러 갔다. 대학에 입학했지만 수업시간에 칠판을 보며 필기를 할 수도, 책이나 프린트도 읽을 수 없는 그녀를 두고 대부분의 교수들은 매우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단지 눈앞에 보이는 시각적 정보를 인지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녀의 지적 능력에 의문을 표한 셈이다.
“제가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특수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랐던 교수님들은 그냥 그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기도 했어요. 전 필기도 나중에 따로 해야 하고 점자책이 만들어지면 다시 공부를 해야 했기에 항상 앞자리에 앉아 수업 내용을 녹음했어요. 그런데 그 자리에 없는 사람 취급할 때면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이나 유령이 된 듯한 기분이 들곤 했죠.”
대학 시절 내내 그녀가 가장 큰 관심을 두었던 것은 제 시간에 점자로 된 악보를 구해 실기 연주를 하는 날까지 암보(악보 외우기)하고 제대로 마스터해 연주하는 것이었다. 악보를 보면서 피아노를 칠 수 없다 보니 처음부터 모든 악보를 통째로 외워야 하는데, 그 과정은 지난하기만 했다. 한국에서는 점자 악보를 구하기 어려워 미국, 영국 등에서 구하거나 일본인 개인 점역사에게 부탁해 점자로 만들어야 했는데 그 과정 역시 늘 피가 마를 만큼 느렸다. 제때 악보를 구하지 못한 탓에 실기시험 전날까지 곡을 완벽하게 완성하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최선을 다해 준비했음에도 절대적인 기준에서 단 한 번도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연주해본 적이 없었다는 은진슬 씨. 시간은 늘 극도로 부족했다.
“교수님이나 누구에게도 이런 속내를 드러낸 적이 없었어요. 내 능력 부족이 장애 때문이라고 일종의 면죄부를 얻으려는 것으로 오해할까 봐 싫었으니까요.”
음악 실기시험만이 문제인 것은 아니었다. 책을 점자로 만드는 과정을 거쳐 책을 읽으려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느릴 수밖에 없었고,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와도 손에 책을 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한번은 수업에 사용할 교재가 중간고사 직전에 출판된 적이 있어요. 다른 학생들이야 빨리 읽으면 된다지만 전 점자로 바꿀 시간이 없어 난감했죠.” 
생각 끝에 그녀는 커터칼로 교과서를 챕터별로 나눠서 자른 후 공테이프 다섯 개를 샀다. 그리고 수업이 시작되기 전 강단에 올라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말을 꺼냈다.
“저는 일반 문자로 인쇄된 책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점자로 바꾸는 시간이 필요한데 시험날짜까지는 시간이 촉박합니다. 다섯 분이 제가 잘라놓은 한 챕터씩 가져가서 내일 모레까지 녹음을 해주신다면 무사히 시험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학에서 여러 어려움을 맞닥뜨렸지만 하나씩 맞서고 설득하고 이루어내는 과정에서 스릴과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네가 할 수 있겠니?”라고 묻는 교수들의 우려도 노력으로 잠재웠다. 하지만 늘 그런 질문을 듣고 그 의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삶 자체가 되어버렸다는 씁쓸함은 어쩔 수 없었다.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은진슬’이라는 존재를 증명하고 인정받기 위해서 처절하리 만큼 치열하게 공부하고 피아노를 쳐야 했다. 그렇게 A학점을 받아야만 그 집단에 속할 수 있다는 슬픈 현실이 힘들기만 했다.

 

장애보다 더 무서운 건 우울증 낙인
어린 시절에도 부모의 뜻에 잘 따르고 반항 한번 해본 적 없었다는 은진슬 씨. 그녀의 어머니는 “아이들 중에서 진슬이를 가장 쉽게 키웠어. 사춘기도 없었으니까”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을 정도였다. 학창 시절 아침에 등교해 수업을 받는 동안 최선을 다해 철저한 모범생으로 행동했다. 하지만 수업이 끝나는 동시에 ‘우울’이라는 악마에 사로잡히곤 했다. 무조건 눈물이 흐르고 그것을 멈출 수도 없었다. 홀로 남아 청소할 때,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책을 읽거나 공부할 때, 그저 창밖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겪게 된 경제적 압박, 발등 부상 후에 받은 피아니스트 사형 선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시련에 그녀는 대학 시절 처음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의식을 잃고 응급실로 실려가는 정도로 끝났지만, 정신과 전문의의 도움이 이미 절실하게 필요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렇게 많은 증상을 겪으면서도 정신과를 찾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대학생이 된 후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장애가 있는데 우울증 환자라는 낙인까지 찍히면 너무 비참해질 것 같아 피한 거죠. 실제로 본격적인 치료를 받고 입원하는 동안 우울증에 대해 장애만큼, 아니 어쩌면 더한 ‘낙인찍기’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어요.”
이후로도 자살 충동에 시달리던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가족에게 “혼자 여행을 떠난다”고 말한 후 한 종합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며칠 만에 또다시 자살을 기도했다. 매일 아침 눈뜨면 죽고 싶다는 생각을 10년 넘게 해오면서도 누구보다 성실하고 살려고 애썼던 그녀. 이제 그만 괴로운 우울증과의 싸움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그 순간 ‘은진슬’은 없었어요. 제가 자살하는 게 아니라 자살이 저를 하는 상황이라고 해야 할까요.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곳도 아니고, 살겠다고 제 발로 걸어들어간 병원에서 자살 시도를 할 리가 없으니까요.”
그녀는 책을 통해 우울증으로 고통받았던 시간, 그리고 자살을 시도했던 경험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우울증을 인정하지 않고 회피하려다 고통을 키우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마치 벌거벗겨진 듯한 느낌이 들어서 책에 이 내용을 넣어야 할지 무척 고민했어요. 그래도 공개하게 된 것은 세상에 말하고 싶어서예요. 저는 알고 있거든요. 수많은 사람들이 저처럼 보이지 않는 가면 우울증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고, 여러 가지 이유로 우울증을 인정하지 않고 회피하고 있다는 것을요. 그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낙인찍히는 것이 두려워 치료를 시도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도요.”
그녀는 우울증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한국 사회의 무서운 낙인찍기를 겪으며 ‘장애를 갖고 있는 것보다 우울증에 걸리는 것을 더 무섭게 여기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여러 번의 힘든 고비를 넘겼지만 자신에게 잘 맞는 항우울제를 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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