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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계의 하얀 큰 별 지다‘국민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남긴 발자취
패션계의 하얀 큰 별 지다‘국민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남긴 발자취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0.09.14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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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항상 겸손하고 인간으로서 참 좋았던 사람, 앙드레 김”


앙드레 김이 떠나던 날, 하늘도 울었다
2005년 대장암 수술 이후 항암치료를 받아왔던 앙드레 김은 대장암 합병증인 폐렴이 악화돼 병원에 입원한 지 20일 만에 숨을 거뒀다. 지난 5년간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앙드레 김은 일에 대한 열정의 끈을 놓지 않았다. 고인의 아들 김중도 씨는 “아버지는 폐렴증세가 악화돼 입원하기 전까지도 지방 출장과 9월의 패션쇼 구상을 위해 한 시도 쉬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앙드레 김은 9월 피겨스케이팅 스타들이 출연하는 패션쇼 무대를 준비하며 열정을 쏟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빈소가 마련되자마자 원빈과 전도연이 가장 먼저 달려왔고, 안성기, 조수미, 한채영, 송혜교, 임권택 부부 등 생전에 앙드레 김과 친분이 깊었던 국내 스타들이 고인을 그리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홍명보, 장미란, 골프선수 신지애 등 스포츠 선수들도 대거 빈소를 찾아 고인의 넋을 위로했다. 유정현 의원, 박희태 국회의장 등 정계를 포함해 조지프 필 미8군 사령관과 스페인, 러시아 등의 각국 대사들이 빈소를 찾았다. 패션계는 물론 문화예술계와 정·관계를 아우르며 교류했던 고인의 영향력을 실감케 했다.
4일장으로 치러진 장례기간 중에는 각계 주요 인사들을 포함해 하루 7백여 명의 조문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임태희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명박 대통령을 대신해 빈소를 찾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영정 주변은 앙드레 김이 생전에 좋아했던 흰 장미와 국화로 꾸며졌다. 입양한 아들 중도 씨에게서 얻은 세 명의 손주들은 새벽까지 잠들지 못한 채 함께 빈소를 지켰다. 여섯 살 쌍둥이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보낸 조화를 보고 “대통령 이름이 여기 왜 있어요?”라고 천진난만하게 질문을 던져 주위를 더 안타깝게 했다.
그를 떠나보내기가 너무도 아쉬워서일까. 발인이 치러진 15일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발인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고인의 뜻에 따라 불교식으로 진행됐으며, 영정사진과 운구차량도 모두 흰색으로 준비됐다. 운구차량은 고인의 서울 압구정동 자택과 오랜 세월 디자이너로 열정을 쏟아온 신사동 의상실, 28년 동안 고인이 손수 지은 경기도 기흥의 아뜰리에를 거쳐 오후 2시 천안공원 묘원에 도착했다. 그곳은 고인의 아버지가 묻혀 있는 곳으로 알려졌다. 앙드레 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마다 눈물짓는 이들이 함께했다. 압구정동의 이웃주민들도 고인의 명복을 빌며 그의 가는 길에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흔들림 없이 작업했던 신사동 의상실에 영정이 들어서자 의상실은 직원들의 눈물바다가 됐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앙드레 김은 우리나라가 패션의 불모지던 시절 첫 남성 디자이너로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패션을 통해 자신이 그리던 꿈과 환상의 세계를 표현했던 그는 이제 순백의 세계에서 영면에 들었다.

지적이고 품위 있는 옷을 짓던 ‘국민 디자이너’
한국전쟁 와중에 피난 갔던 부산에서 오드리 햅번 주연의 영화 ‘퍼니 페이스’를 본 그는 영화 속 배우들과 의상에 매료되어 디자이너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홀로 올라온 그는 디자이너 최경자의 양장점에서 일하다, 국제복장학원 1기생으로 들어가 디자이너 수업을 받았다. 당시 30명의 입학생 중 남학생은 그를 포함해 단 세 명뿐이었다.
1년의 과정을 마친 후 앙드레 김은 1962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패션쇼를 갖고 국내 1호 남성 디자이너로 패션계에 데뷔했다. 소공동 조선호텔 앞에 있는 양복점 GQ 테일러에 무작정 찾아가 “쇼윈도 중 하나를 빌려달라”고 부탁한 후 ‘살롱 드 앙드레’라는 의상실을 시작했다. 앙드레라는 이름은 당시 프랑스 대사관의 한 외교관이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려면 부르기 쉬운 외국 이름이 있어야 한다며 붙여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일을 할 때도 자신이 정한 원칙에 철저했던 원칙주의자였다. 절대로 외국에서 들여온 옷감은 사용하지 않았고, 한국의 미를 기본으로 한 패션을 지향했다. 그는 또한 자비를 들여 해외 패션쇼를 개최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대부분의 한국 디자이너가 해외 패션쇼를 개최하기 위해 1억원이 넘는 돈을 지불할 때, 앙드레 김은 오히려 초청국에서 모든 비용을 부담하게 했다. 디자이너로서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1966년 프랑스 의상협회 초청으로 파리에서 첫 컬렉션을 연 그는 2년 뒤 미국 뉴욕에서 패션쇼를 여는 등 오래전부터 해외 무대에 진출했다. 그는 세계 최초로 이집트 피라미드 앞과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서 패션쇼를 열기도 했다.
패션에 대한 그의 열정은 세계가 인정할 정도였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막 패션쇼를 지휘한 앙드레 김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국제올림픽연맹(IOC)으로부터 2000년 시드니 올림픽까지 연속으로 네 번의 초대를 받아 올림픽 개막 무대를 장식했다. 패션디자이너로서는 처음으로 화관문화훈장(5등급)을 받았던 그는 2008년 또다시 보관문화훈장(3등급)을 받았다.
앙드레 김은 1962년 데뷔 직후부터 국내에서 주한 외교 사절을 초청해 행사를 열었다. 그리고 매년 각국의 명소에서 패션쇼를 열어 한국 문화를 전파하는 민간 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2002년 5월 서울에서 열린 유니세프 자선 패션쇼에는 캐나다, 영국, 독일, 스위스 대사 부인들이 앙드레 김과의 인연으로 패션쇼 모델로 나서기도 했다. 그는 패션쇼가 없을 때는 자비를 들여 좋은 공연의 티켓을 구입해 외교사절을 초청, 함께 관람할 정도로 한국을 알리는 일에 열심이었다. 태국이나 중국 등 아시아 국가에서 패션쇼를 열 때면 그 나라의 전통문양을 차용한 디자인을 선보이며 그 국가에 대한 관심과 느낌을 전했다. 그는 평소에 일류 디자이너의 조건으로 ‘국가관’과 ‘사명감’을 꼽았다. 한국인이며 아시아인이며, 동양인이라는 자부심이 패션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의 패션쇼는 스토리가 담긴 한 편의 공연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본 어느 전통결혼식에서 붉은색과 녹색의 활옷을 입은 신부의 옷차림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앙드레 김. 어린 시절 받았던 그 인상은 훗날 그의 패션세계에서 가장 큰 축을 이루게 되었다. 무대 위에서 구현되는 칠겹옷이 바로 그것. 일곱 개의 옷을 겹쳐 입은 모델이 한 꺼풀씩 옷을 벗을 때마다 국내외 관객들의 뜨거운 탄성이 터져나왔다. 일곱 겹 드레스로 대변되는 그의 패션은 로맨틱과 판타스틱으로 요약된다. “의상에는 꿈과 환상이 담겨야 한다”라는 말은 그의 패션철학을 한마디로 함축하는 것이다.
앙드레 김은 패션쇼를 스토리가 있는 한 편의 공연처럼 연출했다. 기획부터 콘티와 배경음악까지 본인이 직접 구성한 것은 자신의 패션철학을 패션쇼에서 모두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는 회고록 ‘마이 판타지’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패션쇼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저는 패션쇼를 종합예술의 스테이지라고 생각합니다. 종합예술적인 감동,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독감과 그리움, 슬픔, 숭고한 사랑, 가슴을 파고드는 아름다움…, 그것들이 혼합된 세계가 이루는 분위기가 저는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또 한 인터뷰에서는 옷에서 풍겨나야 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을 털어놓기도 했다.
“의상은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추구하는 패션철학은 인텔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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