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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이민 접고 서울살이 1년 개그우먼 이성미, 그동안 말 못했던‘아들, 아버지, 남편’ 세남자 이야기
캐나다 이민 접고 서울살이 1년 개그우먼 이성미, 그동안 말 못했던‘아들, 아버지, 남편’ 세남자 이야기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0.09.14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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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외모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 이성미. 캐나다에서 시간을 보내고 난 뒤에는 스스로도 ‘어른’이 되었다고 말할 정도다. 그녀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이 끝난 오후, 따스한 햇살이 길을 만드는 정동의 한 레스토랑에서 그녀와 마주했다.
실제로 만나본 그녀는 방송에서와 달리 너무나 유순하고 자상했다. 인터뷰를 이어갈수록 진중하면서도 유쾌한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삶의 희노애락이 묻어나는 그녀 특유의 재치와 입담을 듣고 있노라니 천생 희극인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터뷰는 아이들, 남편,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까지 이어졌다. 결코 녹록지 않았던 지난 세월, 아이들을 통해 새롭게 발견한 사랑이 그녀의 작은 입에서 솔솔 흘러나왔다.


워킹맘 이성미의 요즘
캐나다에서 돌아온 후 그녀는 숱한 러브콜을 받았다. 덕분에 라디오 DJ를 비롯해 예능 프로그램, 토크쇼 MC 등 지난 한 해 동안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개그계의 대모’로 불리는 그녀지만 복귀한 지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늘 신인의 마음으로 방송에 임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방송환경에서 아직까지도 낯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지금 하고 있는 라디오 진행도 이제야 입이 트이는 느낌이에요. 생각보다 7년이라는 공백이 무시 못할 정도로 크더라고요. 적응하는 데 시간 좀 걸렸죠. 그래도 나름 빨리 적응한 편 아닌가요(웃음)?”
7년 만에 돌아와서 본 방송은 많이 독해지고 강해져 있었다. ‘저렇게 말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자유로워진 표현에 그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달라진 환경에 스스로 산에서 도 닦다가 세상에 내려온 사람 같은 기분이었어요.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여기 있나 싶은 생각도 들었고요. 요즘에는 단순하거나 자극적인 재미가 대세잖아요. 하지만 나처럼 산전수전 다 겪고 단맛쓴맛 다 아는 사람들도 방송에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개그우먼으로 살아오면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그녀. 녹화를 하다가도 문득 지금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신기하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요즘에는 후배들이 잘 활동할 수 있도록 뒤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는 멘토 역할을 자청하고 있다.
“어렸을 때 제일 고마웠던 선배가 밥 사주는 선배였어요. 그래서 나도 후배들에게 그런 선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예전에는 아이들에게 쌀쌀맞고 냉정하게 말했는데 이제는 따뜻하게 격려해주고 있어요. 한참 어린 신인 개그맨들을 따로 만나 같이 밥 먹으면서 고민 상담도 자주 해요.”
그녀의 하루 일과는 정신없이 지나간다. 아침에 일어나 새벽기도회를 다녀오면 어느새 은비(13)와 은별(9)이가 학교에 갈 시간이다. 집을 정리하고 책을 좀 읽다 보면 또 방송하러 갈 시간. 아이들 학교가 끝날 즈음에 데리러 갈 때도 있지만 녹화가 잡히는 날이면 아이들 얼굴은 저녁이나 밤늦게 겨우 볼 수 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막내가 ‘엄마가 이상해졌다’고 하는 거예요. 캐나다에 있을 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 같이 다니고 먹을 것도 다 챙겨주고 했는데 요즘에는 캐나다에서 안 하던 화장도 하고 저녁때마다 나간다는 거죠.”
언니, 오빠와 달리 14개월 때부터 캐나다에서 살았던 막내는 한국에서 엄마가 연예인인 걸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서도 엄마가 일하는 것을 처음에는 싫어했다고.
“한번은 아이들을 방송국 녹화장에 데려갔어요. 그때 (유)재석이가 아이들이랑 같이 사진도 찍고 놀아줬거든요. 엄마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이랑 얘기도 하고 친하게 지내는 걸 보더니 신기해하더라고요. 막내는 엄마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인 줄 몰랐다고 말하고요. 그날 이후로는 엄마가 일하는 게 좋다면서 학교에 가서 자랑도 하고 그래요(웃음).”
두 딸은 현재 외국인학교에 다니고 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을 때 일반학교에서는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아이들이 엄마에게 귀국 조건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아이들은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 캐나다에 비하면 공부도 숙제도 많지만 밤늦게까지 끙끙대면서도 혼자 다 해내고 있다. 아이 스스로 책임감을 가질 수 있게 엄마가 동기 부여를 해줘서인지 크게 간섭할 것이 없다. 큰소리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는 아이들은 엄마 눈에도 신기할 따름이다.


엄마를 닮고 싶은 아들이 되기까지
인터뷰 도중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캐나다에 있는 큰아들 은기였다. 간단한 안부인사만 주고받았지만 통화가 끝난 뒤 그녀의 눈에 살짝 웃음이 맺혔다.
“일주일에 서너 번씩 연락이 와요.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힘들었던 일까지 소소하게 털어놓는 아들이죠. 가끔은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엄마와 함께 캐나다에 간 은기는 이제 대학교 2학년이 되었다. 지난해 엄마가 두 동생들만 데리고 귀국한 이후로 캐나다에서 학교를 다니며 혼자 지내고 있다. 떨어져 사는 것에 불만이 있을 법도 한데, 오히려 모자는 지금의 시기가 서로 더 성장하는 기회라 여기며 살고 있다.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은기에게 이제 스무 살이 되었으니 경제적으로도 독립해서 살라고 했어요. 제가 10원도 보내주지 않으니까 처음에는 저보고 지독한 엄마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조금 지나고 나니 처음으로 돈의 소중함을 알았다며 그동안 엄마 덕에 잘 지낸 것 같아 고맙다고 말하더라고요.”
은기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와 학비 모두 손수 벌어서 쓰고 있다. 스무 살이 넘은 아들이지만 고생하는 것은 안 봐도 뻔할 터. 남편조차도 아이가 고생하는데 어떻게 한번 안 도와줄 수 있냐고 말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확고하다.
“사실 저도 마음이 아프죠. 돈이 없어서 못 보내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은기에게 엄마도 스무 살 때부터 다른 데 손 안 벌리고 돈 벌었으니 너도 할 수 있다고 말해줬어요. 은기도 이런 제 마음을 아니까 더 열심히 살려고 하죠.”
은기가 사춘기 시절을 캐나다에서 보내는 동안 모자는 사사건건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 유학을 가고 싶어하는 아들을 위해 결정한 캐나다행이었지만 공부보다는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그녀는 몇 년간 아들에게 칭찬보다 욕을 할 때가 더 많았다.
“은기가 제가 하는 욕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그땐 안 해본 욕이 없을 정도였거든요. 그러다 문득 내 아이의 인생이 내가 욕한 대로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마음 한가운데 떠올랐어요. 그뒤로 욕하는 것을 그만뒀죠. 그때 은기가 열일곱 살이었는데 ‘엄마가 잘못했다’고 사과하자 펑펑 울더라고요. 그동안 저로 인해 쌓인 상처가 너무나 깊었대요.”
이후로 아들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자 아이의 삶도 건강하게 변했다. 1%의 의심조차 없는 엄마의 믿음을 얻고 자란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신앙으로 변화된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자랐기 때문일까. 어려서부터 골프를 전공해오던 은기는 마음을 바꿔 신학 공부를 하고 있다.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들어오기 전날 밤이었어요. 은기가 제 손을 꼭 붙잡더니 ‘엄마 낳아주셔서 감사해요.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엄마처럼 살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게 아이에게 처음 들은 칭찬이었죠. 어느 누구의 칭찬도 그보다 더 클 수는 없겠더라고요.”
그녀는 이러한 변화가 한국에서 많은 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캐나다로 떠났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엄마가 행복할 때 아이도 행복하다는 것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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