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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장수 딸에서 야당 정치인이 되기까지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가 꿈꾸는 ‘오늘보다 나은 미래’
두부장수 딸에서 야당 정치인이 되기까지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가 꿈꾸는 ‘오늘보다 나은 미래’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0.10.06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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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홀로 벼랑 끝에 섰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역동적인 공동체 사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마흔한 살의 여성 당 대표라는 것은 우리나라 정치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버린 민주노동당(이하 민노당) 이정희 대표.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대표의 정치 입문이 불과 2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난 2008년 당시 10년 만에 여야 정권 교체가 이뤄지면서 열세에 놓인 진보진영, 그중에서도 최전방을 고수하던 민노당에 입당하며 이 대표는 인권변호사에서 험난한 정치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한동안 언론에 비친 이 대표의 모습은 투사를 방불케 했다. 어쩌면 상황이 싸우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들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수도 있다.
그간 정치적 대립이 격화된 현장에는 항상 이 대표가 있었다. 몇 번은 국회의원의 신분으로 경찰에 연행되는 모습까지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어떤 이들은 비난했고 또 어떤 이들은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단 하나 특이한 현상은 비난을 하는 쪽도 이 대표의 진정성만큼은 무작정 부정하지 못했다는 것. 정치적 사안에 대한 찬성과 반대를 떠나 국회의원으로서 그이가 보여준 모습은 확실히 이전과 다른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혹자는 그런 그이를 “머리와 말이 아닌 가슴과 영혼으로 의정활동을 하는 정치인”이라고 했다. 정치에 입문한 2년을 그야말로 누구보다 치열하게 보낸 그이는 결국 지난 7월 말 민주노동당의 새 대표가 됐다.

‘진심의 정치’ 시작하겠다
당 대표로 나서면서 이런저런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이정희 대표는 하루하루를 꽤나 빡빡하게 채워가고 있다. 그러나 일단 사람을 대할 때의 표정에서는 한 치의 서두름도 느낄 수 없다. 진지하게 듣고 답하며 간간이 보여주는 미소가 오히려 상대를 편안하게 해준다. 요즘 들어 현장에 나갈 기회가 부쩍 많아졌다는 그이는 2개월째 접어드는 당 대표직에 대한 소회를 털어놓았다.
“현장에 갈 때마다 당 대표로서 그만큼 책임감도 무거워집니다. 언론 인터뷰 요청도 갑자기 많아지면서 제 말의 힘이 커질 것이라는 부담도 생기더군요. 한편으로 많은 분들의 큰 기대를 어떻게 이어갈 수 있을까라는 고민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상황을 볼 때 서민들의 삶이 녹록지 않으니까요. 이러한 때에 진보정당의 대표로서 국민 속에 뿌리내리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을 해봤습니다. 결론은 시작과 끝, 앞과 뒤,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된다는 것이더군요.”
대표가 된 이후 그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눈에 띄는 실수에 이어 이를 만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공통의 핵심은 ‘대한민국 헌정회 육성법’. 이는 지난 1988년부터 원로 국회의원들에게 국고 예산 지원으로 매월 일정액을 지급하는 것으로 올해까지 20년 넘게 법적 근거가 없는 상태로 이어져왔다. 결국 올 2월 법적 근거를 만든 것이 바로 ‘대한민국 헌정회 육성법 개정안’이다. 문제는 평소 특권을 없애겠다는 민노당의 입장과 배치되는 이 법안 개정에 그이가 찬성 표결을 한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다른 민노당 의원들까지 본회의에서 찬성 표결을 던지게 하는 발단을 제공했다. 사실 그 속사정은 소수정당 대표로서 교섭단체에 속하지 못해 법안을 검토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어쩔 수 없는 실수였다. 그러나 그이는 깨끗이 잘못을 시인했고, 연이어 결자해지(結者解之)하는 모습을 보였다.
“많은 분들이 국회의원이 노후에 별도의 지원금을 국고에서 받을 이유가 없다는 지적을 해주셨어요. 크게 반성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저와 당이 국민의 뜻을 저버리지 않으리란 믿음을 가지고 계시다는 걸 확인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사죄의 뜻으로 새로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헌정회 원로 회원들에 대한 지원금이 국고에서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죠.”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심지어 찬성했던 법안의 반대 개정안을 발의하기까지 한다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사례가 아니다. 이를 통해 그이는 자신의 진정성을 다시 한 번 증명한 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러한 관심이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관심과 주목이 부담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죠. 그러나 그것은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민노당에 거는 기대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진보정당으로서 강성에 속하는 민노당의 정치활동은 때로 많은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당 대표로 취임한 후 그이 역시 그러한 시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부드럽고 명쾌한 진보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것. 그러한 노력은 지난 지방선거에서 범야권의 연대를 통해 작은 결실을 맺기도 했다.
“거칠고 큰 담론을 가지고 이야기하기보다는 복잡한 문제를 알기 쉽고 간단하게 풀어내는 명쾌함을 진보에 더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를 동의하는 많은 분들과 힘을 합치는 유연함을 통해 진보정치의 폭을 넓히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죠.”
흐트러짐 없이 부드러운 면모를 보이며 말을 이어가는 이 대표지만 당의 성향을 떠나 자신 역시도 과격한(?) 이미지가 잔존해 있음은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원인과 과정이 분명 존재하지만 대중에게는 이미지가 더 큰 위력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당시를 돌이켜보면 이 대표가 불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변호사 출신이라는 데 의문부호가 붙게 된다. 답은 역시 진정성이다.
“변호사 시절에는 한발 떨어져서 사건을 보면 되지만 국회의원이 되니까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전경차에 끌려가고 대한문 앞에서 단식도 하고 여당 의원들과 몸싸움도 하게 된 것 같네요(웃음). 현장을 뛰면서 체득한 진실의 힘과 민주주의가 무너지지 않도록 최전선에서 지키는 직무를 하는 와중에 발생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봉천동(奉天洞) 달동네에서 태어나…
사실 이 대표가 세상의 주목을 받은 것은 정치에 입문하기 훨씬 전의 일이다. 지난 1986년 학력고사 전국 수석을 했을 때다. 부유하지 않은 형편에서 일군 성공이 주목받으며 화제가 된 것. 달동네로 불리던 서울 봉천동(奉天洞)에서 태어난 두부공장 집 딸은 이제 자신이 자란 동네 이름처럼 하늘을 섬기는(국민을 위한) 국회의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문을 열면 바로 방이 있고 연탄난로가 있었다는 거예요. 넉넉하지 않았지만 저에게는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부모님과 이웃분들 간에 따뜻한 정이 있었죠. 하지만 나중에는 그렇게 같은 환경에서 자랐던 친구들이 저와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대체 이 우연의 조합은 어떻게 생기는 걸까’라는 의문을 갖게 됐습니다.”
그런 어린 시절은 현재 이 대표가 걷는 길에 크건 작건 영향을 줬을 법하지만 그이는 “성장환경이 어떻든 간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무엇을 해왔으며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학력고사 수석을 했을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기억해요. 참… 어린 나이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모를 때였는데 말이죠(웃음). 대학을 다니면서는 나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세상을 보는 눈은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에 대해 많이 고민하게 됐습니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이 대표는 이후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변호사가 됐다. 그러나 성공의 길목에서 그이가 선택한 것은 ‘인권변호사’라는 험난한 길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조금 더 편안한 삶을 추구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이가 그러한 선택을 한 이유는 뭘까.
“몸은 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하거든요(웃음). 적어도 그 반대의 경우보다는…. 둘 다 편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지 않으니 마음이 편한 쪽을 택한 셈이죠. 저는 교회에 다니진 않지만 십일조라는 것이 있잖아요. 그때까지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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