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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법복을 벗고 자연인으로… 김영란 전 대법관 삶의 또 다른 방식을 말하다
무거운 법복을 벗고 자연인으로… 김영란 전 대법관 삶의 또 다른 방식을 말하다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0.10.06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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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책읽기와 일상의 여유를               
                 즐기는 것이 가장 큰 변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도 즐거워”

가을을 알리는 가랑비가 잔잔히 내리던 날, 퇴임 후 일상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는 김영란 전 대법관을 만나기 위해 경기도 화성으로 향했다. 2년 전 이사했다는 아파트는 도시의 혼잡함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한 교외에 자리하고 있었다. 주차장 저쪽에서 취재진을 반기는 김영란 전 대법관. ‘소수자의 대법관’이라 불리며 흔들림 없는 소신으로 법관의 위엄을 보였던 그이의 재판정 밖 모습은 생각보다 작은 체구의 온화한 중년 여성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대법관으로 살아오면서 보였던 모습도 그러하지만 손수 차를 내오는 그이에게서 소탈함 외에는 그 어떤 가식도 느낄 수 없었다. 대법원 생활과 대법관의 소명에 대한 답을 할 때는 간간이 진지한 표정이 배어 나왔지만 시종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그이는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에 빠진 근황을 털어놓았다.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서 가족과 같이 밥을 먹는 것이 참 좋더라고요. 일할 때는 그저 차려놓고 나오기 바빴거든요. 이제는 한결 여유로워졌어요. 남편과 딸이 나가고 나면 주민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피트니스센터에서 요가를 한 시간쯤 하고 돌아와서 책을 읽어요. 때 되면 점심 먹고 다시 책 읽고, 그런 일상을 반복하고 있어요. 그동안 일에 파묻혀 살았는데 시간이 없어 쌓아두기만 했던 책들을 읽으니까 정말 좋아요(웃음). 휴식이라는 것보다는 그간 의문을 갖고 있던 것들을 찾아보고 열심히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면서 재충전하는 느낌이 드네요.”
대법관으로 보낸 시간이 6년이라고 하지만 그 이전을 포함해 무려 29년여를 판사로 살아왔기에 한편으로는 지금의 여유가 어색할 듯도 하다. 그러나 그이는 “굉장히 오랫동안 이 생활을 한 것 같은 평온한 느낌”이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매번 누군가의 인생에 크든 작든 영향을 미치는 판결을 해야 했던 그이이기에 퇴임 후 느껴지는 아쉬움보다는 해방감이 더하다.
“후련하죠. (판사 일이) 다른 사람 사건에 감 놔라 배 놔라 간섭하는 거잖아요. 누군가의 인생을 좌우해야 하는 자리에서 벗어났으니 굉장히 후련하죠(웃음).”

‘칼’ 반환하고 봉사의 길 찾겠다
지난 8월 퇴임식에서 김영란 전 대법관은 퇴임사 말미에 “내게 주어진 칼을 돌려드리고 30년 가까운 법관의 경험을 살려 세상에 기여하고 봉사할 수 있는 새 길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법조인으로서 부와 명예를 유지할 수 있는 변호사의 길을 가지 않겠다는 것. 이는 ‘딸깍발이’(국어학자 이희승 씨의 수필 제목,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로지 ‘딸깍딸깍’ 소리나는 나막신만 신고 다닌 청렴한 선비를 빗댄 말)라는 별명을 가진 청빈 법관으로 이름을 떨치다 지난 2004년 퇴임하고 대학 교수가 된 조무제 전 대법관 이후 두 번째로 기록되는 사례였다. 첫 여성 대법관이었던 만큼 시작부터 줄곧 주목을 받아온 그이에게 각계의 찬사가 이어졌다. 그러나 정작 그이 스스로는 그러한 찬사에 익숙하지 못한 듯했다.
“감사하지만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해요. 저는 그저 읽다가 접어놓은 책도 보고 싶고 정말 개인적인 충전 욕구가 커서 (변호사를) 않겠다고 한 건데, 사회적으로는 그러한 선택에 굉장한 의미부여를 해주셔서 좀 불편하긴 하더군요. 물론 대법관이라는 자리가 중요하긴 하지만 저는 그렇게까지 크게 평가될 줄은 생각 못했어요.”
사실 그이에게 대법관의 생활이란 격무의 연속이었다. 업무시간은 물론 밤이 되어서도 하던 일을 집으로 가지고 와야 하는 날이 많았다. 스스로 원하는 것을 하기보다는 맡은 직무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혼신을 다한 시간이었다.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있다는 것’, 요즘 그이가 느끼는 가장 큰 변화이자 기쁨이다.
“전에는 운전을 했는데 그간 지급된 차량만 타고 다니다 보니 운전을 못하게 됐어요(웃음). 일상적으로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슈퍼마켓에서 장을 봐요. 사람들이 저를 잘 알아보지 못하니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살죠. 요즘 들어 언론에 퇴임 관련 기사가 나오면서 동네분들이 알아보시고 많이 놀라긴 하시는데…. 그래서 약간 불편해지긴 했지만 전 여전히 개의치 않고 슬리퍼에 트레이닝복을 입고 다녀요(웃음).”
아직 퇴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기에 구체적인 방향은 설정하지 않았다. 여유 없이 바쁘게 살아온 인생에서 잠시 동안 달콤한 게으름(?)을 조금 더 누릴 생각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삶에 대한 기준은 퇴임사에서도 밝혔듯 확고하다.
“판사로 30년 가까이 살았으니 사회적으로 판사라는 직업이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고 재판이 우리 사회에서 가지는 기능에 대해 좀 더 원론적인 공부를 해보고 싶어요. 정의라는 것은 결국 권리와 물질의 분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기준에서 분배를 해야 하고 그러려면 사법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고, 삼권분립은 어떻게 되어야 한다든지…. 더 나아가 민주주의나 자유주의 같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제도를 정한 원칙들을 검토하는 일도 해보고 싶고요. 그후에 사람들에게 제 생각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교수가 되고 싶다는 것은 아니에요. 자유를 얻었는데 다시 갖다 바치는 것은 싫어요(웃음). 물론 어느 정도 공부가 되면 전달할 방법은 찾아야겠죠.”

뜨거운 열정, 차가운 이성으로 살아온 시간
지난 2004년 여성 1호 대법관으로 취임할 당시부터 퇴임할 때까지의 시간은 그이에게 만만치 않은 짐이었다. ‘최초’라는 이름의 무게 앞에서 때론 여느 남성 대법관보다 더 노력하고 스스로를 다그쳐야 하기도 했다.
“일 자체가 힘든 것도 있지만 사람들을 판단한다는 것은 참… 때론 ‘왜 하필 내가 이렇게 남을 판단하는 직업을 가졌나’ 하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다른 대법관님들과 생활하는 데 있어 저 스스로 소수의 성이라는 것을 의식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고요. 한편으로 최초라는 수식어 덕분에 굉장히 롤 모델로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돼 있다는 생각을 계속해야 했죠. 그 모든 게 부담이어서 지금 더 홀가분하다고 강조하는 듯해 좀 그렇지만, 이젠 어쨌든 벗어난 것 같아요.”
많은 부분 변화하고 있지만 아직도 보수적이라 인식되는 법조계의 여성 대법관으로서 그이는 다양성의 상징이었다. 그이 스스로도 “많은 나라에서 사법부를 선출직으로 하지 않는 중요한 이유는 다수결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말한 바 있다. 사회적으로 주목받았던 판결 중 아직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종교의 자유에 대한 판결과 여성 종중원 인정 판결 등이다.
“잘 세어보지는 않았는데 대법원 재임 기간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소수 의견을 냈던 것이 대략 열다섯 건 정도였다고 하더군요. 그중에는 제가 직접 판결문을 쓴 것도 있고 다른 분의 소수 의견에 동참한 경우도 있고요. 강의석 씨의 경우는 다수 의견이었어요. 그 사건의 법률적인 의의는 학생의 종교 자유와 학교의 종교교육의 자유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학생의 종교나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학교 행위에 한계를 그어준 것이죠. 학생으로부터 동의를 얻거나 원치 않으면 강제해서는 안 된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지만 우리나라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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