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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숙 문화재청장, 대한민국 문화를 말하다
정재숙 문화재청장, 대한민국 문화를 말하다
  • 송혜란 기자
  • 승인 2019.01.0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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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모두가 문화잔치에 살기를...
정재숙 문화재청장.
정재숙 문화재청장.


지난 9월, 신임 문화재청장에 정재숙 전 중앙일보 기자가 임명됐다. 현직 언론인 출신이 문화재청장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30년 넘게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며 ‘문화계 마당발’, ‘베테랑 기자’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닌 정재숙 문화재청장. 경직된 공무원 사회에서 여성 리더로서 정 청장이 풍기는 에너지는 생각보다 훨씬 활기차고 열의로 가득했다. 문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통찰력으로 꽁꽁 무장한 그녀를 서울 경복궁 한복판에서 만났다.

문재인 정부 들어 여성 고위공무원들이 늘고 있다.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부터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 강경화 외교부 장관 등 장관급은 물론 최영애 국가인권위원회장, 김외숙 법제처장,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등 정부 부처에서 당당히 유리천장을 뚫고 우뚝 올라선 여성 리더들. 정 청장도 그 중 한 명이다.

“엊그제 국회에서 회의를 마치고 여성 지도자들끼리 핸드폰으로 ‘저녁 먹으러 가자!’라고 문자를 주고받았어요.(웃음) 이렇게 사회에서 소통할 수 있는 여성 동료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꽤나 큰 기쁨입니다.”

특히 호를 스스로 ‘남덕’이라고 지었다는 정재숙 청장. 올해 쉰 중반에 들어선 정 청장의 어린 시절과 사회 초년생 시절은 남녀차별이 매우 극심했다. 그럼에도 정 청장은 자신이 가정에서, 사회에서 오로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불합리한 대우는 받은 적은 드물었다고 기억한다.

“저희 집이 딸만 둘인데요. 제가 장녀예요. 어머니가 저를 굉장히 어렵게 가졌기 때문에 비교적 다른 집 딸보다 독립적으로 키워주셨어요. 제가 쭉 가져온 이력 중에서도 여자라고 봐준 곳도 없었고, 반대로 여자라고 구박하거나 하는 분위기도 아니었지요. 어떻게 보면 저는 행운아지요. 그래서 호도 ‘남의 덕을 보고 산다’는 뜻의 남덕이라고 직접 작명했답니다.(웃음)”

물론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남녀편견이 자리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며 여성리더로서 자신이 좋은 본보기를 보여야 할 점도 상당하다는 정 청장. 더욱이 AI시대를 맞아 앞으로 부드러움 등 여성성이 어마어마한 경쟁력을 가질 것으로 그녀는 전망하고 있다.

“인류문명이 점점 발전하면서 지금은 나날이 극으로 가는 아주 날카로운 단계에 있어요. 기계적이면서 딱딱하기만 한 현대 문명에서는 더욱 여성에게 요구하는 게 많습니다. 갈수록 사회에서 여성들이 해야 할 역할들도 무척 커질 것이므로 여기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정재숙 문화재청장.
정재숙 문화재청장.

 

선덕여왕에게 배울 것들

더욱이 여성들에게 문화적 소양은 필수 덕목이다. 문화를 마치 공기처럼 호흡해야 한다고 정 청장은 이야기했다. 그녀 역시 어제 바쁜 일정을 소화한 후 최근 화제작 <보헤미안 랩소디>를 챙겨 보는 일을 절대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매일 문화 잔치 속에서 살도록 하는 것. 이는 그녀가 문화재청장으로서 펼칠 가장 이상적인 문화사회의 모습이다. 문화재청장이라면 반드시 짊어져야 할 임무에 어깨가 썩 무겁기도 할 터. 신임 정 청장은 그동안 잘 유지해 온 문화 네트워크를 적재적소에 활용, 대한민국의 문화재청장으로서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강한 포부를 내비쳤다.

대학에서 교육학을,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한 정 청장은 1987년 <미술세계>라는 잡지를 시작으로 서울경제신문, 한겨레신문, 중앙일보 등 문화부 기자 생활만 어언 30년을 지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2000년대는 그야말로 한국 문화가 만개한 시대다. 모든 분야에서 좋은 작가가 탄생하고, 그들이 훌륭한 결실을 맺었던 시기로 손꼽힌다. 제일 존경스러운 문화인들과 놀았던 30년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고 황홀했다고 그녀는 털어놓았다.

그동안 문화계 어른들이 평생 갈고닦은 마음을 자신의 기사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주었듯 이제는 자신이 그들에게 멋진 선물로 보답해야 할 때다. 첫 기자 출신 문화재청장으로서 정 청장은 롤 모델로 삼고 싶은 역사 속 여성 지도자로 선덕여왕을 치켜세웠다.

“저는 여성과 남성의 구분은 어느 정도 명확해야 된다고 봐요. 여성이 남성에 비해 덕이 더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덕에 위엄을 잘 조화시키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선덕여왕에게 본받을 점이 굉장하다고 봅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문화

문화부 베테랑 기자 출신의 정 청장은 문화계에서 마당발로 소문이 자자하다. 인적 네트워크가 상당하다. 문화란 것도 어찌 보면 결국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밑바탕이 아닐까. 사람 몸속에 흐르는 액체, 그 끈끈한 피가 곧 문화이며, 그 중 문화유산이 이를 가장 대표하는 문화라고 그녀는 설명했다.

“우리 선조들이 남긴 재산인 문화유산 앞에서 세계인도 하나가 될 수 있어요. 외국인들도 수천 년 해묵은 남의 나라 고궁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잖아요. 남과 북도 문화유산 앞에서는 똑같은 민족일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정 청장의 궁극적인 꿈은 매일이 문화잔치가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국내 모든 땅이 문화 강산이 됐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소원했다. 여기서 정 청장의 역할은 코디네이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문화재청에는 각종 전문가들이 참 많아요. 그분들이 일을 잘할 수 있게 제가 취재 일선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이어주면 될 것 같아요. 문화재청 전문가들과 문화인들의 연결, 문화재청과 국민들과의 연결은 물론 해외 특파원 때 만난 외국 인적 네트워킹도 잘 활용하고요.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6·25 전쟁 등 어려움과 1960~70년대 무분별한 개발을 겪으며 소실된 문화재를 복원, 보존하는 데 힘써왔다면 이제는 이를 활용해야 할 단계가 됐어요. 지금 이 순간 제가 나라의 부름을 받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문화재는 휴전선이 없다

내년이 되면 설립 20주년을 맞는 문화재청. 1940~50년대 미군정 때 이황과 조선시대 왕족 유물을 관리하는 것을 시작으로 교육부 아래 관리부로 있다가 청으로 발돋움한 지 꼬박 20년이 되었다. 이에 정재숙 청장이 이끌 새해 문화재청의 기본 방향은 크게 세 가지로 잡혔다.

가장 먼저 내후년 6·25 전쟁 70주년을 맞아 70년 가까이 헤어져 있던 남과 북을 다시 접붙이는 데 문화유산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힘쓸 예정이다. 체육, 대중음악 등 이미 문화가 남북 교류에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우리가 5,000년을 같이 살고 겨우 70년을 떨어져 있었다”고 말했듯 문화유산을 통해 민족 동질성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다면 남북은 곧 통하기 마련이다.

벌써 2015년 중단됐던 개성 만월대 공동발굴을 지난 10월 22일부터 재개하기로 합의한 후 실제 진행이 한창이라고 그녀는 이야기했다. 다행히 만월대가 고려시대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된 후 약 600여 년간 방치됐음에도 궁궐 주요 건물지와 관련 유물들이 극히 양호한 상태로 지하에 보존돼 있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정 청장은 고구려고분 벽화 보존 처리와 미발굴 고분 발굴조사도 남북이 공동으로 추진하기 위한 협의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문화재는 휴전선이 없어요. 5,000년 넘게 우리 곁에 남아있는 게 무엇이었는지 증명해주고 있잖아요.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의 오랜 핏줄이었습니다. 가치가 증명된 문화유산을 가지고 남북이 다시 만나는 게 근본적으로 우리 피를 뜨겁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정재숙 청장은 문화는 자연스레 녹아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재숙 청장은 문화는 자연스레 녹아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는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

둘째, 근대에 대한 재해석도 문화재청장으로서 그녀의 소임이다. 대한제국 고종황제를 비롯해 민족 역사의 정체성을 문화유산으로 되찾으려는 노력도 같이 진행할 것이라고 그녀는 전했다. “우리 역사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이견이 많으나 이 또한 문화유산으로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마지막으로 20년 동안 문화유산의 복원, 보존으로 되찾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앞으로는 이를 잘 활용해 보겠다고 그녀는 다짐했다. 예를 들어 관광객들의 출입을 일절 금지했던 경북궁 궁궐 안을 대대적으로 공개한다는 것. ‘함께’라는 말을 유독 좋아한다는 정 청장은 문화유산도 국민과 함께 즐기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한마디로 녹아드는 거지요. 우리가 보통 ‘궁’ 하면 건물 밖 추녀, 건축 재료들만 주로 봤는데요. 이제는 궁궐 안으로 들어가 옛 왕조들의 생활상을 직접 살펴보려고 해요. 옛날 선조들이 과연 어떻게 살았는지 함께 그 속으로 들어가 몸소 체험해 보자는 겁니다.”

물론 일각에서는 문화재 훼손 우려도 제기하지만, 하나하나 천천히 동시에 진행하면 될 일이라고 그녀는 자신했다.
“문화유산을 복원과 동시에 활용해 나가려고 해요.”

씨름이 곧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경복궁을 거닐면서 인터뷰하던 중 정 청장은 후원이 매우 아름답다고 내내 감탄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모두 다른 게 궁궐 내 정원의 매력이라고 한다. 굳이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SNS 덕에 퍼진 한복문화는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을 막바지에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관광객들 사이로 노랗거나 붉게 물든 낙엽이 휘날리며 장관을 연출했다.

“세종대왕 시절부터 왕이 백성들과 소통하던 광장도 서울시와 손잡고 곧 복원하려고 해요. 흥례문을 중심으로 넓은 직사각형 공간인 ‘월대’가 머지않아 되살아날 예정입니다. 8차선 도로를 6차선으로 줄여야 하므로 국민의 도보권이 침해될 수 있지만, 이 방안 또한 깊이 고민하는 게 제 과제입니다.”

그녀가 청장으로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과 북이 따로 유네스코 세계 무형문화유산으로 신청한 ‘씨름’에 대해 모두 등재 권고 결정이 내려졌다는 기쁜 소식이 전파를 타면서 첫 남북 공동 등재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이 호조를 이어 정 청장이 펼칠 문화사회도 계속 흥해 갈 것으로 기대해 본다.


[Queen 송혜란 기자] 사진 양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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